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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공무원 생리학 ㅣ 인간 생리학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류재화 옮김 / 페이퍼로드 / 2021년 2월
평점 :
현시대와 비슷한 듯 아닌 듯.
발자크의 소설 중 이 정도 냉소는 겪어본 적이 없는데, 소설 외의 형식이다보니 본색이 드러나는가 싶을 정도로 신랄한 것이 충격적이다. 에밀 졸라가 생각났는데, 해설을 보니 순서가 바뀌었다. 졸라가 발자크의 영향을 받았다.
발자크의 소설을 읽을 때 그의 냉소와 풍자를 유심히 찾아봐야겠다.
살기 위해 봉급이 필요한 자, 자신의 자리를 떠날 자유가 없는 자, 쓸데없이 서류를 뒤적이는 것 외에 할줄 아는 게 없는 자.
철학자라면, 약간 의사라면, 약간 생리학자라면, 약간 작가라면, 약간 행동관찰가라면, 약간 골상학자라면, 약간 자선가라면, 우리 시대 편집증의 산증인인 공무원의 정신상태가 심히 의심스럽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제3장에서 ‘백치로 만들다‘라는 동사를 가지고 이미 언급한 것처럼, 몇 년 동안 사무실에서 똑같은 일만하면 그런 불운한 자가 될 수밖에 없다. 다만 이 깃털 포유류가 이 직업으로 인해 백치가 되는 건지 아니면 태어날 때부터 약간 백치였기 때문에 이 직업을 택하는 것인지, 뭐가 더 맞는 건지는 알 수가 없다.
회계사는 기계처럼 또는 의미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처럼 주고받는 것에 능하다. 하는 일이 ‘회계‘ 이다 보니 자신을 화폐처럼 다룰 줄 아는 것이다. 쥐며느리처럼 창구에 딱 붙어 해고 걱정 없이 은신하면 되는 것이다. 행복한 사람을 그리고 싶다면 장관 부처의 금고 창구에 딱 붙어 있는 포동포동하고 반반한 얼굴을 그리면 된다. 이 자들은 얼굴에 주름이 하나도 없다.
이 청년은 정치인은 아니지만, 정치적 인간이거나 인간 정치 그 자체다. 거의 항상 젊은 사람인데, 장군에부관이 있듯 장관에 보좌관이 있는 것이다. 그의 역할은 밀착전담이다. 그는 장관의 필라테스이다. 장관에게 아첨하고 충언한다. 아니, 충언하기 위해 아첨하고, 아첨하면서 충언하고, 충언 아래 아첨을 감추기도 한다. 새파란 젊은이는 얼굴이 누렇게 뜬 채 장관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게 몸에 배어 있다. 전혀 이해되지 않는 내용인데 소통을 해야 하니 아는 척을 하느라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당신이 하는 말에 대해서도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척할 것이다. 그들은 ‘그러나‘ ‘하지만 ‘그런데도‘ ‘그러니까 저라면‘ ‘당신 입장이라면 저는 같은 말을 항상 입에 달고 산다. 문장마다 이미 모순어법이 준비된 것이다.
순진하고 순박하며 어떤 환상에 젖어 있는 자다. 하기야 환상 없이 어찌 살 수 있을까? 예술이라는 ‘성난황소‘를 실컷 먹고 우리에게 믿음을 주는 모든 기초 과학을 게걸스럽게먹어 치울 수 있는 힘을 주는 게 이런 환상 아니던가. 환상이란 과도한 믿음이다!
두 종류의 임시직밖에 없다. 가난한 임시직과 부유한 임시직 가난한 임시직은 희망만큼은 부자이다. 자리 하나만 주면 된다. 부유한 임시직은 정신만큼은 가난하다.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부유한 집안의 이름난 재사라면 관청에 들어가겠다고 그렇게 아등바등하지 않는다.
수집가 관공서 일은 교대 근무를 하는 사람에게 너무나 따분한 일이다. 이 권태를 다른 열정으로 풀게 하는데, 직원들 정신 상태가 완전히 불이 꺼진 것은 아니다. 그래서일까? 행정부마다 수집가나 예술가가 없는 부처가 없다. 정리 정돈을 좋아하고 세심하고 꼼꼼한 수집가는 자신의 승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생활할 수 있을 만큼만 벌고 취미에 몰두할 수 있는 일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국가는 공무원에게 아주 적은 비용을 들이지만, 공무원은 두 배의 실존을 요구받는다. 정부 일과 산업 일 둘 다 공유하면서 해내야 한다. 그 결과 일은 더 힘들어지니 천천히 진행하는 수밖에 없다.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모든 공무원은 사무실에 9시에는 출근하지만, 대화하고 설명하고 토론하고 깃털 펜 다듬고 밀통하다 보면 벌써 오후 4시 반이다. 노동 시간 가운데 50퍼센트는 이렇게 날아간다. 20만을 지불하면 되는 일에 1천만을 지불하는 꼴이다.
두 친구는 평화 시에는 함께 흐르는 강물을 보며 낚시의 기쁨을 누리다가 전쟁 시에는 아주 미세한 차이로 갈라설 수 있다.
프랑스 문학에서 ‘생리학‘ 시리즈가 대유행한 것 1840~1842년 무렵이다. 이 용어는 이중적인 함의를 갖는데, 하나는 내용적인 면이고 하나는 형식적인면이다. 인간 또는 인간 사회를 더는 관념적으로 설명할 수 없을 때, 이제 동물이나 식물의 분류법처럼 인간 또는 인간 유형을 과학적 연구 대상으로 삼아 분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 나름의 생존방식에 따라 생리적 기질대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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