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우리반 아이들 중에 아주 특별한 아이가 있었다. 서른 다섯의 아이들 모두 하나같이 특별했지만(초임이었으니까) 그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아이는 '영호'라는 이름을 가진 특수아였다. 자폐라고 하기에는 너무 뭣하고 학습부진아라하기에는 기초적인 학습능력이 전혀 없었다. 영호는 학교에 와서 그냥 자리에 앉아서 혼자 킬킬거리면서 만화책을 보다가 점심 먹고 오후에는 늘어지게 자는게 전부였다. 5학년이라기엔 너무 작은 몸집과 어눌한 말투, 엉망진창인 글씨와 가끔 보이는 폭력적인 행동까지. 사실 처음엔 정말 골칫덩어리였다. 안그래도 초임 발령인데다가 정말 엉망인 반을 맡았고(이건 사실이다!) 게다가 영호까지 코앞에 앉아있으니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영호때문에 몇 번 울기도 했다.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나는 아이들이 영호를 이해하고 보호해주길 바랬지만 아이들은 그냥 아이들일뿐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봄이 지나고 서서히 내가 학교 생활에 적응되어 갈때쯤 영호에게 다른 방법을 쓰기로 했다. 아침에 오면 인사하는 법부터 가르치고 이것저것 말을 붙여보았다. "밥은 먹었니, 어제 집에서 뭐하고 놀았니, 지금 보는 책은 어떤 내용이니" 등등.. 여러 가지 질문을 하면서 알게 된 점인데 그 아이가 그리는 그림 하나하나에도 다 독특한 의미가 있었고 곤충이나 식물에는 엄청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때론 나보다 더 많이 알 정도로.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영호의 엄마는 젊은 나이에 정신이 이상해져서 집을 나가버렸고 살림은 할머니가 맡아하고 있었으며 영호 집 삼남매가 모두 비슷비슷한 상태였다.(영호는 엄마 이야기를 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아무튼 그렇게 내가 마음을 비우고 편안하게 영호를 대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아이들도 영호와 잘 지낼 수 있었다. 내가 챙기니까 아이들이 먼저 영호를 챙겼고 다른 아이들이 잘못할 때 똑같이 야단쳤으므로 영호가 특별한 대접을 받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왜 그렇게 주인공 동구와 영호가 겹쳐서 그려졌는지 모르겠다. 동구가 억압적인 집안 분위기 때문에 열살이 넘도록 글씨를 읽지 못할 때는, 만화책을 읽을때조차 더듬거리던 영호가 생각났다. 또 할머니에게 구박받고 냉정한 아버지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땐 왠지 영호도 집에서 그럴 것 같은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결국 동구가 모든 성장통을 딛고 아름다운 정원에 앉아있을 땐 언젠가 영호도 그렇게 마음의 고통을 털어버리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커버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기도 했다. 이것도 나의 직업병이라 할 수 있을까? 천사같은 박영은 선생님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모습을 비춰보았고, 그동안의 나의 나태함과 소홀함이, 아이들에게 미안해졌다. 나는 과연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님이 되고 있는 것일까?
오랫만에 소설다운 소설을 만났다. 작가의 행간을 따라 때론 웃고 때론 울며 , 동구를 떠올리고 영호를 떠올렸다. 그리고 이제는 오래 전 앨범 속의 빛바랜 사진으로만 남아있던 나의 유년시절을 돌아볼 수 있어서, 좋기도 했고 아프기도 했다. 기억이란 윤색되기 마련이지만 왜 유독 유년 시절의 기억은 좋은 기억보다 아픈 기억이 많이 남아있는 것일까.
훌쩍 자란 동구가 <나.....의 아름다운 정... 원>에 앉아 모든 기억을 털어버리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가슴이 태양빛인 새를 가만히 바라보는 장면을 상상한다.
<나...........의 아픈 유년 시.........절> 을 딛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