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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인을 기다리며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4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평점 :
이 소설은 노벨수상자의 작품답게 다소 무거운 내용이지만 우리사회가 외면하기쉬운 주제를 섬세하게 다루었다.
약자에 대한 노예화와 억압은 툭하면 지구상에서 아침의 뉴스를 장식하는 흔한 주제다.빈곤과 가난 생존이 절박한 이들에게 아직까지 유엔이나 자유주의가 그들을 수호하기위해 당연히 공식적으로는 비난하고 돕고자한다는 이념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이 소설은 말하고 있다.
비록 소설이지만 현재도 isis같은 인간들이 공존하는 지구상의 현실에서 지금도 일어나는 일이기도하다.지금도 인종차별과 폭력의 사슬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특히 아프리카와 남미처럼 남아프리카공화국같이 인종차별문제는 백인 우월주의자들과 토착민들간의 뿌리깊은 차별역사에 힘입어 문제되고 있다. 작자가 노벨상을 수상한만큼 오래된 이념의 논쟁에서 이 주제는 심심하면 매스컴의 논란의 와중에 있다. 수백년전 노예로 자신들의 국토에서조차 흑인들은 생존하기힘든 지경에 내몰렸지만 우리나라도 일제의 만행에서 식민지국민들은 인권이나 인간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했다.아무리 세대가 변하고 사회가 바뀌어도 가난과 경멸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이 소설은 유사한 배경을 무대로 그속에서 생존을 위해 갈등이 존재하고 열등자로 취급받기 쉬운 경직된 사회의 상태에서 식민지인들의 삶을 깊숙이 파고들어 그들의 삶을 조명한 소설이라고 생각된다.
소설의 무대는 물론 허구이다.그러나 남아프리카의 사회상이나 어쩌면 지나간 역사의 제국주의가 광란했던 19세기의 식민지상태를 보는 것같다.
주인공은 제국의 판사로 엘리트계층이었이나 피지배층의 여인과 엵이는 바람에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잃는다.
등장하는 주인공과 토착여인의 비극을 통해 주목하는 것은 인종차별을 드러내면서도 혼란된 자아와 독단적인 국가권력과 사회엘리트들의 배타성과 국가안전을 위한 폭력에 희생되는 인간상들이다 .
제국의 엘리트로 태어난 주인공은 타고난 환경덕분에 출세가도를 달리며 부러울 것없는 상류층으로 살지만 제국을 위해 치안판사로 일하며 본의아니게 식민지피지배층을 억압하게 된다.처음엔 관심없다가 한 여인때문에 불평등에 눈을 뜨게된다.그전까지 주인공은 아집과 자부심에 찬 자존심강한 판사였다.피지배층의 고통을 외면하며 제국에 충성하며 자신의 성취욕을 위해 살지만 그전에는 몰랐던 것을 깨닫는다.지금껏 같은 인간이 다른 정의를 표방하는 삶의 방식이 두가지 종족과 두 다른 세계의 이질감이 존재했다. 서서히 주인공은 폭력과 억압의 이중의 탈을 쓴 제국의 위선을 깨닫는다.처음엔 잔잔한 충격이 양심이 가책이 되었을까?아니면 톨스토이의 부활에서처럼 자신의 자아가 정의를 호소하는 걸 깨닫고 본래의 선량한 자신으로 돌아가길 원했던걸까?그때문에 소설의 내용은 정의로 포장된 재판사건에서 두 종족사이에서 갈등하며 여인이 당한 부당함에 화자의 분노를 표출시켜 말한다.
주인공은 문제점이 자신이 내면이 어떤 상태인지부터 몰랐던 것같다.드디어 주인공은 자신이 감옥까지 가게되자 제국주의에 기반한 사회에대한 분노를 깨닫기 시작한다.
주인공의 자각은 그냥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고문으로 눈이 먼 여인에 대한 동정과 호기심에서 시작되어 육체적 정을 느끼기까지 작자는 그런 비극이나 불합리를 강조하기보다 자신의 자의식이 발달하는 데에 무게를 두는 것같다.
감옥에 가서야 자신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자유를 철저히 유린당했다는걸 깨닫는다.
-그러나 나는 지금 자유라는 게 얼마나 기본적인 것인지 이해하기 시작한다. 나에게 어떤 자유가 남았는가? 먹거나 배고플 자유, 침묵을 지키거나 혼자 지껄일 자유, 혹은 문을 두드리거나 비명을 지를 자유이리라. 그들이 나를 여기에 감금했을 때 내가 불의, 경미한 불의의 대상이었다면, 지금의 나는 피와 뼈와 고기가 뭉쳐진 불행한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그가 느꼈을 절망과 분노가 상상이 가는가?
차별과 사회적통념때문에 사회약자에 대한 보호해야하는 책임을 사회와 도덕은 해내는가?당연히 사회는 외면한다.식민지인들이 제국의 엘리트인들보다 여건이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배층들이 자신들만의 벽을 쌓고 타인종을 받아들이지않는 기존의 통념에 적응되었기 때문이기도하다.물론 미국이나 세계의 여러나라들도 선진국일수록 기존 상위계급이 자신들만의 벽을 높이 쌓고 타인들을 받아들이는 데 배타성이 있는 건 사실이다.그러나 최소한인간은 법앞에서 평등해야한다.아마 일제시대 조선인 엘리트인들중에서 이와 비슷한 고민을 해야하는 이들이 상당수 있었을 것이다.눈만 한쪽 감으면 자신의 출세가 보장되는 데도 지성인으로서의 양심은 역사와 민족앞에 반역자가 되지말라는 호소로 방황하는 이들이 있었다. 경성제대 법학과를 나와 조선총독부에 입사했다가 한달만에 그만두고 자연주의 문학으로 전향한 이효석처럼 상당수 그시대의 문인들이나 작가들이 그런 배경을 지녔다.
주인공은 인권이 박탈된 채 감옥에서 고문과 학대받는 경험을 통해 자유와 평등을 표방하며 제국주의의 만행과 사회의 이중성을 드러내며 관용과 사회정의를 호소하고 있다.
제국의 최고위층처럼 사고하길 원했던 주인공은 식민주의를 시행하는 제국의 위선에 약자들의 고통과 갈등에 눈을 뜨고 인종차별의 야만성과 부당성에 다시 생각하게된다.
결국 주인공은 생을 마무리하며 아주 소박한 행복을 원하게 된다.
---이제 내가 원하는 건 낯익은 곳에서 편안하게 살다가 내 침대에서 죽어, 옛친구들의 조문을 받으며 무덤으로 가는 것뿐이리라.---
이 책을 읽으며 평등과 자유민주주의가 저절로 이루어져 실행되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든다 .자신이 어려움이나 치욕을 당해봐야 남의 고통을 공감하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인가보다.제국주의의 원조는 자신들의 민족이 남의 민족보다 잘나고 월등하다는 데 있었다.그때문에 잘난 자신들이 타종족이나 다른 나라의 지배가 합리화 될 수있었다.월등한 우리가 너희를 지배하는 건 진리라고..
읽는 내내 조지오웰의 '1984년'같은 줄거리와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다.현재도 공산주의나 전제주의같은 나라에서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중국의 공안통치나 아프리카의 짐바브웨,북한의 신권에 가까운 독재정치도 무시할 수없다.독재자하나때문에 그의 권력을 유지하기위해 인권이 박탈되고 온 국민이 노예상태로 사는 건 역사에도 비일비재하다.그런데 현대에도 그런 상황이 되풀이 된다는 건 정말 아이러니이다.
결국 제국주의가 식민통치와 폭력,개인의 자유와 인간의 존엄의 말살로 귀결된다란 건 정해진 수순이다.현재도 외세는 모두 제국주의라고 식민통치철폐를 외치며 정작 자신들은 일부 집단과 개인을 위해 독재를 하는 국가들이 있다.당장 북한만 보아도 그렇다.그들의 체제는 정말 모순적인 정치집단이다.인종차별과 투쟁이 심했던 남아프리카의 사회를 모델로 작자는 무엇을 호소하는가?타인의 인격을 존중하고 그의 자유를 포용하지않는다면 그러나 약자의 보호와 함께 정의를 실현하지않는다면 자유민주주의의 장래가 원만하지 못할 것이란 걸 그리고 인류의 미래도 어둡다는 걸 작자는 암시하고 있는 것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