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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의 죽음 ㅣ 작품 해설과 함께 읽는 작가앨범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고정순 그림, 박현섭 옮김, 이수경 해설 / 길벗어린이 / 2022년 12월
평점 :
「관리의 죽음」은 믿을 만한 타자가 결여된 세상 속에서 설 곳을 잃어가는 주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장관인 브리잘로프가 체르뱌코프에게 정확한 언행으로 사과를 받아주고 사건을 일단락 지었거나 아내든 누구든 그의 불안을 들어주고 지지와 동의를 해주었다면 과연 그가 죽음에 까지 이르렀을까. 누구나 할 수 있는 재채기 때문에 그가 불안에 빠지고 병적인 강박과 집착, 편집증적 사고, 박해망상까지 경험하다가 결국 사망한 것은 순전히 체르뱌코프 개인만의 책임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부모, 선생님, 정부, 국가와 같은 큰 타자의 힘이 막강하고 그들의 보호와 책임 아래 있을 때 주체의 자유는 제한적이었고 삶은 지금 보다 단순했다. 어떤 가문에서 태어나고 어떤 신분을 가졌으며 어떤 종교와 어떤 국가 아래 있다는 것으로 내 역할과 의무가 결정되었다. 말하자면 내 이름이 정해준 선을 지킨다면 큰 문제될 것이 없는 사회였다.
개개인의 자유가 존중되고 삶이 복잡해질수록 선은 모호해졌다. 기준과 원칙은 멀리서 보면 흐릿해 졌지만 가까이에서는 세세하고 다양하게 난립했다. 매뉴얼 이외에 더 신경 써서 지켜야 할 것들과 처리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졌다는 이야기다. 더 많은 눈과 더 많은 목소리들이 우리 주변을 에워싸고 있고 주체의 불안은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어떤 행동이나 말도 심판대에 오르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더군다나 인기몰이에만 관심이 있는 소비사회의 패턴이 만연한 지금의 사회는 공인이 아님에도 늘 타자의 판단과 선택에 휘둘리며 살아가게 된다.
체르뱌코프가 얼마나 조심하고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많이 쓰는가에 대해서는 그가 등장하는 장면마다 드러나 있다. 잘못 그려서 지워진 선들의 무시 못 할 존재감과 시종일관 입 주변이나 얼굴 주변에 등장하는 수정액 자국들은 그가 얼마나 신중하게 말과 행동을 고르는지 보여준다. 누구든 곁에서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침에 직장에서 마주친 동료가, 상사가, 친구가, 아내가 그렇게 경직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넌 괜찮다고 말해주었다면 말이다.
큰 타자에 대한 믿음의 결여와 책임의 전가 그리고 더 좋은 것, 더 새로운 것에 대한 욕망만을 쫒는 소비사회는 개개인의 불안을 증폭시킬 수밖에 없다. 오랜 옛날부터 생존을 위한 경고 시스템으로써 스위치 역할을 하던 불안은 이제는 매순간 켜져 있어 타인이나 주변을 돌아보기커녕 자기 스스로에게 조차 여유나 휴식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재채기 같은 작은 실수 아니 실수라고 할 수 조차 없는 일마저도 언제든 자신을 저격하는 거대한 사건으로 둔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체르뱌코프는 정신적으로 약하고 강박적이며 지나치게 예민하여 쓸데없는 걱정으로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언제든 바로 우리, 나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불안은 잠시라도 가만히 나 자신을 내버려 둘 수 없고 뭐든 하고 있지 않으면 시시각각 따라 붙는 자기검열의 꼬리잡기와도 같다. 진정한 관계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잃고 삶에서는 내가 나를 잃어가는 이 세상 속에서 체르뱌코프와 브리잘로프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큰 타자들의 몰락을 부정할 수 없는 이 세상에서 거대한 몰락을 책임져 줄 수 있고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힘을 찾는 것이 아닐까 한다.
단단하고 흔들리지 않는 작은 힘들의 모임 개개인의 삶을 돌보면서 타인의 삶도 돌아볼 수 있는 소타자들의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주체의 고유성과 권리를 존중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함께 책임져 주고 방법을 모색하는 부모와 선생님, 나아가서 약자나 특이성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사회적 연대와 단합 이러한 크고 작은 노력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회성이나 보여주기식이 아닌 이러한 지속적 노력들이 있다면 예민함이나 불안함이 쉽게 병적상태로 넘어가서 죽음에 다다르게까지 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온몸으로 엄청난 화를 뿜어내며 꺼져! 라고 장관이 말하는 순간 체르뱌코프의 배 속에서 뭔가가 터져 버렸다. 그것은 과부하 상태로 간신히 버티던 그 안의 두꺼비집이 일시에 퍽하고 나가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책의 시작에서 작지만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던 체르뱌코프의 인생은 책의 마지막에 암전을 이룬다. 새카맣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