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만화를 한 권으로 요약하다
[오마이뉴스 2004-11-06 17:56]
[오마이뉴스 김대홍 기자]
 
ⓒ2004 yes24
어떤 왕이 있었다. 그는 신하들에게 세상에서 성공할 비결을 책으로 엮으라고 명했다. 몇 년이 걸려 그들은 여러 권으로 된 책을 만들었다. 왕은 책 한 권으로 줄이라고 지시를 한다. 책 한 권이 되자 다시 한마디로 요약하라고 명령한다. 그 한마디는 '세상에 공짜는 없다'라는 말이었다.

한 해 20억 권 이상의 만화를 찍어내고, 한 번에 수백만 권이 발행되는 만화잡지가 있는 나라. 개인 납세자 순위 10위 권 안에 드는 만화가가 존재하는 나라인 일본의 만화를 책 한 권으로 요약하는 게 가능할까. 미야자키 하야오나 데츠카 오사무만 파 내려가도 엄청날 터인데 말이다.

그 무리할 것 같은 일을 '이명석의 유쾌한 일본만화 편력기(홍 디자인 刊)'에서 엿볼 수 있다. 일본 만화를 장르와 주제별로 나눈 뒤 이중 50편을 뽑았다. 죽기 전에 꼭 보아야 할 만화라고 게 저자의 설명이다.

이명석은 95년 서평지 '파피루스'에 '세계만화여행'을 연재하면서 만화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후 월간 '이매진' 기자로 활동하면서 국내외 만화에 대한 다양한 기획기사들을 집필했고, 특집기사 '이것이 일본만화다' 등 일본 만화계의 현장을 취재했다.

이 책에는 70년대에 인기를 끌었던 만화부터 근래에 유행하는 만화까지 다양하게 수록돼 있다. 이가라시 유미코·미즈키 교코의 '캔디 캔디', 히로카네 켄시의 '시마과장', 후지코 F.후지오의 '도라에몽', 이가라시 미키오의 '보노보노', 후루야 미노루 '이나중 탁구부', 치바 데츠야·다카모리 아사오의 '내일의 조',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슬램 덩크', 마츠모토 레이지의 '은하철도 999' 등 저자의 다양한 만화목록은 입을 쩍 벌어지게 만든다.

초등학생들의 우상이었던 '도라에몽(한국에서 '동짜몽')에서부터 성인만화인 '시마과장',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슬램 덩크' '성역'에서부터 여성 독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베르사이유의 장미' '캔디 캔디', 엽기적인 '파레포리' '철근 콘크리트'와 철학서에 가까운 '붓다' 등 그의 독서는 잡식이다. 흔히 장르별로 묶여져 나오는 일본 만화 평론집에 비쳐보면 이 책의 장점이 잘 드러난다.

그는 각각의 만화를 다루면서 각 만화에 걸맞는 잣대를 들이대고 장점을 뽑아낸다.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논하면서 주인공들이 너무 아름답다는 것이 객관적인 역사인식을 가로막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고 지적하지만, 간간이 선보이는 명료한 그림자의 대비 효과 역시 흑백 만화의 장점을 훌륭히 살리고 있다며 장점을 집어낸다.

크라잉 프리맨의 작가 이케가미 료이치가 그린 '성역'을 논하면서도 '그의 작품에서 남성 우월주의의 징조를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어설픈 개그로 독자를 희롱하는 따위는 하지 않는, 비정한 극화계의 왕자로 군림할 만한 매력은 지난 남자'라며 손을 들어준다.

그가 넓디 넓은 만화의 숲을 헤친 유능한 심마니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산삼을 캐기 위해 산을 헤매면서도 그의 망태기에는 산삼외에도 칡, 도라지, 무, 약초 등도 담겨 있다. 나름대로의 맛과 약효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손을 대는 순간 모든 풀이 산삼이 돼 버린다.

'여행한 사람이 모두 이야기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행의 체험을 메타포로 승화시키는 사람만이 이야기꾼이 된다. 이명석은 마니아이자 이야기꾼'이라고 평가한 미술평론가 성완경의 말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이명석의 유쾌한 일본만화 편력기'는 방대한 일본만화의 세계를 한 눈에 엿보는 것도 장점이지만 저자의 맛깔스런 버무림도 매력적이다. '꼬마 마루꼬짱'을 '그것은 마치 집에서 얼렁뚱땅 차린 국수 위에 시골 할머니가 만들어 주신 양념장 한 방울을 떨어뜨리는 것처럼 맛깔스럽다'라고 평가한다든지, 문학에 행간(between the lines)이라는 것이 있다면, 만화에는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between the frames), 그곳에 오묘한 비밀의 공간이 있다라며 '천재 유교수의 생활'을 묘사한 것 등은 글읽는 재미를 담뿍 선사한다.

독자들에게 일본만화 역사를 보기 쉽게 전달하려는 세심함은 책 후반부에도 나타난다. 현대 일본 만화의 연대기가 별도로 수록돼 당시 시대상황과 그 시대에 인기를 끌었던 주요작품이 기록돼 있다. 2차대전 종료뒤 50년대 초반까지는 확실히 데츠카 오사무의 시대다. '유령남' '신보물섬' '메트로폴리스' '정글대제' '철완아톰' '리본의 기사' 등이 주요작품에 이름이 올라 있다.

56년에는 요코하마 미스테루의 '철인 28'호가 나와 로봇만화의 시대를 열었고, 64년에는 이시모리 쇼타로의 '사이보그 009'가 등장해 기계인간에 대한 상상력을 제공하기 시작한다. 67년에는 소년지 1백만부 시대에 돌입했고, 78년에는 '소년 챔피언'이 2백만 부를 돌파했다. 89년에는 천황이 사망했고, 95년에는 옴 진리교 사건이 터진다. '만화 편력가들을 위한 방정식'도 부록에 실려 있다. '일상생활' '로맨스 코미디' '중세일본' '세기말과 재난' 등 14개 주제로 작품이 분류돼 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마음이 푸근해지는 느낌이 들 것이다. 저자가 진정으로 행복한 기분으로 글을 써내려갔기 때문이다.

"길지 않은 인생, 보다 좋은 만화를 보며 살고 싶고, 보다 좋은 만화도 만들어 보고 싶다. 다만 지금은 일본 만화의 방대한 바다에서 수많은 쓰레기들을 젖히고 아름다운 보석을 건져올리고 있는 나 자신이 행복하다. 이 보석을 바라볼 사람들 중 누군가가 이 모든 것보다 뛰어난 한국 만화를 그려준다면 더욱 기쁠 것이다."

/김대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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