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비연 > 주먹이 운다

어렸을 때는 누구나 외우는 권투 선수 이름 하나 둘 정도는 알고 있었고 가끔 경기하는 걸 보며 재미있어 하기도 했다. 올림픽이라도 할라치면 우리나라의 주 메달 종목이라는 이유만으로 채널을 고정하고 흥분하기도 했고 호쾌한 승부에 감탄하기도 하다가 피터지는 경기 내용에 몸서리치기도 했다. "홍코너 체중 63.5kg, 아시안 게임 은메달리스트, 강.태.식!" 이라 외치는 경기 안내자의 마이크 소리가 영화 속에서 울려퍼질 땐 어린 시절의 추억 한 켠이 문득 밀려왔다. 왠지 친근한 그 음조...그 모습....지금은 아는 권투 선수도 없고 사실 관심도 없어졌고 올림픽같은 경기도 열심히 안 보는 덕에 완전히 잊었던 스포츠였는데, 추억 속엔 살아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권투라는 스포츠가 원래 가진 거라곤 몸뚱이밖엔 없는 사람들이 배고파 하는 거라는 인식이 많아서 그 단어를 들으면 절실함, 비참함..그런 감정들이 같이 따라온다. 영화에서도 나왔지만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던" 무하마드 알리도 머리를 너무 얻어맞은 나머지 이젠 손과 머리를 덜덜 떠는 파킨슨병 환자가 되어 버렸고 그렇게 권투 선수에 대한 이미지도 함께 나빠져갔던 것 같다...그래서 난 이 영화를 피하고 싶었다. 류승완 감독의 성향상 분명히 밑바닥 인생을 그릴 것이고 그래서 아마 내게 참담함을 안겨줄 뿐이리라는 선입견으로 인해 아무리 사람들이 많이 보고 재미있다고 떠들어대어도 보지 않으리라 했었다. 결국은 보았지만..쩝.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내가 내내 눈물을 흘린 이유는 그 영화의 내용이 비참하고 보기에 안스러워서가 아니었다. 류승완 감독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인생이라는 것, 더더군다나 밑바닥 인생이라는 것을 그려내고 있었지만 묘하게도 그것이 꼭 남의 인생만은 아니라는 느낌을 전한다. 그래서 난 이 감독이 인생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품게 된다.

정말 절박한 인생의 막판에서 마주친 두 사람. 둘 다 져서는 안되는 게임에 임하기까지 감독은 그들의 인생을 찬찬히 그려나간다. 구질구질하게 주변 설명을 많이 하지도 않고 그저 현상만을, 그리고 그 속에서 조금씩 내비치는 삶에 대한 애정들만을 보여준다. 조연들의 호연도 한 몫을 한다. 나문희나 변희봉의 담담한 연기, 임원희의 비열하지만 결코 미워할 수만은 없는 모습, 류승범의 아버지 역으로 나온 기주봉의 아들에 대한 전혀 과장되지 않지만 그 깊이가 가슴 속까지 파고들게 만드는 연기들은, 두 주인공의 인생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인생은 그런 게 아니겠는가. 천호진의 극중 대사처럼 사연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그러니 누구에게 승리를 주고 누구에게 패배를 주고 할 수 있는가 말이다. 그러나 냉혹한 인생사에서는 무승부란 없이 사정봐주는 것도 없이 승패는 나뉘어진다. 다만, 그 승패의 파란만장한 갈림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속에서 얻는 것과 잃는 것이 공존함을 보여준다는 것이 이 영화의 큰 매력이다. 난 이 영화를 보면서 권투를 본 게 아니라 인생을 보았고 느낄 수 있었다.

최민식과 류승범은 최고다. 배우라는 이름을 붙여줄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들 중에 속한다고 생각된다. 누구에게나 권하고 싶은 영화다. 절대 실망하지 않을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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