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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 ㅣ 리라이팅 클래식 7
진은영 지음 / 그린비 / 2004년 10월
평점 :
그린비의 리라이팅 클래식은 국내에선 최고의 입문서, 개론서, 해설서 시리즈라고 생각한다. 최근 1년 7개월 만에 [세계와 역사의 몽타주, 벤야민의 아케드 프로젝트]가 발간되면서 2003년 이후 9번째 시리즈가 탄생했다. 그린비의 다른 시리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딘 행보라는 생각이 든다. 최근 트랜스 소시올-로지 총서라든가 크리티컬 컬렉션 등 현 시대를 반영하는 좀 더 정세적인 텍스트들을 출간하는 데에 그린비가 경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찌됐든 리라이팅 클래식 시리즈는 초급독자에게 가장 안심하고 권할 수 있는 믿을 만한 책이라는 점에서 분명 한국 독자들에게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 역시 국내 칸트 철학 입문서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문체나 구성이 균형 잡혀 있으며, 너무 큰 욕심을 부리지도 않았고, 너무 많은 걸 포기하지도 않았다.
이 책은 칸트 철학에 대한 개괄적인 입문서가 아니라 [순수이성비판]의 해설서이다. 따라서 책 전체의 구성은 칸트의 인식론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 책의 핵심은 '2부 [순수이성비판]에 대한 짧은 고찰'이다. 그리고 가장 뛰어난 부분도 바로 이 2부다. 순수이성비판의 내용을 알기 쉽게 풀어 해설하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반면 3부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있다. 칸트 철학의 철학사적 의미, 칸트 철학에 대한 비판과 한계, 이를 넘어서는 철학의 단초들을 밝히려는 웅대한 프로젝트의 냄새가 느껴지지만, 저자의 취향이 너무 강하게 베어 나온다. 이 책은 입문서이자 해설서이기에 2부까지 견지해왔던 좀 더 기본에 충실한 자세를 끝까지 밀고 나갔으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움이 든다.
칸트가 미친 영향과 철학사적 의미, 비판, 극복이란 주제를 긴장감 있게(대중성과 이론적 밀도의 융합) 끌고 나갔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칸트에서 너무 갑작스럽게 니체와 들뢰즈로 뛰어 넘어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3부가 진행될 수록 오히려 칸트는 소외되는 느낌을 버릴 수 없다. 칸트에 대한 비판과 극복이 아니라 오히려 무시 같은 것이다. 3부에 소개된 칸트 비판은 지엽적이거나 추상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 원인은 3부에 소개된 칸트 비판의 내용이 체계적이지 못하다는 점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2부에 남겨진 상태의 칸트과 3부에서 비판 받는 칸트 사이의 거리감이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3부를 읽다보면 저자가 느꼈을 곤란이 느껴지기도 한다. 바로 이 책이 [순수이성비판]에 대한 해설서이다보니 느꼈을 곤란이다. 칸트 이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칸트 철학에 대한 종합적 실체가, 특히 [판단력비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이 책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판단력비판]에 대한 설명을 삽입했지만 뭔가 급박하다는 느낌이 든다. 저자의 곤란이 독자에게 그대로 전달되고 있는 것 같다. 2부를 좀 더 포괄적으로 구성하여 [순수이성비판]으로부터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으로 진행되는 칸트 철학의 흐름과 그 내적 긴장들을 2부의 후반에 구성하고, 3부는 철저하게 칸트 이후, 즉 비판과 반비판, 한계와 극복의 문제에 집중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구성상의 아쉬움이 드러난다.
마지막으로, 사소한 것인데, 니체에게서 영향을 받았을 법한, 혹은 수유+너머의 문화적 전통이기도 한 저자의 풍부한 비유들이 또 하나의 아쉬움이다. 사실 저자의 비유들은 다른 딱딱한 철학 해설서에서는 보기 힘든 독창적이고 색다른 것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다지 성공적인 비유들은 아닌 것 같다. 개념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다지 문학적으로 성공적인 비유도 아니다. 오히려 흐름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 나는 후반부에서는 비유가 등장하면 그 부분은 건너뛰어 버리기도 했다. 나의 책 읽는 습관에서 어느 부분을 건너 뛰고 읽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다. 수능 문제 풀때조차 부호 하나 빼놓지 않고 지문을 읽어야 속이 풀리는 스타일이니 말이다.
(2009.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