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moonnight > 내가 나빴던 게 아니다.

<열두 명의 연인과 그 옆 사람>
윤대녕의 책은 재미있다!
라는 명제와도 같은 평을 여러번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처음이었다. ('그녀에게 얘기해주고 싶은 것들'을 훨씬 이전에 주문했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찾을 수가 없다. 읽어야 할 책무덤속에서 울고 있는 것인지도-_- ) 그리고 다 읽은 후의 느낌은
역시 그렇군.
이었다. 그리고 난.
... 많이 울었다.
첫장을 넘기면서부터 손이 바빴다. 산문과 소설의 중간형태라는 작가후기를 읽고서야 이거 실화일까.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던 의심을 접고 끄덕일 수 있었다. 그렇다. 때로 현실은 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한 거고 소설은 삶보다 더 건조한 것이니까.
삶의 어느 순간에 등장해 함께 걸어가다 기억속으로 사라져간 사람들. 작가는 그들을 '버스 정류장에서 함께 버스에 올라탄 승객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 열 두명과 한 사람이 나누는 삶의 이야기들, 그들이 들은 음악들, 먹은 음식들, 취한 술들을 내 머리로, 가슴으로, 눈으로 함께 했다. 이제는 어쩌면 남은 생애 다시 못 만날지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추억, 그 애틋함이 녹아 있는 이야기들은 참 좋았다.
마지막 이야기, 매기의 추억에서 눈물은 터졌다.
미란. 그가 오래토록 사랑했던 누이. 말을 아끼고 오래 참고, 자신의 슬픔 같은 건 안으로만 삭였던 그녀가 찡하게 와닿았지만 나를 그토록 자극했던 건 매우 개인적인 이유였다.
'가난은 사춘기의 여자아이에게 치명적인 수치심을 안겨다준다.
아이가 옷장속에 남몰래 저축한 돈으로는 가난은 해결되지 않는다.
그토록 예민한 시기에 생이 누추하다는 것은 곧 불행이다.
가난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적어도 아이들의 일이 아니다.
또 그렇게 생각하도록 강요해서도 안된다.
그러한 부모는 적어도 자신이 아이들이 남 앞에서 떳떳하고 당당하게라도 만들어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극진한 보살핌과 관심이 필요하다. 설사 가난하더라도 아이의 기를 죽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일종의 죄악이다.
그것을 극복하는데 어쩌면 평생을 다 써도 부족할지 모를 기나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알고보면 그다지 강한 존재가 아니다.
어려서 받은 상처나 속박의 굴레는 죽을 때까지 벗어던지기 어려운 게 사람살이의 또다른 이면이다. '
나의 집은 가난했다. 찢어질정도로 가난해서 세끼 밥을 해결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니 포시랍기만한 불평이랄 수도 있겠지만 두살터울의 삼남매가 함께 나란히 학교에 다니기에 넉넉하지 못했다. 유교적, 가부장적인 분위기의 전형적인 경상도사람인 부모님께는 아들이 우선이었다. 중간에 박힌 딸이었던 난 중고교를 다니는 동안 수업료가 늦어서 수업시간에 호명되어 일어나야 하는 일이 너무 싫었었다. 엄마를 졸라 당시 유행했던 유명메이커 운동화를 사들고 들어온 오빠와 남동생. 다 떨어져서 안에 넣어둔 스폰지가 드러나보이는 내 싸구려 운동화를 외면하는 엄마. 난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다락방에 숨었었다. 1등한 성적표를 자랑스럽게 내밀었을 때도 엄마는 잘했구나. 그렇지만 오빠에겐 일등했다고 말하지 마라. 기죽는다. 라고 말씀하셨다. 상고에 진학한 친척 언니가 집에 왔을 때 내게 너도 여상 가서 일찍 돈벌면 좋겠다. 그러셨었다.
지금 부모님은 그런 일들을 기억하실까?
당연히 못하실거다. 내가 부모님께 잘못한 일들을 기억 못하듯.
그분들은 내게 상처주려고 그러셨던 게 아니니까.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남들보다 훨씬 더 부지런히, 더 열심히 사는데도 현실이란 녀석은 자꾸만 더 무거워지고 자꾸만 더 멀리 달아나기만 하니까 그럴 수밖에 없으셨던 거다. 그땐 그게 최선이었던 거다.
텔레비젼에서는, 선생님들은, 책에서는 한결같이 그랬다.
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단지 조금 불편한 것일 뿐이라고.
그랬기 때문에 가난해서 불행하다고 느꼈던 사춘기의 난 무척이나 죄책감을 느꼈었다. 생일파티를 하는 친구네 집에 가서 느꼈던 비참함이 잘못된 거라고, 우리집은 왜 이렇게 가난한 걸까. 원망했던 마음은 정말로 나쁜 거라고 생각했었다. 네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 돈 많이 벌어라. 딸 덕분에 우리도 호강 한 번 해 보자. 엄마의 그 중얼거림이 초등학생이었던 내게는 반드시 지켜야 할 약속이 되었다. 정작 엄마로서는 그저 가벼운 한탄 정도였을텐데..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난 아마도 평생 결혼않고 혼자 살 거 같다. 생각했던 건 그런 책임감이 이유의 일부일 것도 같다.
어제밤. 책속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울면서, 가슴속 무언가가 시원하게 씻겨내려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내가 나빴던 게 아니라고 누군가 말해주는 거 같았다. 고마운 줄 모르는 계집애라는, 어린애였던 내가 들어야 했던 야단이 언제까지고 내 전체의 모습을 대변하는 표현인 거 같아서 서른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움츠러들곤 했던 난 허리를 쭉 펼 수 있을 것만 같다.
한 권의 책이, 한 줄의 글이 누군가의 인생을 바꿔놓을 수 있다..
겉으로 별반 달라보이지 않는대도 나는 어제와는 다른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작가의, 글의 힘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