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플레져 > 여자, 정혜



내가 처음 근무했던 회사는 마포에 있었다. 사무실이 세든 88빌딩. 음식을 시켜먹을 때 "여기 88빌딩 201혼데요" 라고 하는  어감이 아주 이물스러웠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차츰차츰 사라지는 88올림픽 당시에 지어진 건물이었다. 시멘트 바닥은 천년만년 하릴없이 존재할것만 같아 난 회사가는 게 끔찍하게 싫었다. 그나마 퇴근 후 신촌에서 친구들을 만나 어울리는 일, 신촌을 샅샅이 탐문 하며 나의 모진 하루를 위로했다. 사무실을 벗어나 육교 건너편 우편 취급소, 깨끗한 은행, 대형 문구점에 가는 일이 더 즐거웠다. 우편취급소에는 아주 무뚝뚝한 아가씨 한 명과 잘 기억나지 않는 소장이 약속한 시간에 문을 열고 닫았다. 어느 토요일 오후에 우편물을 들고 갔을 때 아가씨는 물방울 무늬의 블라우스를 입고 거울 앞에서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정혜가 근무하는 우편취급소에는 정혜를 포함해 세 명의 아가씨와 소장이 근무한다. 소장은 늘 자리를 비우거나 점심 시간이 지나도 제때 돌아오지 않는다. 그녀들은 퇴근후 치킨집에서 맥주와 튀김닭을 먹지만 별 다른 이야기는 나누지 않고 치킨을 먹으며 축구 중계를 본다. 왜 그녀들은 고단한 일과를 마치고 바로 집에 돌아가지 않는 것일까...



아직도 테스의 남편 엔젤 같은 남자가 존재한다. 아직도 란 말은 틀린 말이다. 영원히 란 말이 더 합당하다. 조금 인심써서 말하자면, 세상에는 아주 많은 종류의 인간이 존재하고 있다. 정혜의 남편은 엔젤 처럼 나 말고 다른 남자와의 관계가 당연히 있을 것이라 믿고 거리낌없이 묻는다. 엔젤처럼 신혼 여행지를 이탈하지는 않았다. 정혜가 나와버렸다. 잘했다, 정혜!

소설을 읽은 상태가 아니라면 영화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까. 정혜를 이야기 하기 위해, 상처를 끌어안고 있는 정혜를 보여주기 위해 배치된 인물들은 정혜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느낌이 농후하다. 정혜, 김지수 조차 너무 이뻐서 조금 불만이다. 팔랑거리는 그녀의 속눈썹은 너무 예쁘다.

김지수의 담담한 연기는 좋다. 그런데 너무 예쁜 김지수는 내가 읽었던 소설 속 정혜와는 다르다. 얼마전에 인간극장에서 첫사랑과 결혼한 남자가 나왔다. 남자의 첫사랑 그녀는, 세살 연상, 아이 딸린 이혼녀였다. 남자가 그녀를 바라보는 애정이 듬뿍 담긴 시선은 얼마나 절절했는지 모른다. 그녀의 외모는 아주 평범하다. 예쁘지 않다. 그런데, 그녀는 남자의 시선을 받을 때 마다 남자의 시선에 아주 특별한 전파가 발산했던 것인지 내 눈에도 예뻐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그녀의 어딘가가 예쁠 것이라 생각되어 나는 그녀의 예쁜 구석을 찾았고, 자꾸 보다 보니 예쁜 것 같았다. 정혜의 이목구비 한 곳이라도 이쁘지 않았다면 좋았을텐데. 왠지 정혜의 상처가 상처로 보이는 게 아니라 어쩔수 없이 나날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호사스런 선택처럼 보이기도 했다. 고독을 즐기고 우울을 즐기고 싱글을 고집하는 정혜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대체 한숨을 몇 번이나 쉬었는지 모른다. 함께 영화를 본 친구가 말하기를, 영화를 보는 동안 자주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정혜가 고르는 참치 통조림, 정혜의 알람 시계, 정혜의 열쇠, 정혜의 화분, 정혜의 컵라면, 정혜의 총각 김치, 정혜의 맥주, 정혜의 낡은 블라우스, 정혜의 낡은 소파... 내 일상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장면들이다. 그래서 정혜가 자신에게 상처를 준 고모부와 나란히 앉아 고모부 몰래 가방에서 칼을 꺼내던 떨림은 걷잡을 수 없는 스타카토가 되고 만다. 담담하게 물건을 고르는 게 아니라 내 상처의 진범을 처단해야 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우리의 정혜는 영화적인 정혜다. 아름다운 속눈썹으로 아름다운 마음을 닦아낸 정혜였다. 차라리, 칼은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

애정만세의 메이 처럼 조금만 더 길게 울지... 수돗물을 잠갔어야 했다, 정혜. 나는 그녀의 울음 소리를 더 자세히 듣고 싶었다. 내 상처의 진범에겐 아무것도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손에 칼로 베인 자국만 남겼다.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면 상처가 치유될 수 있을까. 결국 흔해빠진 사랑이야기의 삶은 살지 않기를... 정혜야... 그래도 사랑은 좋은 추억이나 남기는거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겠지, 정혜야. 사랑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단다, 정.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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