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에게는 감각만 있는 줄 알았다. 하루키는 노르웨이의 숲에서 보여줬던 그것이 전부인 줄 알았다. 창작하는 사람은 나이를 먹는 것이, 무심히 세월을 흘려보내는 일만은 아니란 걸 여지없이 보여준 단편집이다. 하루키의 따뜻한 시선에, 정밀한 파인더로 살펴본 인생의 심연에 반해버렸다. 인생은 일장춘몽으로 끝나는 공산품이 결코 아니란 걸 하루키에게서 배웠다. 렉싱턴의 유령에서는 살아있는 자의 슬픔이 아니라 죽은 자들의 파티로 살아있는 자에게 기쁨을 안겨준다. 내가 눈을 감으면 우주의 문이 닫힌다는 말에 반기를 든 것 같은 이야기다.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조차 생의 환타지가 아닐까 싶다. 하루키의 상상력은 환타지를 자유롭게 넘나들지만 그것이 감각적으로 빛났던 것에서 벗어나 생에 대한 심연이 깊은 울림으로 배어나고 있다. 얼음사나이와 결혼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일까? 그러나 역시 하루키 답게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얼음사나이가 인간과 결혼했다는 것으로 마무리하면서 하루키는 그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고 말한다. 거울에 시계를 비춘다고 해서 시계의 본질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시간을 볼 때 좀 더듬거릴 것이다. 그러나 익숙해지면 곧 능숙하게 거울속에 비친 시계로 시간을 볼 것이다. 인생을 가끔 거꾸로 보는 지혜를 가질 필요가 있다. 토니 다키타니의 아내가 남긴 옷은 과거가 되버렸다. 과거를 남긴다는 것. 그리고 과거를 한참 동안 바라본다는 것. 과거를 누군가에게 주고 싶었으나 결국 그것은 무모한 짓이라는 것. 인간이 인간에게 남긴 흔적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떠오르게 마련이다. 그것을 지우려면 또 어떤 의식을 치뤄야 한다. 물건으로 남겨진 사람의 흔적은 지울 수 있지만 그 사람을 지우려면 또 어떤 의식을 치뤄야 한다는 뫼비우스의 띠같은 삶을 정의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유머일지도 모르겠다.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는 하루키의 서문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전에 써놓은 중편을 10년만에 손질한 것이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하루키의 단편집 화요일의 여자들 목차를 보니 과연 그 소설이 있었다. 두개의 소설을 비교하면서 읽었는데 하루키가 소설을 퇴고하는 방법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소설을 잘 쓰기도 해야겠지만 잘 고치는 것도 소설가에게 필수 덕목이 아닐까 싶다. 하루키의 단편은 한 번 읽고 덮어둘 만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가끔 꺼내볼 만큼 가볍지도 않다. 나는 하루키의 단편을 순서대로 읽으면서 단편 한 개를 읽고 난 후 오렌지 쥬스를 마시거나 물을 마시며 곱씹어보곤 했다. 명확하게 말할 수 없는 내 인생의 깊이가, 어휘가 가벼워짐을 확인해야 했지만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리고 더 많이 자세히 알기 위해 다시 한번 책을 펼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