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선인장 > 여자도 없고, 정혜도 없는-<여자, 정혜>



나는 가끔 생각한다. 내가 자라난 고향 읍사무소 직원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거기에서 눈빛이 고운 순경(경찰이 아니라 반드시 순경이어야 한다) 하나 만나, 함께 출근하고 함께 퇴근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5일마다 한번씩 열리는 장터를 구경 삼아 다니고, 칭얼거리는 아이를 업고 온 시골사람들의 잡일을 거들며, 아무런 기대도 없이, 아무런 변화도 없이, 가슴 떨림 같은 건 하나도 없이,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그러나 이건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나의 생각일 뿐. 나는 이런 삶을 살아낼 자신이 없고, 이런 삶을 추구할 이유도 없다. 어느 날 문득 그저 삶이 지루하다고 여겨질 때, 더욱 지루하고 더욱 단조로운 삶 속에 나를 던져두고, 그런 삶을 즐길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공상이 빠질 뿐이다.

여자, 정혜라... 처음 이 제목을 접했을 때, 나는 무슨 제목을 이렇게 선언적으로 지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참 폭력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단 네 글자의 제목에 등장인물을 규정하고, 영화의 내용을 규정하고, 관객들의 독법을 규정해 버리는 영화... 그래서 내용을 보지 않아도 충분히 어떤 내용인지, 그 영화를 보고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막상 본 영화는 그 내용 그대로 흘러갔고, 그 느낌을 그대로 강요하고 있었다.

# 여자는 없다

깨끗하고 단정한 자세로 앉아 식물들을 키우고, 길에 버려진 고양이를 데려와 하루하루 마음을 붙이고,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섬세하게 살아가고, 소녀시절에 겪었던 성폭력으로 세상과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고, 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타인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정혜의 일상을 보면서, 나는 "여자"의 삶이란 이렇게도 피상적으로만 그려지는구나, 생각했다. 소장을 제외하고는 여자들뿐인 우체국에서의 시간, 그저 불평뿐인 옆집 여자와의 관계, 그녀의 속내를 이해하지 못하는 고모의 투덜거림. 정혜의 일상이 아주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그려지면 그려질수록 나는 영화속 여자들의 관계가 못마땅했다. 정혜와 소통하는 유일한 사람인 엄마는 이미 죽은 사람. 더욱이 엄마란 존재는 여자가 아님을 우리는 그 동안 너무나 명확히 학습받아 오지 않았던가.

카메라가 정혜의 얼굴에 아주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이 영화는 여자로부터 멀어졌다. 그건 영화가 여자로서의정혜의 모습을 나쁜 의도로 왜곡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너무나 상투적인 장면으로만 정혜의 모습을 그리고 있어서다. 켜켜이 모인 일상들이 한 존재의 뚜렷한 성적 자의식을 만들어내지 못할 때, 영화는 지루해진다. 누군가의 삶을 바로 옆에서 바라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삶에 호기심이 일어나지 않을 때, 그 영화의 의미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그래서 <여자 정혜>는 그 선언적인 제목에도 불구하고 여성에 대한 이해가 보이지 않는다. 성적인 학대와 그 학대의 경험으로 인한 소외, 스스로 닫아버린 마음의 문과 세밀한 여성의 일상. 그 일상의 결들은 층층이 모여 새로운 의식으로 확장되지 못하고, 줄거리에 갇혀 지루하게 반복될 뿐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지루하고 도식적이다.

# 정혜는 없다

영화를 보고 종로길을 걸어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나는 함께 영화를 본 동료에게 물었다. 자기는 저렇게 살지 않아?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떤 평론가는 총각김치마저도 주문해 먹는 그녀의 일상이 특별하다고 말했지만, 이십대 후반을 넘기고 혼자 사는 여자라면 정혜의 일상이 전혀 새롭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아는 혼자 사는 여자들은 대부분 홈쇼핑이나 백화점 지하에서 밑반찬을 해결하고, 김밥이나 인스턴트 식품을 애용한다. 친구들 대부분은 시집을 가, 주말이라고 해도 특별히 할 일이 없다.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방보다는 거실에서 생활한다. 깨워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알람을 두 개쯤 켜놓는 건 예사다.

카메라가 아무리 정혜의 얼굴에 가까이 가도, 나는 정혜라는 인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가 간직하고 있는 트라우마는 소설에서 너무나 많이 보아왔던 설정이고, 그 트라우마를 간직한 그녀의 삶은 평범하고 평범하다. 평범한 삶을 가까이서 지켜볼 때 느껴지는 낯설음조차 없다. 그래서 나는 정혜를 알아갈 수 없었고, 정혜의 속깊은 울음을 보면서도 아무런 감정의 파장을 경험하지 못했다.

보편적 여성으로서의 삶도, 특별한 존재 정혜로서의 삶도, 명확하지 않은 이 영화. 그래서 나는 정혜의 분노에 동감하지 못하고,  황정민의 정혜씨,라는 마지막 대사에 조금도 설레지 않는다.

어떤 영화속 인물에게 너는 왜 이렇게 답답하냐고, 너는 왜 싸우지 못하느냐고 요구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러나 <여자 정혜>가 그 제목에 어울리는, 그러면서도 그 제목이 강요하고 있는 이해의 폭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조금 더 치밀하게 여자의 일상과 정혜의 자아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감당하지 못할 크나큰 상처를 안고도, 그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간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남들은 조금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일상과 자신과의 사이에 작은 균열이 생김을 감지한다. 카메라가 가까이 다가가야 할 것은 정혜의 얼굴이 아니라 정혜와 정혜의 일상 사이에 존재하는 그 작은 균열이다. 그 균열이 조금씩 조금씩 그 실체를 드러낼 때, 관객은 특별한 한 여자, 정혜의 삶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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