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을 든 아이 곰곰그림책
안나 회그룬드 지음, 최선경 옮김 / 곰곰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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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에는 뭔지 모를 듯한 표정의 가녀린 맨발의 여자 아이가 주춤거리며 서 있다. 얼마 되지 않은 머리숱은 하나로 동여맸고 두 손으로는 검은색 우산 손잡이를 꼭 잡고 있다. 크고 작은 바위들만이 널려있는 회색빛 섬에서 뭔가 살아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다홍색 원피스뿐이다.

아빠와 소녀가 아침을 먹는다. 낡은 식탁과 의자, 컵과 칼, 그리고 접시도 없이 올려 있는 빵. 검소하다기 보다는 비루해 보이는 살림과 아빠의 갑옷이 대조적이다. 엄마의 부재나 휑한 집안이 주는 공허함은 아빠의 무관심과 함께 더욱 마음을 서늘하게 한다.

어느 날 아빠는 못된 거인을 무찌른다며 온갖 무기를 들고 훌쩍 소녀를 떠난다. 혼자 남겨진 소녀는 낮에는 망가진 것을 고치고 밤이면 거울을 꺼내들어 자신을 격려하며 오래도록 아빠를 기다렸다. 우리 집을 알아 볼 수 있게 촛불을 켜놓고. 촛불은 곧 다 타버리고 사방은 온통 무시무시하게 컴컴해졌다. 소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글은 옛이야기의 서사를 품고 있다. 주인공은 역경을 이겨내고, 길을 떠나고, 악을 물리치고 다시 평화를 찾는다. 여기서 주인공은 어린 소녀이다. 아직 다 성장하지 못 한 아이라는 것과 여자라는 성별은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써 가장 선택 받지 못하는 존재의 위상을 갖고 있다. 이쯤에서 토미 웅게러의 ‘제랄다와 거인’과 앤 이삭스‘세상에서 가장 큰 여자아이 안젤리카’가 떠오른다. 모두 가장 천대 받던 존재들의 뜻밖의 힘과 지혜가 빛을 발하며 그 여정에 관한 이야기가 통쾌하게 펼쳐진다.

소녀의 아버지는 양육이나 가정 보다는 세상을 살아나가는데 있어서의 철학이나 세계관에 대한 제시를 하고 있다. 사람을 헤치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거인을 죽이러 가는 아빠의 모습에서 소녀는 사회 속의 인간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배운다. 자신 또한 그러한 과업을 수행해야 한다는 묵시적 가르침이다. 소녀의 성장에 있어서 부모의 부재는 필연적인 요소가 된다. 소녀가 스스로 길을 떠날 필요도, 역경을 이겨낼 필요도 없으며 악을 물리칠 필요도 없다면 어떤 성장이나 새로운 삶으로의 이행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떠난 후에 소녀는 두려워만 하거나 기다리기만 하는 수동적 자세가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며 일상을 살아낸다. 그 때 거울은 자신 안의 내재된 힘으로써 그녀가 무너지지 않도록 지지대가 되어준다. 집안에 있는 초가 다 타버리고 모든 것이 끝난 듯 어둠이 소녀를 덮쳤을 때 소녀는 기다림을 멈추고 아버지를 찾아 떠난다. 소녀는 작은 칼과 거울에 의지하며 맨몸으로 시커먼 바다를 건넌다. 그녀는 새로운 세상으로의 이행을 위해 마치 제의를 드리듯 아침에 떠오른 태양 빛으로 몸과 옷을 정갈히 말리고 숲이 인도하는 곳으로 다시 길을 떠난다.

주인공의 여정에는 항상 조력자가 등장한다. 칼과 거울이 소녀의 힘이라면 매일 한결같이 떠오르는 태양은 보이지 않게 곁을 지키는 영원한 힘이다. 무채색의 세상에서 온정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지혜로운 존재, 우산을 만드는 할머니는 그녀의 방패막이이자 안전한 휴식처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괴물을 마주한 마지막 순간에 대적해 싸우는 것은 소녀 혼자이다. 아버지의 기상을 배웠고 거울과 칼을 들었고 우산으로 방패를 삼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맨발인 것이다. 누구의 발도 아닌 나의 맨발로 땅을 딛고 서서 거인을 대적하고 있다. 그녀는 혼자이면서 혼자가 아니다. 그녀 안의 모든 경험과 쌓여온 자산들은 결정적인 순간 재치와 기지를 발휘한다. 흉포한 거인은 소녀를 돌로 만드는 것에 실패하고 원래의 모습이었던 바위로 돌아간다.

어쩌면 이 길고 긴 서사 안에 존재하는 모든 인물들이 - 기사인 아버지도, 거울을 든 다홍색 드레스의 소녀도, 휴식과 안전, 지혜를 선사한 우산 할머니도, 모두를 돌로 만들어 버리는 포악한 거인도 - 모두 내안의 인물들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소녀가 겪는 이 무섭고 길고 외로운 여정이 내 안의 하나하나의 힘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과정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일상이며 긴 역사의 한 순간이라면 말이다.

내내 곁을 지키며 조용히 소녀의 곁을 지켜온 파랑새는 알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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