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마냐 > '남극일기' -우리의 욕망이 이곳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우리의 욕망이 이곳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저 대사 앞에서 소름이 돋았다. 지난해 후배 W가 건네준 남극일기 시나리오. 영화 시나리오라곤 난생 첨 구경해봤는데, 그냥 빨려들어갔다. 오소소소 소름이 돋고, 인간의 광기가 전염될까 떨렸다. 봉준호 감독이 각색했다길래, "오우, 역시~"라며 괜한 감탄사까지 내뱉었다. 야, 이거 영화로 만들어지면 끝내주겠다 싶었다. 하지만 영화담당기자 W 왈, "신인감독이기 때문에, 시나리오가 좋아도 영화 나와봐야 안다"고 했다. 어쨌든 우리는 시나리오에 반해, 영화를 기다렸다.
남극 대륙의 한 가운데라는 `도달 불능점', 이름도 무시무시한 그곳을 향해 탐험대가 장정에 나섰다. 전설적 탐험가 이도형(송강호)과 그를 숭배해온 막내 김민재(유지태)까지 6명. 다들 자기 몸집만한 썰매를 끌고, 한발 한발 내딛으며 하얀 대륙에 도전한다. 자연 재난 영화? 뭐, 그런 측면도 있다. 눈보라와 크레바스는 인간의 도전을 우습게 만든다. 하지만 자연의 위대함에 도전한 감동극? 그건 아니다. 영화는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파멸을 향해 치닫는지에 초점을 맞췄다. 도달 불능점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망은 집착이 되고, 탐험대의 정신을 갉아먹는다.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통신설비 부품을 몰래 빼내 씹어 삼키는 대장의 광기는 전염된다. 부대장은 어느새 무게를 덜기 위해 굳은 살까지 도려내고 있다.
일단, 나로서는 영화에 몰입하는데 몇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시나리오에선, 대장의 비극적 과거도 뒤통수를 후려쳤었다. 그의 분노, 좌절, 슬픔이 마초적 정복욕으로 전이되는 과정이 아팠다. 하지만, 나는 이미 스토리를 모두 알고 있는 것을. 대장의 광기가 어떻게 대원들을 파멸시키는지, 그 구체적 방법도 충격이 될 수 없었다. 어떤 연기로 어떻게 화면에 재현되느냐의 문제였을 뿐이다.
송강호의 무표정한 연기는 무섭다. 싱글벙글한 그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가 없다. 유지태의 연기는 그리 큰 감동을 주는 편은 아니다. 역할 자체가, 민재의 역할은 다소 수동적인 막내로부터 출발한 탓일 수 있다. 송강호와 유지태의 관계는 부자 관계를 닮아야 하는데, 둘의 끈끈함이 덜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 내도록 백색 대륙만 보고 있는 것도 조금 난감. 계속 걷고, 또 걷고....초반부 일찌감치 한 사람 죽기 시작, 하나씩 하나씩 쓰러질게 뻔하다는 거, 그걸 기다려야 한다는 건 좀 그렇다. 기승전결의 구조가 아니라 기전전전전전전결이라고 할까. 적당히 회상 장면 혹은, 상상 장면 등으로 탐험복장이 아닌 개별적 인간으로서 그들의 스토리를 엿보았다면, 뭔가 다를까? 감독은 베이스캠프를 지키는 여대원(강혜정)과 민재의 로맨스도 넣을까 했다던데, 글쎄...그건 별로 아쉽지 않은데, 암튼 긴장을 조이고 늦추는 리듬감이 조금 단조롭다.
물론 궁시렁이 전부는 아니다. 영화, 잘 만들었다. 90점 주려니 조금 아쉽다는 거지, 85점은 줄 수 있다. 기대치가 워낙 높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인간의 욕망, 집착, 광기를 2시간 내도록 쉼없이 지켜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저 한마디! 비록 영화 속에선 시나리오 만큼의 강렬한 느낌이 전달되지 않았지만, 저 대사....우리의 욕망이 이곳을 지옥으로 만들었다.......몇번 곱씹을 수록 맛이 달라지는 대사다.
백색의 공포를 압도하는 음악도 중간중간 문득문득 괜찮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대사 전달이 잘 안되는 것은 흠이다. 후반작업의 문제였을까? 송강호를 비롯, 배우들의 대사가 제대로 안 들리는 일부 장면이 아쉬움을 더한다. 음. 혹시 청력 문제인가? ㅠ.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