전출처 : 내가없는 이 안 > 태풍과 태양의 시기를 천천히 거닐어보았나



_태풍태양

거참, 비디오 빌려온 걸 새까맣게 까먹고 그냥 자버렸다. 간만에 복용한(!) 알코올 기운에 여유작작 부리며 누웠는데 눈을 반짝 떠보니 아침 5시. 일어나자마자 영화를 볼 만큼 영화에 미쳐 있진 않지만 하루의 움직임을 생각해볼 때 그 시간밖에는 없었다. 연체료 오백 원이 송곳처럼 바짝 치켜올라온 시간보다 아까웠단 말인지, 원.

<태풍태양> 익사이팅 로맨스, 라는 표현을 걸고 나왔다. 사회때가 녹록하게 묻은, 그래봤자 삼사십 대쯤 되는 인간들 눈에는 거리의 부랑자처럼도 보이는 너덜너덜한 패션에 인라인을 타고 달려야 숨을 쉬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들이 나온다. 역시 그래봤자, 십대를 조금 넘긴 이십 대 초입의 청춘들이다. 겨우 그 정도의 차이도 이 경계에서는 딴딴한 벽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고양이를 부탁해>를 만든 전력을 가진 정재은 감독은 그 아이들을 음습한 지하방 같은 곳에서 찍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서 들어가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는 곳은, 제법 큰 아파트다. 소요(천정명 분)라는 아이가 혼자 사는 곳. 소요는 하루아침에 쫄딱 망해 해외로 도망친 부모 덕분에 혼자서 넉넉한 집에 산다. 마치 할 일은 없고 에너지는 뻗치고 생각도 뭐 그리 복잡하게 얽혀들지 않아 공허할 만치 휑해진 그의 마음처럼.

그래서 소요의 표정은 묘하다. 뭔가 꽉 압착된 불만이 있는 것도 아닌 듯하고, 그렇다고 흐느적거리며 이리저리 치이고 다닐 만큼 어리석어 보이지도 않다. 약간 찡그린 얼굴은 마치, 지금 햇볕이 너무 뜨겁네, 라고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럴지라도 소요에게 표정이란 게 볼록 올라올 때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그는 인라인 스케이트를 탈 때만큼은 땀을 흥건히 흘리고 활짝 웃을 줄 안다.

그런 소요의 주변에 두 명의 형과 한 명의 누나가 서게 된다. 누가 먼저 아는 척을 하고 다가왔는지는 모른다. 단지 그들은 인라인 스케이트를 신고 달리는 중이라는 거다. 형 A는 인라인을 타면서 목적이 생겨서 기뻤다고 말한다. 그에게 기쁨을 준 목적이란 건, 자기 삶을 인라인 스케이트 세계의 미래라는 지붕 아래 뚝딱거리며 만들고 싶다는 것. A는 그래서 조금 고지식하다. 목적의식이 뚜렷하기에 조금 진지하게 인라인을 탄다. 반면 B가 인라인을 타는 건 무조건 재미가 있어서다. 겉멋도 번쩍거리는 듯한 그가 브루스 윌리스 같은 표정으로 툭 내뱉는 말은 그가 인라인을 타는 이유를 분명히 보여준다. "그만하자, 재미없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인라인을 (잠시) 떠난다. A는 미루기만 했던 군대영장을 받아들이고, B는 지하철 분실물센터에 가져다놓는다. 언젠가는 찾으러 오겠죠, 라는 말을 남기고. 그는 팔아먹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고 유예라는 선택을 한 것이다. B의 여자친구였고 소요가 좋아했던 누나도 떠난다. 내 자리를 찾아가야지, 라는 말을 남기고. 그 자리가 무엇인가는, 그녀도 모른단다. 하지만 내 눈에는 엄연히 달라 보인다. A와 B는 인라인을 잠시 분실했고, 그녀는 버렸다.

그리고 소요는 A가 준비하던 세계인라인선수권대회에 참가한다. 천천히 거닐다, 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 소요 안에는 A와 B가 모두 내재되어 있다. 그들을 만나고 인라인을 타면서 얻은 것도 있었고, 잃은 것도 있었다고 말하는 그는, 앞으로도 인라인을 타면서 계속 얻을 것이고 계속 잃을 것이라는 걸 안다고 말한다. 찡그리기만 했던 얼굴에는 이제 생각의 흔적이 조금씩 엿보이며 그는 경기의 스타트를 끊는다.

이젠 자극적인 것이 너무 익숙해져서 이렇게 소소하게 지나가는 태풍과 나른한 태양에는 아무도 열광을 하지 않나 보다. 이 영화는 일찍 극장에서 내려졌다. 조금 심심한 태풍이 아닌가, 조금 견딜 만한 태양이 아닌가, 하는 불평이 슬며시 올라올 즈음... 아침 내내 영화 속 인라인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스치고 지나갔다. 한 번도 인라인을 신은 적이 없는데도, 휙휙 바람소리를 내는 그들의 움직임이 슬금슬금 나를 자극했다. 그러니까 <태풍태양>은 이상하게도, 내 이십 대까지 엉겨붙어 갉작거리며 생각하게 하는 영화였다.

B가 변해가며 말한다. "생각이 많아져." 야심 없고 재미만 추구하던 단순한 놈이었는데 언제부턴가 생각이란 게 눈덩이 굴러가듯 커져가며, 그는 인라인을 더는 쉽게 타지 못한다. 그 갈등의 도화선이 뭐였을까. 먹고 살아야 하는 사회와 마냥 허허롭게 웃으며 달리는 인라인이라는 행복의 만남, 그 경계였을까. B도 어쨌든 입에 풀칠하고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라는 걸 서서히 압박받아오는 그 지점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A와 B의 갈등을 공평하게 껴안은 소요는 조금 더 쿨하고 탄탄한 인라인을 타고 달릴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런데... 태풍도 지나가고 태양도 작열했던 시기를 나도 거쳐왔을 텐데... 나는 청춘의 방황기를 천천히 거닐어보았나... 왜 화살은 또 내게로 돌리는 거냐. 이 이십 대의 인라인 아이들과 마주서 갈등의 반대편에 선 어른들이 있었다. 아이들이 침을 찍찍 뱉으며 하던 욕지거리가 혹시 내 발밑에도 떨어질까, 이제 그것도 두려워진다. "배때기에 기름낀 돼지"라는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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