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호밀밭 > 하나와 앨리스

이와이 순지 감독, '순'이라는 글자 때문일까. 그는 순정 만화를 그리는 만화가 같다.
순수도 좋고, 순정도 좋고, 그리고 순지도 좋다.
내 취향이나 감성은 너무나 변덕스럽지만 가끔 뽀시시한 느낌의 소녀 취향의 감성이 좋을 때가 있다.
레이스 달린 치마는 물론이고, 치마도 없는 내가 소녀 취향의 감성이 있다는 건 신기하지만 생각해 보면 소녀 취향은 레이스 달린 치마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누구나 예쁘고 햇살 환하게 내리고 꽃 날리는 영상을 거부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사실 공포 영화를 좋아하고,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 현장이 나오는 영화를 좋아하지만 한편으로는 눈 속을 뛰어가 오겡끼 데스까를 외치는 감수성도 좋아한다.
하나와 앨리스
두 주인공 이름이 일본과 어울리지 않아 놀랐다. 하나는 우리 나라 이름이고, 앨리스는 서양 이름인데 싶어서 의문이 들었다. 왜 이 아이들은 하나꼬나 구미꼬가 아니지?
단짝 친구인 두 아이들의 다정한 모습을 보여 준 초반 5분은 꽤 예쁘다. 하나도 예쁘지만 앨리스는 맑고 투명한 느낌이라 더욱 예쁘다.
이 영화의 소재는 사랑, 우정, 성장, 가족 등등을 섞은 듯하다. 사랑이 가장 큰 소재일 수 있겠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하나는 오래전부터 좋아하던 선배를 뒤따라가다가 그 선배가 문에 부딪치는 순간을 지켜본다. 그리고 깨어난 선배에게 선배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고백했었는데 기억하지 못하냐고 묻는다. 그리고 그 남자 아이는 하나의 거짓말을 믿게 되고 자신이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생각한다. 만화 속의 한 장면 같지만 이 거짓말이 통해야 다음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리고 하나의 거짓말이 들킬 위기에 처하자 하나는 앨리스는 선배의 옛날 여자 친구라며 거짓말을 보탠다.
남자 아이는 졸지에 옛날 여자 친구와 현재의 여자 친구가 생긴 것이다. 그가 아주 잠깐 문에 부딪쳤던 순간에 그 모든 기억을 잃었다고 믿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하나가 아니라 앨리스를 향한다.
뭐 이런 사랑 이야기도 나름대로 짜릿하고 귀여운 느낌은 있지만 영화는 사랑 이야기보다는 앨리스의 표정이나 동작을 섬세하게 보여 준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하나와 앨리스가 아니라 앨리스다. 발 디딜 틈도 없이 어질러진 앨리스의 집에서도 그녀는 말끔해 보이고, 케이크를 가득 입에 물었을 때에도 뾰로통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앨리스 외에 또다른 주인공을 꼽으라면 햇살을 꼽겠다. 햇살은 앨리스의 뒤를 계속 따라다닌다. 그녀가 걸을 때도 카페에 앉아 있을 때에도 발레를 할 때도 언제나 따라다녀서 화면을 환하게 해 준다. 이 아이는 꼭 햇살 나라의 앨리스 같다.
<러브 레터>도 그렇고 <4월 이야기>도 그렇고 이 영화도 그렇고 참 예쁘다. 눈 내리고, 벚꽃이 휘날리고, 햇살이 따라다니는 영상이 흔한 듯해도 그리 흔하지는 않다. 풋풋한 첫사랑의 감정을 수줍게 잘 끄집어 낸 이야기들이라 어찌 보면 나에게는 판타지 무비같다.
그러고 보니 너무 어린 감수성이다. 여리기도 하고, 아직 이런 감수성을 이해 못할 나이가 아니라는 점은 다행이지만 이와이 순지가 어려지고 있다는 건 좋은 징조는 아니다. <러브 레터>를 보았을 때 그가 나와 함께 나이를 먹어 가길 바랐었는데 그는 회춘하고 있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나는 1년에 2살은 먹는 것 같다. 작가들도 감독들도 나를 배반하고 자꾸만 어려지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이제 더 이상 내가 좋아하는 모카 케이크 같이 묵직한 느낌의 케이크를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치즈 케이크나 무스 케이크나 그런 케이크가 요즘 감성에 맞나 보다.
너무 부드럽기만 해서 먹고 나면 살이 찔 것 같은 치즈 케이크 같은 영화지만 먹는 순간의 달콤함이 매력적이다. 하지만 뭔가 더 얹어 있기를 바라는 마음, 그래서 나는 아직도 고전적인 뭔가 잔뜩 얹어진 케이크를 좋아하나 보다.
하나와 앨리스, 영화가 좀 길었지만 그런대로 좋았다. 앨리스가 예쁘고, 남자 주인공 이름은 생각 안 나지만 앨리스가 마크라고 불렀던 그 아이도 괜찮다. 꽃미남은 사회에 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하나도 나쁘지 않다. 이 영화에는 히로스에 료코와 다른 남자 배우도 카메오로 나온다. 아톰도 잠시 등장해 주어서 반가웠다.
예쁜 케이크 같은 영화, 착하고 예쁘게 살라는 이야기인 듯하다. 완벽한 순정 영화. 서랍 속에 간직하고 있다가 꺼내 보면 좋을 것 같은 영화, 예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