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수업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배명자 옮김 / 다산초당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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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단정한 느낌이 들고 동시에 온기가 느껴진다.

그리고 나는 곧 깨달았다. 면도도 잘 안 하고 후출근해 보이는 이 말라깽이 청년은 자신을 위해 철저히 반자본 주의적인 새로운 시스템을 발명했다. 그는 사람들의 인성을 믿었다. 그는 은행에 적금을 넣는 것보다 이 작은 도시의 거의 모든 사람의 마음에 도덕적 의무라는 유동자산을 저축하기를 더 좋아했다. - P10

때때로 사소하고 어리석은 돈 걱정이 들 때면,
나는 당장 단 하루에 필요한 것 이상을 원하지 않아
늘 여유롭고 태평하게 살 수 있는 이 남자를 떠올린다. - P15

그 중요한 순간에 그를 저버리고 만 것은 공감 부족이나 무관심, 못된 의도가 아니었다. 가장 필요할 때 올바 른 말을 못 하게 막는 것은 많은 경우 용기 부족인 것 같다.
패배나 굴욕의 수치심으로 영혼을 다친 사람에게 다가가는 일이 절대 쉽지 않음을 잘 알지만, 이때의 경험을 통해 나는 누군가를 돕고 싶은 첫 번째 충동에 주저 없이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공감의 말과 행위는 도움이 가장 절실한 순간에만 참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 P20

우리는 비록 돈에 실패했지만, 삶의 용기와 기쁨을 잃지는 않았다. 오히려 돈의 가치가 떨어질수록 삶의 오랜 가치(일, 사랑, 우정, 예술, 자연 등)가 더욱 중요해졌다. - P25

삶의 연속성을 유지하려는 의지가 돈의 실패보다 더 강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기차는 붐볐고, 우편물은 제 시간에 도착했고, 제빵사는 빵을 굽고, 농부는 땅을 일구고, 아이들이 잉태되고 태어났으며, 모두가 예전처럼 자신의 소명, 성향, 재능대로 살아갔다. 나는 언제나처럼 열심히 일했고, 어쩌면 심지어 그 어느 때보다 더 훌 륭하게 집중해서 일했던 것 같다. - P25

돈을 믿지 못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여전히 신뢰할 수 있는 것들의 진수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의 가치를 보 존하고 수호하기 위해 더욱 노력했다 - P26

그런데 이 시대의 우리는 정말로 세계적 격변을 모두 목격하고 그것에 빈틈없이 참여하고 있을까? 아니면 이 렇게 묻는 게 더 낫겠다. 이 시대의 우리는 쏟아지는 이 모든 사건을 매일, 매시간 주의를 기울여 따라갈 여력 과 참여의식을 충분히 가졌을까? 솔직하게 자문해 본다면, 우리 중 누구도 이렇게 끊임없이 닥치는 높은 긴장 에 대처할 여력이 없고, 우리는 그저 이따금 좌절과 절망의 눈으로 사건을 바라볼 뿐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시대의 대다수는 역사가 아니라 언제나 오직 자신의 삶을 산다. - P31

세계의 극이 길어질수록 장면은 점점 더 끔찍해지고, 사건이 자극적일수록 그것을 진심으로 연민하는 능력이 더욱 줄어든다. 전쟁에 대한 끊임없는 생각은 마음을 파괴하고, 시대가 우리에게 연민을 더 많이 요구할수록, 우리의 지친 영혼이 느낄 수 있는 연민은 더 줄어든다. - P32

사람들 대부분은 평범하지 않은 모든 사건에 관심을 둘 의향이 매우 강하고, 그것에 몰두하고 참여하려는 의 지가 있으며, 심지어 그것을 소망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모두 더 강한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이 자 연법칙은 우리의 참여 의지와 공감 능력을 현명하면서도 경제적으로 제한한다. 강한 흥분이 연속되면 필연적으로 피로가 누적되고, 너무 오래 계속되는 과도한 긴장은 일종의 마비를 일으킨다. - P32

그러므로 역사적 시대의 모든 낭만적 상상을 진실에 맞게 지우면, 역사적 사건이 벌어지는 바로 그 시대를 사 는 사람들은 사건을 경험하고 그에 참여하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잊으려 애쓴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 P32

평범하지 않은 사건들이 사방에서 벌어지더라도 일상생활은 평범하게 계속 이어진다 - P32

그것은 우리가 비인간적이어서가 아니라, 작은 심장 하나를 가진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심장은 너무 작 아서 일정량 이상의 불행을 감당하지 못한다. 공감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런 역사적 시대 에 너무 많 은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고, 우리의 마음이 당장 벌어지고 있는 일에서 잠시 떠나 아무런 감정도 일지 않는다 면, 이는 그것을 감당할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지 선한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다. - P33

그러나 4년쯤 이르자 피로감이 밀려왔고, 어쩌면 미미한 익명의 소시민인 자신들이 역사적 시대에 얼마나 무 력하고 무의미한 존재였는지 깨달았을 테고, 해석하기도 힘든 정치적 사건에 무의미하게 몰두하기보다 차라 리 자기 일에, 조용하고 사적이며 눈에 띄지 않는 일상생활에 집중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을 터다. 그리고 이 는 결국 더 강한 자연의 의지에 순종하는 것이었다. 자연의 의지는 연속성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어떤 중단도 용납하지 않는다. 자연은 사람들 일부가 무참히 파괴되더라도, 나머지 사람들은 끈기 있게 인내하며 일상생활 을 이어나가길 요구한다. 우리가 때때로 시대에 무관심해 보인다면, 그것은 자기 피조물의 고통에 무관심한 자연의 잘못이다. 그리고 무너져 가는 세계의 폐허를 계속 노려보는 대신 더 나은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려고 노력할 때 비로소 우리는 거부할 수 없는 자연의 명령에 순종하게 된다. - P34

그리고 지금 내가 무엇을 가장 깊이 괴로워하는지 자문하면, 목숨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의 고통에 연민을 느 끼는 공감 능력까지 죽이는 이 엄청난 고통의 시대에, 모든 일에 연민을 느낄 여력이 더는 남아 있지 않은 것 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 P34

우리는 밝은 대낮에 별을 보지 못하듯, 삶의 신성한 가치가 살아 있을 때는 그것을 망각하고, 삶이 평온할 때 는 삶의 가치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 P63

작가는 조국을 떠날 수는 있어도, 창작하고 생각하는 데 사용하는 언어와는 갈라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독일어로 나치의 자기 신격화에 맞서 줄곧 싸워왔고, 바로 이 독일어야말로 세계를 파괴하고 인간 존엄을 시궁창에 던져버리는 범죄적 망상에 맞서 싸우는 데 쓸 수 있는,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무기입니다. - P63

처음에 그를 당혹스럽게 했던 센강의 낚시꾼 일화에서, 그는 혁명의 정점인 루이 16세 참수에도 아무 일 없다 는 듯 느긋하게 미끼를 던진 낚시꾼들의 무관심을 1940년 전쟁 최전선에서 매일 접하는 새로운 충격적인 보 도에 아랑곳하지 않는 동시대 사람들의 무감각과 비교한다.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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