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파란여우 > 낙엽




낙엽....길에는 아직 12월의 바람결따라 함께 떠나가지 못한 낙엽 몇 잎이 남아있다. 저것들이 남아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바보같은 생각을 문득 해본다. 헤르만 헷세는 가을이면 커다란 대빗자루를 꺼내 들고 낙엽을 쓸었다. 낙엽이 불길에 타는 그 케케한 연기 냄새를 맡으며 한 편의 시(詩)를 썼던 헷세. 그 양반은 아무래도 사색이 너무 깊다. 아무 생각없이 사는 내가 낙엽을 보며 잘가라 청춘이여 하고 짧게 한 마디 던지는 모습하고 대조적이다. 낙엽 길을 걷다가 뒤돌아보면 등산화에 밟혔던 낙엽들은 구겨졌던 몸을 슬며시 편다. 비가 오면 비에 젖고 햇볕이 빛나면 몸을 가벼이 말리어 바람이 불면 이리저리 뒹굴어 다니며 사는 것이 낙엽의 삶이리라. 그러다가 아름다운 꽃씨를 만나면 싹틔우고 잎 피우고 꽃피우는 데에 제 한 몸 다 썩혀 희생하고 마는 것이 낙엽의 최후라면 너무 속상하다.


낙엽에 사랑한다는 말을 적어 바람에 날리듯 보내는 글.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읽어주세요. 엽서를 보낼 사람도 없고 받아줄 사람도 없는데 나는 엽서를 쓴다. 낙엽을 보며 그 위에 볼펜으로 살포시 짤막한 격언 한 줄 적어 놓았던 내 17세의 늦가을엔 분명 나에게도 사랑하는 누구에겐가 낙엽위에 써내려간 사랑의 연서를 보냈으리라. 그리고 17세 소녀는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세월을 보내고 중년의 겨울을 맞이한다.


허공을 무심히 바라본다. 갑자기 조용필의 ‘허공’이란 노래가 생각난다. 삼십대 중반 내 모든 야망이 물거품이 되어 더 이상 꿈이 남아 있지 않다고 여기던 시절에 설거지를 하면서, 마당을 쓸면서, 마늘 껍질을 벗기면서도 흥얼거리며 불렀던 노래다. “꿈이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아쉬움 남아, 가슴 태우며 기다리기엔 너무나도 멀어진 그대, 사랑했던 마음도 미워했던 마음도 허공 속에 묻어야만 될 슬픈 옛이야기, 스쳐버린 그날들 잊어야할 그날들, 허공 속에 묻힐 그날들." 사랑도 명예도 꿈도 욕심도 모두다 허공 속에 묻어야만 하는 허허로운 나이로 접어든 탓일까. 석양의 노을처럼 쓸쓸한 세월의 덧없음을 노래한다. 낙엽을 밟으며 산등성이에서 혼자 외쳐 불러보는 노래. 순간 영화처럼 돌아가는 지난날의 추억들이 나의 머릿속을 후비고 다닌다.


낙엽이 수북히 내린 뒷 산길을 걸어 오르면서 그러나 나는 아직 청춘이라고 우긴다. 낙엽은 제 몸을 버리지만 내년 봄이 돌아오면 연초록의 새순으로 아름다운 환생을 거듭 날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낙엽은 사라지지 않는다. 잠시 휴식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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