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마냐 > 다를게 없는 결혼, 일상.
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신혼때 나의 연적은 라라였다.
그때는 안방 침대 발치에 컴퓨터가 있었다. 대체 이 남자가 마눌을 버려둔채, 라라하고만 놀다니! 사실 그녀는 진정 쭉빵 미인인데다 매번 신음소리도 근사했다. 라라 크로포드. 도저히 경쟁이 안되자 나도 '툼레이더'를 시작했다. 근데, 게임의 달인인 옆지기와 달리 나는 아무래도 소질이 없었다. 당연히 시들해졌다.

부부가 함께 모든 걸 할 수 있으면 과연 좋을까. 일단 신혼때 진작 알아봤지만 내 경우, 게임조차 '타인의 취향'일 뿐. 지금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게임은 윈도XP에 딸린 스파이더. 최첨단 게임을 좋아하는 옆지기 눈엔 어이없다는 게임이다.

이른바 '오디오 파일'인 옆지기는 나와 음악 함께 듣는게 꿈이라는데, 나는 결혼 이후 늘 오디오 시스템 업그레이드를 놓고 눈에 쌍심지만 키웠다. 음악을 제대로 즐길리 없었다. 오히려 음악에 질렸달까. (내가 음악에 다시 젖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한밤중 웹질엔 음악이 고마운 벗이지..) 반면 옆지기는 책과 거리가 좀 있다. 한마디로 우리는 함께 나눌 것이 매우 부족한 부부인 셈이다.

그게 때로는 불만이고, 때로는 아쉽기도 했다. 물론 때로는 그저 편하기도 했다. 나 책 읽는거 방해 않고 자기는 음악 뽐뿌하고 있으니...^^;;;

하지만 '냉정과 열정 사이'의 에쿠니 가오리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도 우리는 같은 장소에서 전혀 다른 풍경을 보고 있다. 생각해 보면 다른 풍경이기에 멋진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만났을 때, 서로가 지니고 있는 다른 풍경에 끌리는 것이다. 그때까지 혼자서 쌓아올린 풍경에."

이 얇은 책에서 내가 기꺼이 낚아올린 표현은 바로 저거다. 책은 에쿠니 가오리가 신혼 무렵에 여성지에 연재하던 '결혼에 대한 에세이'들이다. '냉정과...'가 당시 메마른 나에게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지만 그녀의 글을 다시 만난건 이게 처음이다.

그저 짝을 찾아 구구거리는 연애가 아니라, 함께 살을 부대끼며 살아가는 결혼. 그녀의 감상 어딘가에는 낯익은 풍경들이 있을법하다.

"비 구경하자니까...남편은 읽고 있는 신문이나 잡지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 응, 아니, 어어, 하고 무심한 대답만 한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에게 익숙해졌다. 우리는 서로에게 다가서는 일이 좀처럼 없기에, 같은 방에 있으면서도 각자 다른 일을 한다. 서로의 생활 패턴을 속으로는 우습게 여기면서 겉으로는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라며 간섭하지 않는다...."

"때로, 외간 여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외간 여자란 요컨대 아내가 아닌 여자."

"월요일 아침, 나는 회사로 가는 남편이 싫어서 그만 입이 부루퉁해진다. 어서 다음 주말이 오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하면서 현관에다 구두를 내 놓는다. 그리고 남편을 배웅하고 난 순간, 나 자신도 놀라울 만큼의 안도감의 물결이 밀려온다..."

그저 담담하게 또박또박 쓴 에세이다. 그녀의 쿨한 분위기도 강하다. 사랑, 결혼, 남자에 대한 그녀의 고백들은 도발적이었다가 나른했다가 그냥 그렇게 자유롭게 흘러간다. 하지만...감동은 기대보다 적다.

"등뒤에서 껴안으면 남편은 귀찮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린다. 외로움만이 늘 신선하다."...

이런 표현에 한번씩 숨죽였다가...가만 생각해보니, 요즘은 이 정도 쓰는 글쟁이들은 많다 싶기도 하다. 또, 나도 솜씨가 없다 뿐이지 결혼이라는 재료는 엄청 많은 에피소드와 감상들을 제공해주는 덕분에 할 말은 많지 않은가. 웹질하다가 외로워진 한밤중, 코고는 옆지기에게 괜히 고양이처럼 찰싹 붙기도 하고...그냥 등돌려 조용히 눕기도 하고...결혼생활은 여전히 변덕과 한숨, 무관심과 사소한 웃음, 따뜻한 이불속..같은 거.

휘리릭 읽어치울 얇은 책...관심있는 분들은 온라인에서 그냥 사지 말구...서점에서 한번 들춰보고 그 감성과 코드가 맞는지 먼저 확인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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