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선인장 > 가을에는 멜로영화가 딱이지-<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아닌 척 해도, 나는 말랑말랑하고 가슴 먹먹하게 하는 멜로영화를 좋아한다. 유치하고 내용 없고, 그저 울리려고 작정하고 만든 영화라 해도 상관없다. 지금껏 보아왔던 멜로영화는 대부분 나의 최소한의 기대치를 만족시켜주었으니까. 사랑에 대한 환상,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애틋하고 절절한 환상... 물론 그 환상이 나를 돌아보게 하고 내 사랑관을 반성하게 하고 나와 현실의 한계를 극복하게 하는 사유의 동기가 되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그런 게 아니라도 뭐, 나는 충분하다. 그냥 주인공들 따라 가슴 설레이고, 눈물 흘리고, 그리고 극장을 나오면 다시 무덤덤해지고, 그 과정이 충분히 재미있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는 가을에 딱 어울리는 멜로영화다. 내용은 아주 단순하고 줄거리라고 할 게 특별히 없지만, 잊으려고 했던 한 때와 조우하는 사쿠의 모습은 충분히 감동적이고, 백혈병이라는 상투적인 병에 걸려 죽어가는 아키의 모습은 너무나 예쁘다. 카세트 테이프를 매개로 그 사람이 엮어내는 풋풋한 사랑은, 자주색 교복에 질려버린 내가 꿈꾸었던 그런 사랑과 너무 닮아있어 매우 친근하게 느껴진다. 마음이 통하는 이성친구와, 백혈병, 하얀 원피스, 그리고 바다, 먼 곳을 향한 동경. 평범하고 상투적인 십대를 보낸 누구라도 꿈꾸었을 그런 사랑이 영화에서 펼쳐진다.

그러나 이 상투적인 사랑이 순간순간 빛난다. 어른이 된 사쿠가 아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짓는 표정(아키가 입원한다는 사실을 전할 때 어른인 사쿠는 마치 처음 듣는 듯, 아주 짧은 순간 놀라고 당황한다), 태풍 29호, 그들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울룰루, 첫사랑을 마음에 담아두고 살아가는 사진관 아저씨, 아키와 사쿠의 어색한 웨딩사진.

그들이 고등학생일 때, 사쿠는 아키가 없는 시간에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사쿠가 살아온 모든 시간에 아키가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 사쿠는 아키가 없는 시간을 살아낸다. 떠난 이에게 해야 할 일은 뒷정리라는 사실을 묵묵히 감당하며 자신의 시간을 살아낸다. 아마도 사쿠는 그 시간을 참 잘 살았나 보다. 어른이 된 사쿠를 연기하는 배우의 모습은 참 예뻤다. 참 잘 자랐구나, 하는 느낌. 철 없던 어린시절, 백혈병이라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병인지도 모르고, 그저 창백한 얼굴에 가녀린 모습만 동경했던 나는 사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너는 너의 시간을 잘 살았구나,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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