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레나
한지혜 지음 / 새움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슬픈 유행어처럼 장기적 경기침체로 인한 청년실업이 오십 만에 육박하는 우울한 현실을 잘 묘사한 단편소설집이다. 주목할 점은 기존의 질척모드로 진행되는 여성작가들의 작품과 한지혜의 소설 속 화자들은 좀 다른 면이 있다, 라는 것이다. 


‘외출’, ‘이사’에서는 대부분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으로 인해 자의건 타의건 룸펜이 된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직장에서 폐기처분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생존을 위해 굴종의 시간을 견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단편들이 맘에 들었던 것은 해고를 당하고 난 이후에도 당사자들이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 라는 것이다. 그들은 특유의 가벼운 냉소와 유머를 다룰 줄 알며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모종의 낙관을 가지고 있다. 불륜이나 자기애에 도취되어 질질 짜는 기존의 여성 소설에서 보여주던 감각적인 체념이 아닌데다 상황이나 말투부터 차별화된다.  


‘왜 던지지 않았을까, 소년은‘은 한국에서 열렸던 지난 월드컵대회의 풍경을 다룬 작품이다. 다수가 왜곡된 힘을 결집하고 행사하면 소수의 권리를 짓밟는 무서운 집단광기로 돌변할 수 있다는 소설의 메시지는 눈길을 끌었다. 자신이 수행해야 할 규칙을 제대로 지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성을 잃은 관중들이 볼보이에게 가한 폭력적인 행위는 굳이 월드컵 상황이 아니더라도 현실의 소수자 혹은 사회적 약자에게 적용될 수 있을 듯하다. 이번 소설집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


물론 연극무대에 선 배우가 모노드라마를 연기하듯 내면의 심리상태에 초점을 맞춘 작품, ‘사루비아‘를 대했을 땐 그다지 신선할 게 없구나,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뭔가 형식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범죄행위를 흡입력 있는 미스터리로 풀어나가고 시점도 엇갈리게 해 궁금증을 유발한다. 기면증이라는 소재가 흔하지는 않지만 소통불능에 처한 개인의 상황을 나름대로 잘 표현했다. PC 통신과 오프라인 모임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안녕, 레나‘도 어쩌면 현대사회가 낳은 외로움과 소외의 현실을 반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점점 긴장감 있게 진행되었던 소설이 왠일인지 결말쯤에선 맥이 탁 풀려버려 좀 아쉽다.  


‘한 마을과 두 갈래 길을 지나는 방법에 대하여’는 얼핏 하루키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등장하는 해골, 꿈읽기, 도서관 사서, 그림자와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데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언지를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이번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재미와 여운을 남기는데 그렇지만 소설적 감동은 부족한 편이다. 한지혜의 소설들은 비인간적인 자본주의 사회에 부딪힌 젊은이들의 절망을 다루고 있다. 그들이 처한 상황에 크게 공감할 순 있어도 뭔가 2% 찜찜한 것은 사실이다. ‘사회의 부조리’보다는 ‘개인의 심리’에 좀 더 밝은 세기의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이다보니 작품이 내밀하긴 한데 스케일이 작아지는 느낌은 어쩔 수 없다.


* 이제부터 별점에 좀 짜지기로 해서 별 셋과 넷 사이에서 고민했는데 작가의 작품에 상품처럼 등급을 매긴다는 것이 얼마나 건방진 태도인가. 좋은 작품을 보여주신 한지혜 작가에게 죄송하다. 아울러 장편소설도 기대해 보고 싶다는 말씀을 드리며, 이만 총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