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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가 된 독자 - 여행자, 은둔자, 책벌레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양병찬 옮김 / 행성B(행성비) / 2017년 9월
평점 :
절판
8월 첫째 주부터 <은유가 된 독자>의 위대한 독서가이자 작가 알베르토 망구엘을 만나게 되어 영광이다. 자신의 직업을 '독서가'라고 할 정도로 다독가로 유명하다. 작가에 대한 소개는 책의 첫 페이지에 상세하게 나와 있다.
서양 문학과 고전들을 통해서, 독서를 하는 독자, 독자와 세상과의 관계, 책과 독자의 관계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보여준다. 책이 얇기도 하지만 숨 막히는 통찰력과 인용에 반해 단숨에 다 읽어내려갔다.
다만,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최초의 신화<길가메시 서사시>, 단테의 <신곡>, 괴테의 <파우스트>, <성서>, 셰익스피어 <햄릿>,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귀스타브 플로뵈르 <마담 보바리> 정도의 독서는 되어있어야 그나마 이해가 될 것 같긴 하다.
완독을 못한 책도 많지만 그나마 책을 뒤적이며 읽는 시늉이라도 해서 제법 흥미롭게 읽어나갔다.
1부는 독자를 여행자로 보고 독서라는 행위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다룬다. <길가메시 서사시>를 펼치는 순간, 우리는 이미 길가메시와 함께 필자가 이미 걸었던 길을 함께 처음부터 여행하게 된다. 길가메시는 자신의 형제와도 같았던 친구 엔키두의 죽음을 보면서 깊은 절망감에 빠져 영원한 삶을 찾아 나선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살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미 수천 년 전부터 불로장생을 꿈꾸었나 보다. 그렇게 험난한 과정을 독자와 함께, 필자가 이미 만들어 놓은 여행 지도 위를 걸어가는 것이다.
단테의 <신곡>에서도 단테가 어두운 숲속에서 길을 잃은 순간, 독자는 단테와 함께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를 받아 지옥, 연옥, 천국을 여행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단테가 천국까지 여행을 다 하고 와서 독자를 끌어들여 다시 여행을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곳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천국으로 안내하는 베아트리체를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단테는 독자가 책을 읽는 동안 자신을 돌아보며 깨닫고 반성하도록 무서울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한다. 심지어는 <신곡>에는 삽화도 많다. 끔찍한 모습들이 많이 나온다.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처참한 모습들이 반복되어 나오기 때문에 단테와 여행을 끝낸 후에는 <신곡>을 평생 곁에 두게 된다. 죄짓지 않고 반성하면서 살기 위해.
p.67
우리는 혼자 읽기를 불편하게 여기게 되었고, 독서가 상호 연결되기를 원해 인터넷으로 서평을 공유한다. 또한 '남들이 읽는 책'을 알려 주는 베스트셀러 목록의 조종을 받고, 출판사들이 오리지널 텍스트에 덧붙인 책 소개 글에 솔깃하여 질문도 한다. 우리는 단톡방에서 수다를 떨고 페이스북을 통해 친구를 얻는다. 텅 빈 방에 앉아 벽에 비친 단 하나의 그림자를 바라보기 두려워하는 것이다
책과 함께 여행을 하는 반면, 2부에서는 오히려 책에 매몰되어 상아탑 속에 갇힌 경우다.
철학. 법학. 의학 서적을 읽은 후 나는 조금도 현명해지지 않았고, 도리어 신앙의 교리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 상아탑의 벽이 내 영혼을 가로막고 있다. 내가 가진 실험 기구와 문헌들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쓰레기에 불과하고, 내가 쓴 논문들은 내가 만들어 낸 허상이다. 나는 어떤 것에서도 쾌락을 느낄 수 없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파우스트> p.86
이렇게 갇혀서 책만 읽던 파우스트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어리석은 계약을 하고 그 대가로 영혼을 빼앗기고 만다. 또 한 가지 예로 <햄릿>은 말만 앞세우고 행동을 주저하며 상아탑에 머문다.
제3부는 책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책벌레에 관한 것이다.
책 바보는 특히 잡식성 독자로, 책 사재기를 지식의 축적으로 오해하며, 책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세상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확신한다.
p.136
독자는 책 바보와 책벌레라는 이중의 굴레에 갇혀 있다고 볼 수 있다. '책을 사랑하는 독자'는 책 바보가 되고 '걸신들린 독자'는 책벌레가 되는데, 둘의 공통점은 '책에 사로잡힌 독자'에 대한 은유라는 것이다.
p.147
돈키호테가 책 바보였다. 유명한 풍차 장면에서처럼 기사도 소설에 매몰되어 현실과 소설 속 허구를 구별하지 못한다. 실존하지도 않는 둘시네아 공주를 위해 기꺼이 기사 역할은 하는 것이다.
혹시 모른다. 우리 주위에도 이런 인물들이 있을지.
순식간에 다 읽어내려간 최고의 책이다. 그동안 독서를 하면서 헛된 시간을 보낸 건 아니라는데 위안을 받았다. 책 바보와 책벌레가 되는 건 운명으로 받아들이되, 상아탑에 매몰되지는 않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문을 당당히 열어젖힐 수 있는 독자가 되겠다.
마지막으로 책의 뒤표지를 장강명 작가가 장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