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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평점 :
사실적인 사랑 이야기이다.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는 느낌은 아니다. 그때의 감정을 잊지 않고 여실하게 보여줄 뿐, 무엇인가 설득하거나 어떤 감정을 이입하겠다는 의도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한 여자가 한 남자와 불륜관계를 가지고 있다. 혼자 사는 여자에게는 그 남자를 기다리고 욕망하는 일과 생각이 그녀의 삶을 차지하고 있다. 자식들에게 자신의 집을 예고 없이 드나들지 않도록 하고, 괜한 적선을 하기도 하며, 소소하게 불편하거나 짜증스러운 일상에도 불편을 느끼지 않고 그 남자만 생각하고, 그와 함께하는 시간을 떠올리거나 기대하며 행복해 한다.
남자가 그녀를 조심히 대하고 깊이 빠지려는 것을 자제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그녀는 남자가 그녀만큼의 열정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그 남자의 욕망을 선물로 여긴다.
여자는 그의 적당한 거리 두기에 만족하려고 하지만 내적으로 질투심과 욕망, 조바심에 갈등을 겪기도 한다. 그러다 그가 본국인 러시아로 떠나자 그의 부재로 인한 심한 혼란을 겪는다. 그에게 보내지 못하는 편지를 쓰고, 꿈에서도 나타나고, 그와 함께했던 장소를 배회하며 공허한 기다림과 갈망의 시간을 보낸다.
시간이 지나 그에 대한 욕망이 덤덤해질 때쯤, 전쟁이 터지고 그가 잠깐 프랑스에 와서 짧은 재회의 시간을 가졌지만 꿈인 듯,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 그에게 이전과 같은 과한 열정은 없다. 다만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67p.)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감정의 경험을 솔직하게 보여주기 때문인지, 지난 과거에 나 자신의 청승맞기도 했던 그 부끄러운 감정들이 다시 살아났다. 나만 기억하고 싶고, 남에겐 들키고 싶지 않았던 감정들인데, 그것들을 꺼내서 당신도 한번 돌아보라고 ‘제안’하고 있는 것일까. 사랑에 빠지는 감정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예고 없이 찾아와 거부반응을 일으키기도 하고, 때로는 순순히 굴복해 버리기도 한다. 순전히 받아들이고 내 감정을 뻔뻔하게 드러나도록 나 자신을 풀어버리면 좋겠다. 아주 단순한 열정처럼.
사랑을 할 때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우리 관계에 보태어진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동시에 쾌락의 행위와 몸짓이 더해지는 만큼 확실히 우리는 서로 조금씩 멀어져가고 있었다. 우리는욕망이라는 자산을 서서히 탕진하고 있었다. 육체적인 강렬함속에서 얻은 것은 시간의 질서 속에 사라져갔다. - P17
그는 외국인들이 흔히 그러하듯 프랑스의 지적이고 예술적인 것들이 불러일으키는 가치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실제로 그다지 매료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 P27
‘그 사람은 욕망이라는 값진 선물을 하고 있잖아‘ - P29
속옷이나 구두를 보면, 예전엔 한 남자를 위해 샀지만 이젠단순히 요즘 유행하고 있는, 내겐 아무런 의미 없는 것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내 사랑을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도대체 저런 것들을 갖고 싶어할 까닭이 있을까? 온몸에 한기가 몰려와 숄을 둘러야 할 지경이었다. ‘다시는 그 사람을 볼 수 없을 거야.‘ - P48
그런데도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어떤 영화를 볼 것인지 선택하는 문제에서부터 립스틱을 고르는 것에 이르기까지모든 일이 오로지 한 사람만을 향해 이루어졌던 그때에 머물고싶었기 때문이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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