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호밀밭 > "거기, 당신인가요?"라고 물을 수 있는 건 당신이 있기 때문
거기, 당신?
윤성희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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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희의 소설이 옷이라면 몸에 꼭 맞는 옷은 아니다. 어쩌면 헐렁한, 어쩌면 잠옷과도 같은 소설이다. 땡땡이 무늬가 있거나 끝단에 레이스라도 있을 것 같은 잠옷이 아니라 그냥 몸에 들러붙지 않는 천으로 만든 평범한 색의 잠옷이다. 아니면 그냥 집에 오면 갈아입는 편안한 트레이닝복을 겸한 잠옷, 밥풀 몇 개가 붙어 있어도 무심하게 떼어 낼 수 있는 편안한 옷과도 같은 소설들이다. 잠옷은 피터팬이 살고 있는 네버랜드로 날아갈 때 웬디가 입고 있던 옷이기도 하다. 윤성희 소설 속에는 약간은 판타지적인 요소와 소녀적인 느낌, 또 내가 살고 있는 세상과 같지만 조금은 다른 느낌이 있다. 아마도 네버랜드로 가려던 웬디가 슬프지만 슬픔을 견딜 줄 아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마을에 들른 것 같은 느낌이다. 윤성희의 소설을 읽으며 마냥 편안했던 것은 아니지만 마음을 쉬게 하는 고요함이 있다. 다른 소설에서는 눈물 백 바가지를 쏟았을 만한 일들이 잔잔하게 흘러간다.

1. 미친 쫄면-유턴 지점에 보물을 묻다
사람들은 보물 지도와 삽 두 자루와 곡괭이 두 자루를 트럭에 싣고서 보물을 찾으러 갔다가 돌아온다. 이 소설은 슬플 때는 매운 음식을 먹으라고 가르쳐 준다. 슬퍼서 울었다고 하지 말고 매워서 울었다고 하는 게 더 낫다고 말한다. 보물을 찾으러 간 사람들은 모여서 만두와 쫄면을 판다. 쫄면은 네 가지로 구분된다. 안 매운 쫄면, 조금 매운 쫄면, 아주 매운 쫄면, 미친 쫄면. 슬픈 일이 생겨 눈물이 흐를 것 같으면 미친 쫄면을 먹어야겠다. 사람들은 매워서 운다고 생각할 것이다.

2. 삼립 호빵-어린이 암산왕
어린이 암산왕이 암산대회에서 탄 메달은 삼립 호빵만했다. 그 메달을 마루 한가운데 걸어 놓으니 집 안이 환해 보였다고 한다. 어쩌면 눈에 보이는 추억 하나만 있어도 세상을 거뜬히 살 것 같지만 사람은 현재를 사는 것이다. 겨울이면 말랑말랑한 호빵이 생각나지만 겨울이 지나가면 호빵은 기억에서 저만치 멀어져 버린다. 찬바람을 맞으면 꾸덕꾸덕해지는 호빵처럼 세월과 함께 메말라 버린 암산왕의 이야기는 메달 속 지워지지 않는 녹처럼 마음 속에 녹물이 되어 흐르지도 못하고 고여만 있다.

3. 아이스크림-누군가 문을 두드리다
자기 물건은 없는 방에 사는 고독한 남자는 텔레비전을 팔기 위해 '숨쉬는 물건들'이라는 중고품 가게를 찾아간다. 사연이 적힌 물건들이 가득한 가게 안에는 '기쁨의 세상', '믿거나 말거나 세상', '슬픔의 세상' '한숨의 세상'이 있다. 이를테면 '한숨의 세상'에는 고시에 관련된 책들이 많이 있다. 숨쉬는 물건들은 외로웠는지도 잊고 지낸 그의 가슴을 두드린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가 바라보던 구름이 아이스크림 모양으로 변해 그의 입 속에 떨어졌다. 차가워서 꿀꺽 삼킬 수는 없지만 혀끝으로 살살 녹여 먹으면 달콤한 아이스크림이 그의 가슴속에도 떨어진 걸까.

4. 음식 모형-거기, 당신?
곱창전골과 해물전골 사이에서 갈등하는 어머니, 점심 시간에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며 메뉴에 적혀 있는 스파게티의 종류를 모두 외운 그, 음식 모형을 만들면서 음식을 씹지도 않고 삼키는 그녀, 음식 모형을 놓고 회식을 하는 사람들. 가만히 바람이 부는 날 골목길을 서성이는 그와 그녀, 하지만 "거기, 당신인가요?"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을 수 있는 건 그래도 외로움을 알아볼 수 있는 당신이 있기 때문.

5. 밥맛 좋아지는 쌀-그 남자의 책 198쪽
저녁 10시에 잠이 들고 퇴근을 하면 오랫동안 샤워를 하는 그녀. 팔 년째 도서관에서 일하지만 자신은 책을 읽지 않는다는 그녀. 그녀의 일상은 늘 똑같지만 쌀의 품질이나 뜸들이기에 따라 달라지는 밥과도 같이 미세하게 하루하루 다른 맛을 낸다. 그녀는 여자 친구가 남긴 책 속의 메시지를 찾는 남자를 돕기도 하고 더 좋은 도서관을 만들 계획을 발표하기도 한다. 그녀는 밥맛 좋아지는 쌀을 사지는 못했지만 밥맛이 좋아져서 살이 자꾸 불어났다고 한다.

6. 설렁탕-길
새로 개장한 대형 쇼핑몰을 돌아다니던 '나'는 '혼자 쇼핑 온 사람들을 위한 밥집'에 들어간다. 벽이 거울로 되어 있고, 식탁은 거울을 바라보고 식사하게 배열되어 있다. 나는 네 시간 이상을 쇼핑한 사람에게 권하는 음식인 설렁탕을 먹는다. 맛없게 밥을 먹는 거울 속의 나를 보며 밥을 먹어야 하는 것이다. 옆에는 세 시간 이상 쇼핑한 사람에게 권하는 김치볶음밥을 먹는 여자가 있다. 그녀는 거울 속의 자신에게 밥을 먹이는 장난을 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거울 속 나를 위해 산다. 하지만 가끔은 왜 사는지를 잊을 때가 있다. 그럴 때 국물 따뜻한 음식을 먹으며 거울 속 나를 위로해 주면 어떨까.

7. 버섯 전골-봉자네 분식점
오랜만에 본 동창에게 맛있는 점심을 만들어주고 싶다고 말한 식당 여자는 양송이버섯, 느타리버섯, 팽이버섯 등 여덟 가지 버섯이 들어간 버섯 전골을 만들어 준다. 달콤한 라일락 향기가 나는 나뭇가지를 잘라서 라일락나무를 마구 내려치는 '그녀'와 외로우면 크리스마스에나 볼 수 있는 꼬마전구를 켜고 그것을 바라보는 '식당 여자'의 아픈 마음이 닮아 있다. 음식은 혼자 있을 때보다 같이 있을 때 빛이 난다. 달래를 넣어 무친 파래처럼, 마늘하고 붉은 고추를 넣어 끓인 조개탕처럼 음식도 오밀조밀 모여 있어야 맛이 나는 것이 아닐까.

8. 가짜 케이크-고독의 의무
아버지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은 어린 소년은 코미디 프로그램을 빠짐없이 보았다. 모든 코미디언들의 성대모사를 할 줄 알게 된 소년은 학교에서 언제나 오락부장을 했다. 만우절날 태어난 소년은 어른이 되어 '만우절이 생일인 사람들의 모임'에 가입한다. 모임이 있는 카페 벽에는 가짜 케이크가 그려져 있다. 불이 꺼지자 야광펜으로 그려진 가짜 케이크의 초들이 환하게 타오르는 따뜻한 모임이었다. 이 모임은 "정말이야?"라고 묻지 않는 모임이다. 같은 날 태어난 것만으로도 추억을 공유한 사람들, 생일에 집착하는 사람은 외롭거나 행복하거나 둘 중 하나라는데 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9. 우유-만년 소년
그가 키가 큰 이유는 우유를 많이 마신 덕분이었다. 우유곽에는 잃어버린 아이들의 얼굴이 그려져 있고, 그는 하루에 한 잔씩 우유를 마셨다. 하지만 우유곽 속에 그와 비슷한 아이는 없었다. 그를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어렸을 때 한 집에 살았던 동생이 방문하던 날 그는 어렸을 적 먹었던 분홍색 소시지를 사기 위해 택시를 타고 대형마트로 간다. 소시지는 어릴 때 먹던 그 맛이 아니었다. 나 아니면 소시지가 변한 것이다. 어렸을 때 외로웠던 소년은 커서도 외로운 어른이 되었다. 우유를 먹어도 더 이상은 키가 클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외로운 것은 아니다.

10. 초밥-잘 가, 또 보자
친구의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세상이 달라진 것은 없다. O는 회사를 그만둔 후 뭐든 먹어야 해!라며 주먹을 불끈 쥐고 걷는다. 칼국수와 초밥 사이를 갈등하다 초밥을 먹으러 들어간다. 다섯 접시를 비우고도 배가 부르지 않았지만 맛있는 초밥이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메뉴 앞에서 삶에 대한 애착을 느끼곤 한다. 다음에는 저것을 먹어야지라고 생각하는 사이에 어느새 인생의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친구가 죽어도, 회사를 그만두어도 배는 고프다. 배가 불러도 따뜻해지지 않는다면 친구들을 만난 후 헤어질 때 "잘 가, 또 보자."라고 말을 한다면 어떨까.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조용조용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처한 상황은 다른 소설 속 고독한 사람들과 다르지 않지만 고독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사뭇 다르다. 크게 절망하지 않고 담담할 뿐만 아니라 남을 위로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 속삭이는 언어는 간지럽거나 잘 안 들리거나 하지 않는다. 등에 귀를 대고 그의 몸 속의 말을 듣는 <거기, 당신?>의 그녀처럼 작가의 몸 속에서 나오는 말들을 어느새 이해하게 된 것이다. 간혹 떨리고 간혹 끊기기도 하지만 또렷하게 들리는 말, <거기, 당신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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