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 이 나라를 떠다니는 부조리에 대한 의문, 부정의에 대한 항의, 진실은폐에 대한 거듭된 질문을 누군가는 기억해야 한다.

 

격동의 세월을 살면서도 참된 삶에 관한 교훈을 얻지 못하고, 패거리 정치꾼들의 놀음판에 말이 되어 늘 망각의 강을 건너는 우리의 과오를 기억해야 한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꿈꾸는 미래를 제시하기 못하고 숨 막히는 입시교실에 가둔 어설픈 어른들을 기억해야 한다. 개살구에 불과한 성장과 성과를 위해 도도한 강을 뒤엎고, 생태보고인 습지와 갯벌을 없애는 무지몽매함을 기억해야 한다.

 

국가와 권력을 사적으로 활용하고, 국민과 시민사회와 공적 구성원들을 이간질시키고 사회분열을 조장하는 철학 없는 위정자를 기억해야 한다. 1%의 기업집단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99% 국민의 생존권을 과감히 내던지는 무모한 정책결정자를 기억해야 한다. 꽃 같은 아이들과 국민들을 사지에 몰아넣고도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했던 우유부단한 한 사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독재의 나라에서 태어났지만, 아직 독재의 나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먼저 간 누군가는 이 나라에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렸지만, 다시 등장한 누군가는 새로이 돋아난 싹을 짓밟고 독재의 망령을 부활시키고 있다. 그동안 변한 것은 설탕과 밀가루에 대한 숭배에서 벗어났지만, 결국 햄버거와 커피의 숭배에 빠져버린 우리 국민들이다. 독재의 시대에 독과점의 지위를 부여받았던 기업 자본은 지금은 거대자본이 되어 국가경쟁력이라는 이름으로 국가와 국민을 좀먹고 있다.

 

11월의 하늘은 시리도록 청명하지만, 우리는 분노해야 한다. 우리의 반복되는 온정주의와 대책 없는 망각에 분노해야 한다. 국민의 생존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사유화된 권력에 분노해야 한다. 신자유주의라는 유령에 국가와 국민을 볼모로 잡혀버린 영혼 없는 권력자에 분노해야 한다. 이들 권력에 빌붙은 좀비 같은 추종자들과 그들의 허언에 분노해야 한다. 이들에게 주권이라는 이름으로 권력을 부여한 우리의 어리석은 선택에 분노해야 한다.

 

비좁은 교실에서 시험기계가 되어 내일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아이들의 교육현실에 분노해야 한다. 재정건전성이라는 미명하에 국민의 복지를 하향평준화 시키는 후안무치한 결정에 분노해야한다. 세대 간의 단절과 국가 구성원의 분열을 책동하는 보이지 않는 아주 나쁜 손에 분노해야한다. 정치실험이라는 이유로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파괴하고 국부를 헛되게 낭비한 삽자루 정신에 분노해야 한다. 개그프로의 닥치고와 같이 계속된 망각에 희화화된 우리의 현실에 분노해야 한다.

 

누군가는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해야 하고, 또 누군가는 맨몸으로 부당함을 표현해야 하고, 다른 누군가는 반복되는 질문에 침묵하는 거짓됨에 분노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거대한 망각에 분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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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꽃

 

흩어지며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호명(呼名)

속삭임의 진원은 멀지 않다

잊혀진 그 꽃

가시에 찔리면 눈멀고

향기에 찔리면 가슴이 먼다, 는 꽃말이 있는

 

하여, 부름을 받지 못해 봄밤에 홀로 피고

낮달이 있는 어느 하루를 겉돌며

어둠의 귀가 닫혀 스스로 지지도 못하는

 

필연의 낙화를 예감하지 못한 채

누가 가슴으로 낳았을까

저 분분하게 붉은, 불러야 할 이름의 꽃

 

이름으로 잊혀진 것들은

부름으로, 부름으로 다시 태어난다

 

한생이 지나도 피고 지는 소란은 남는 법

향을 남기는 숙명은 바람의 호흡에 흔들리고

기억으로 유전되는 법. 흔들리자, 흔들리자

 

다시 부를까, 잊혀진 그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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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도

 

부모 학부모2014년 연초에 공중파에서 방송된 프로그램의 제목이다. 시리즈의 제목만 보더라도 기획의도가 들여다보여서인지 TV를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동일한 심리적 주체로서 같은 입장이면서도 서로 달라 보이는 부모와 학부모의 딜레마를 3부작으로 풀어냈다. 1부는 공든 탑이 무너진다, 2부는 기적의 카페, 3부는 부모의 자격이다.

 

이 프로그램의 의도는 이렇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심정과 자식이 공부를 잘 하기를 바라는 학부모의 마음이 서로 상충된다는 것에서 가족의 비극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극단적인 사례를 들어 상황설정은 했지만, 이 땅에서 자식을 키우는 많은 부모들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소재였다.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낳은 자식은 늘 안쓰럽다. 추우면 추운대로 더우면 더운 대로 그 환경이 아쉽고, 더 잘 못 먹여 안날이 나는 게 부모들이다. 애가 아프기라도 하면 부모의 심정은 어떤가. 공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학부모는 어떠한가. 초등학교 시절 반장도 해봐야 하고, 공부는 물론이고 누구 앞에서 발표도 잘해야 하고, 악기도 두어 개 정도 다룰 수 있었으면 좋겠고, 사춘기도 아무런 불협화음 없이 조용히 지나갔으면 좋을 것 같고, 친구관계도 원만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는 것이 학부모 아니던가. 성적지상주의인 이 나라에서 자식의 위치를 가늠해보면 학부모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2. 공든 탑이 무너질 수도 있다

 

애들이 요람에 쌓여있을 때나 기어 다닐 때,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는 학부모의 마음보다 부모의 마음이 승리한다. 하지만 그 이상의 학년에 올라가고, 중학생이 되면 상황은 반전된다. 사랑스럽고 예쁘기 그지없는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보다는, 말 잘 듣고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성장하길 바라는 학부모의 마음이 분명 앞선다. 문제는 부모의 눈빛을 그렇게 잘 받아들이고 순응하던 아이들이 학부모의 눈빛에는 심한 거부감과 저항을 한다는 것이다.

 

학부모는 학부모대로 그런 눈빛의 아이들에게 서운하다. 학원에서 늦게 귀가하는 아이를 다그쳐 더 공부를 시키는 것이 모두 부모 잘되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항변을 한다. 자신의 한풀이까지는 아니더라도, 남들이 알아주는 대학 진학과 전문가가 되는 자격증 취득, 유수의 공·사조직에 취업하는 것이 이 나라에서 잘 살아가는 조건임을 알고 있는 까닭이다.

 

자본주의를 표방하는 나라에서는 직업에 의한 선호 및 차별이 어느 정도의 문제로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특정한 직업 또는 직역이 개인의 인격이나 품격까지 결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는 드물다. 국회의원들 중 변호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의 수를 헤아려 보라. 잘난(?) 그들을 바라보는 일반 국민들의 시선의 의미를 생각해보라. 이 나라에는 직업적 콤플렉스가 없는 직업이 없다. 왜 그럴까? 모두의 시선이 자신보다는 위쪽 세상을 향하고, 비교의 기준 또한 위쪽세상이 되기 때문이다. 부모들이 학창시절과 직업전선에서 느끼는 불편함은 그들의 몸과 뇌리에 기억되어 자식들에게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전달될 수밖에 없다. 모든 부모들은 자식들이 찌질하게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결국 과도한 경쟁사회에서의 자신의 경험은 가정에서 학부모의 주장을 정당화시키는 강한 논리가 된다.

 

문제는 학부모가 무장한 논리가 아이들에게는 너무 일방적이라는 것이다. 그 논리가 아이의 미래를 위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으나, 그 논리의 기준이 되는 것은 현재 아이가 아니라 학부모라는 것이 큰 문제다. 결국은 학부모의 일방적인 잣대나 강요가 아이의 성적에 일조할 수는 있지만 현재 아이의 행복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부모의 생각은 자식의 오늘보다는 대학진학 이후, 취업이후의 자식의 행복에 있다. 극단적으로 이 논리를 밀어붙이다보면 그 부작용은 심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이다.

 

공든 탑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결코 쉽지 않다. 경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홀로 중심을 잡는 것이 어찌 쉽겠는가? 과도 경쟁사회, 부와 학벌 및 직업의 대물림, 특정 직역의 독과점화가 일반화된 이 땅에서 부모와 아이들에게 남겨진 카드는 없는 것인가?

 

이 프로그램에서는 서울대 경영학과 2013학번 학생들을 연구 조사한 결과를 보여준다. 처음부터 쭉 공부를 잘했던 학생, 게임중독에 빠졌다가 스스로 극복한 학생, 중고등학교 성적이 들쭉날쭉했던 학생, 사교육의 큰 도움 없이 입시를 준비한 학생 등이 현재 경영학과에 재학 중이었. 인터뷰에 응했던 학생들은 모두 스스로 자기관리를 잘했던 유형이었고, 그들의 부모들은 그들을 믿고 기다려주는 민주적인 부모들이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식들 문제에 있어서는 기본적으로 헌신적이다. 문제는 자신들의 헌신과 자신의 욕망을 혼동할 때, 자식의 성공과 자신의 성공을 일치시키려 노력할 때 부모는 자식을 하나의 작품으로 인식한다. 자식은 부모의 그러한 시각에 불편해하고 양자간의 관계는 소통의 길에서 멀어져간다.

 

오히려 아이가 잠시 흔들리거나 공부 외적인 측면에 빠져있더라도 아이의 복원력을 믿고 기다려주는 부모들도 있다. 아이들이 그러한 부모의 신뢰를 바탕으로 스스로 중심을 잡고 자기주도적인 행동을 통해 바람직한 결과를 맺는다.

 

프로그램의 의도는 분명하다. 아이들의 성장은 부모의 맹목적인 헌신에 있지 않고, 자식에 대한 신뢰와 기다림에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 바탕위에서 공든 탑은 무너지지 않는다.

 

 

#3. ‘기적의 카페에서는 마음공부가 필요하다

 

기적의 카페는 강남 대치동 한복판에 만들어졌다. 부모와 아이들 간의 관계가 악화되고 학교와 학업성적 때문에 갈등이 고도화된 가정의 구성원들이 카페에 모여 상담을 하고, 특강을 들었다. 그 중 문제가 많아 보이는 일부 가정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화면에 담았다. 아이들의 솔직한 상담에 부모들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고, 부모들과 아이들의 상처는 서서히 치유되기 시작했다.

 

과연 기적의 카페가 필요한 것이었던가? 각자의 가정에서 부부가 평소에 가정의 대소사에 대해 자주 대화하고, 자녀교육문제도 각각의 수준에 맞는, 아이의 행복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이끌어 나갈 정도의 논의가 가능한 가정이었다면 분명 부모와 자식이 반성의 눈물을 흘리는 카페는 필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집도 그렇지 못하다.

 

문제가정은 어디든지 존재한다. 특히 사춘기가 지나고 있는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둔 가정에서는 부모는 부모대로 한숨을 쉬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불만을 터뜨린다. 부모 입장에서는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이 인생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단계로 인식을 하고 아이들이 이 시점에서 큰 성과를 보여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아이의 입장에서 이 시기는 존재에 대한 혼란과 더불어 삶에 대한 불안감이 서서히 커져가는 단계다. 때문에 아이들은 오히려 따분한 공부로터 탈출하고 싶고, 공부 이외의 것에 더 관심을 두고 싶은 욕구가 일상을 지배한다. 부모가 아이의 이러한 성장과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때 문제가정이 되는 것은 시간의 문제다.

 

우리사회의 교육과정은 고민이 필요한 십대들에게는 잔인하다. 우리나라에는 십대의 미성숙과 과도기적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비인간적인 교육과정과 이들을 사육하려는 학교, 그리고 이에 동조하는 부모의 무관심이 존재한다. 슬픈 현실에 아이들은 입을 닫고, 이를 외면하는 부모들은 귀를 닫는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어려워지는 수학이 중1, 2학년 때 난이도가 도약을 하게 되면 부모의 성급함은 극에 달한다. 덕분에 이 동네 저 동네 수학학원의 원장들은 쌍수를 들고 부모와 아이들을 반긴다. 이 때 아이들 중 열에 아홉은 비자발적으로 소위 수포자(수학포기자)”가 된다. 수포자에게 부모의 시선은 냉정해지고 부모 자식 간의 불소통에 관한 악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진다. 수학을 포기하게 되었을 경우 상위권 대학진학이 물 건너가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부모에게 수포자는 이런 웬수가 따로 없다.

 

부모의 따뜻한 시선과 손길을 기대했던 아이들에게 냉담한 시선과 가시 돋친 훈계는 아이들 가슴에 상처와 아픔을 준다. 아이들 교육에 무관심했던 아빠나 헬리콥터처럼 주위를 맴돌던 열성엄마나 아이의 성적과 행동에 모두 분노한다. 아이는 돈벌어다주는 기계인 무관심한 아빠에게 분노하고, 학원 알아봐주는 사람인 사채업자 같은 엄마에게 분노한다.

 

분노의 가장 큰 단점은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는데 있다. 또한 분노한 마음은 상대방이 하고 싶은 말을 듣지도 그 진심을 알지도 못한다. 기적의 카페에서는 이러한 부모와 아이의 분노를 치유했다. 냉정했던 부모는 자신의 일방적 잣대를 거두고 아이의 소소한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분노했던 부모는 따뜻한 시선으로 긴 호흡으로 아이의 일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가족들은 기적의 카페를 통해 그동안 막혔던 대화에 물꼬가 트이고, 견고했던 분노의 벽이 허물어지는 것을 서로가 느끼기 시작했다.

 

부모들이여, 우리 아이들이 공부하는 기계가 되어 마냥 성적만 좋은 학생이 되기를 바라는가? 아니면 부족하더라도 자신의 생각과 꿈을 가진 따뜻하고 사랑스런 자식으로 성장하길 바라는가? 진정 그렇다면 우리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회복력을 믿으시라.

 

  

#4. 진정한 부모의 자격은 사랑이다

 

자격은 신분이나 지위를 말하기도 하나, ‘남자의 자격이나 부모의 자격에서의 자격은 일정한 조건이나 능력을 전제로 한다. 이때의 자격은 필연적으로 비교의 대상을 찾고 일정한 기준으로 그 우위를 가리려 한다. 애당초 부모의 자격이란 것이 부모와 자식 간의 본질이 아니었던가? 그 본질은 부모로서의 특별한 능력이나 조건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부모의 자격을 공론화하고 그 조건을 규정지을 때 이미 부모는 본연의 바람직함에서 멀어져있지는 않을까? 지금 우리가 부모의 자격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우리사회의 슬픈 세태를 반영한다.

 

우리 시대의 열성엄마들은 본인의 아이들이 경쟁에 우위를 점하고 성적에서는 정점에 서기를 바란다. 그들은 아이의 바람이나 적성과는 관계없이 과학고와 외고, 그리고 자사고에 아이를 보내고 싶어 한. 과도경쟁의 사회시스템은 교육시스템에도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열성부모들의 혈관 속에 흐르는 외고나 자사고에 대한 애정은 아이들의 꿈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자신들이 종교처럼 믿는 대학의 입학허가서나 다름없는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공부시키는 것이 자신들의 능력이라고 과신하고 있다.

 

수학이나 과학 올림피아드에서 한국의 고등학생들은 우수한 성적을 거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성인이 되어서는 노벨상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다. 수학능력이 한참 처졌던 미국의 과학자나 과학능력이 부족해보였던 일본의 공학자들은 노벨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한국의 아이들은 지나치게 많은 공부를 하지만 스스로 미래를 꿈꾸지 못한다. 지적 호기심을 살리고 동기부여가 지속적으로 가능한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강요된 공부를 한다. 그 어려운 수학문제를 반복해 풀고 대학에 입학했지만, 막상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써먹을 데가 없다. 이 무슨 아이러니란 말인가? 결국 시험 외에는 쓸모도 없는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해버린 대가는 창의성이 부족하고 행복이 결핍된 아이들이다. 오직 시험을 위한 공부는 합격을 보장하기는 하지만 그 이상의 성취는 없다. 그래서 이 나라에서는 노벨상 수상자가 전무한 것이다.

 

성적이라는 한 가지 기준으로 줄을 세우고, 친구들을 자신의 발아래 두어야 칭찬을 받는 사회에서 아이들은 행복할까? 호기심 많은 십대를 지나면서 지적충족과 정체성을 찾아가며 스스로 자존감을 기를 수 있을까? 부모에 의해 강요된 공부를 하고 성적의 단맛에 길들여진 아이들은 부모를 어떻게 생각할까? 아이들의 평가에서 부모의 자격은 비로소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문제 있는 아이를 규정하기가 쉽지 않듯이 문제 있는 부모를 개념화하기도 힘들다. 문제부모 뒤에 문제사회가 있다고 하는 것도 쉬운 설명은 아니다. 그러기에 부모의 자격을 논하는 것도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부모 스스로의 처절한 반성 없이는 이 모든 것이 어불성설이다.

 

부모들이여, 아이들은 엄마, 아빠 그 자체로의 순수함을 원한다. 학원을 정해주고, 과외선생님을 고르고, 입시설명회를 쫓아다니고, 입학사정관에 제출할 이력을 만들어주고, 자신들을 숨 막히게 하는 그런 부모를 능력 있는 부모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부모만이 부모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욕망이 우리 아이들을 멍들게 하고, 한국의 교육현실을 피폐하게 하지는 않는지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

 

진정한 부모의 자격은 순수하고 조건 없는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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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살면서 느끼는 가장 큰 스트레스는 삶과 죽음에 관한 문제이다. 현자들은 평범한 일상에서 죽음의 대한 근심을 갖지 말기를 경고한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우리의 삶이 우리의 뜻대로 되었던가? 마치 수풀이 무성한 곳에서 어딘가 뱀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오싹한 느낌이 우리의 하루를 지배한다. 엄습해오는 불안감의 실체는 분명치 않지만, 공기와 같이 우리 주위를 부유하는 것은 명백하다. 독일의 저명한 사회학자인 울리히 베크 교수는 이와 같이 위험이 일상화된 현대사회를 위험사회라 규정한다. 다시 말해서 위험사회란 예측할 수 없는 위험에 따른 불안감을 늘 품고 사는 사회를 말한다.

 

2014년의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위험사회에 살고 있을까? 오히려 우리의 상황은 재앙사회라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하지 않을까? 울리히 베크에 의하면 위험사회는 위험을 불러일으키는 재앙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성찰하고 재발을 막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재앙사회는 위험한 경고나 재앙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변화 없이 재앙이 반복되는 사회를 말한다. 이에 따르면 2014년의 대한민국은 전 국민을 슬픔에 빠지게 한 세월호사건부터 크고 작은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는 이른바 재앙사회에 가깝다.

 

 

#2.

지난 4.16 이후에 우리 사회에 깊은 반성과 진정성 있는 성찰이 있었던가? 책임과 반성의 사전적 의미는 알 수 있겠지만 이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회적 성찰은 아직까지 보이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고, 책임지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저 책임규명이라는 이유로 몇 사람을 법의 심판대에 기소하고, 관련 조직을 해체하는 법률을 입안했을 뿐이다. 그마저도 의욕부족으로 지지부진하다. 분노의 4. 16 이후에 대한민국의 시계는 멈춰있다.

 

꽃피우지 못한 어린 생명들을 앗아간 세월호 사건에서 우리는 대한민국의 무엇을 보았던가? 국가시스템의 부재, 지도력의 부재, 위기관리시스템의 부재를 비롯한 무정부상태와 무능하고 무력한 몇 사람의 직업정치인들을 보았다. 그리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위험에 노출된 대한민국의 여린 속살을 보았다. 몇 번의 고통스런 기억을 통해 이제 국민은 무책임한 정부와 전문가 집단을 믿지 않는다.

 

책임은 말로 다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한번 무너진 신뢰는 하루아침에 회복할 수 없다. 민방위복장을 착용하고, 사건발생 후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만이 책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국정운영자들의 인식은 여기에 머물러 있다.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한사람의 말은 책임 없는 자리에 있는 백사람의 말보다 우선한다. 그래서 리더십과 더불어 책임감이 강한 지도자가 필요한 까닭이다. 또한 체험적 지식이 결여된 학위만을 가진 전문가는 탁상공론의 전형적인 폐해를 가져온다.

 

우리사회는 6.25이후 빠른 시간 내에 산업화와 고도성장시기를 거친 세계사에 흔치 않는 이력을 갖고 있다. 역동성 있고 빠른 성공신화는 한강의 기적으로 과대 포장돼 현재 우리 사회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다. 우리는 성장에 집착한 나머지 제대로 된 성장통을 겪지 못했다. 질풍노도의 사춘기와 흔들리는 청춘을 거치지 않은 허약한 성인이 되어버린 경우와 같다.

 

모든 사회변동에는 각각의 위험요소가 따른다. 따라서 바람직한 사회라면 다소 늦더라도 예상되는 위험과 그에 대한 극복의 경험을 거치고 가야하는 것이다. 시속 300km의 속도로 달리는 KTX에서 경관을 세밀하게 조망할 수 없듯이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는 각 단계마다 발생하는 위험요소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사회는 빠른 변화를 소망했던 탓에 타산지석의 경험이 없고, 그 경험과 성찰의 부재가 우리사회의 현재를 더욱 위험하게 하고 있다.

 

 

#3.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체에 발생하는 각종의 사건들은 하나의 복잡계를 이룬다. 하나의 복잡계는 더 커다란 체계의 하위체계일 수 있지만 우리는 그 연관성을 궁금해 하지 않는다. 아니 그 상관관계를 모른다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복잡계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사고들이 하나의 법칙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여러 작은 사건들이 모여 하나의 대형사고를 만든다는 하인리히 법칙도 이러한 법칙중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복잡계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세상은 생각보다 단순한 것이라고 한다. 좀 더 적확하게 표현한다면 세상이 운용되는 원리가 단순하다고 할 수 있다. 수학적, 물리학적 논리에 따르면 복잡한 현상을 분석하는 도구의 틀이 명확하면 원인과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하나의 사건을 구성하는 변수를 통제하고, 변수들 간의 네트워크의 상관성을 분석할 수 있다면 그 동일한 사건의 재발은 물론 유사 사건의 재발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회를 구성하는 각각의 변수들도 각 사회마다 다르고, 그 변수로 인한 각종의 사건 사고의 양상과 그 해법도 다양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특정사회마다 발생 가능한 사건에 관한 다양한 경험과 실패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경험적 사실을 체득하지 못함으로 인해 사회구성원을 지켜주는 사회안전망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현재시점의 우리의 불행은 우리의 미진한 과거로부터 오고 있다.

 

 

#4.

울리히 베크 교수는 한국을 특별한 위험사회라고 생각한다. 그 생각의 이면에는 한국이 실질적으로는 재앙사회에 가깝지만 한국사회가 가진 변화가능성을 통해 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다소 우호적인 시선이 깔려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 어떠한 변화가능성이 있을까? 과연 우리는 재앙사회를 탈피하여 위험사회에 머무르고 이를 관리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할까?

 

첫째는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정부와 전문가 집단의 신뢰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국민에 의해 선출된 정치권력의 가장 큰 힘은 국민으로부터 비롯된다. 국민이 신뢰하지 못하는 정부와 정치권력은 무정부상태의 지폐와 같다. 책임을 다하는 정부는 국민을 저버리지 않는다. 또한 전문가 집단은 관련분야에 관한 전문적 식견뿐만이 아니라 체험적 통찰을 하여야 한다. 국민의 신뢰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국정운영자가 책임의 진중함을 통감하여야 한다. 이를 통해 적재적소에 전문성과 책임감을 가진 전문가를 두고, 양자가 머리를 맞대어 위기를 풀어나갈 해법을 강구하고 이를 몸으로 실천하여야 한다. 국민의 믿음은 이로부터 시작된다.

 

둘째는 정교한 위기관리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국민의 안전을 뒤흔드는 사건에서 사후약방문과 우왕좌왕은 눈물과 절망을 낳는다. 안전에 관한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전예방이다. 문제는 어떤 시스템에서 고도의 예측능력을 갖추더라도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때문에 일정한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 이에 대한 정확한 매뉴얼과 행동방안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성수대교 붕괴, 삼품백화점 붕괴, 씨랜드화재 등 국민을 절망케 했던 과거의 고통스런 경험에서도 크게 배우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달라져야 한다. 우리가 경험했던 사건들을 철저히 분석하고, 우리사회에 적용 가능한 선진시스템을 접목하여 한국적인 위기관리시스템을 구축하여야 한다.

 

셋째는 원칙과 규범을 중요시하는 사회적 합의의 도출이다. 사회시스템이 원활하게 작동하기 위한 중요한 전제는 서로 지켜야 할 원칙과 규범을 정하는 것이다. 더불어 각 구성원들이 이러한 원칙과 규범을 준수할 것이 요구된다. 누군가 원칙을 무시하고 규범을 사소하게 위반할 때 나비효과는 발생한다. 온정주의와 조급증에 빠진 우리 사회는 이러한 원칙의 수립과 규범정립에 소홀했고, 그 결과는 비참했다. 이제부터라도 사회 각 분야의 원칙과 규범을 바로 세우는 사회적 합의가 절실하다.

 

넷째는 국민 개개인이 자신의 직분에서 책임을 다하고 주어진 일에 사명감을 갖는 것이다. 한 개인이 스스로의 책임을 다했다면 세월호의 눈물은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업무에 성심을 다하지 못하고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처럼 구차한 변명은 없다. 사회체계는 하나의 커다란 유기체이며 복잡계이다. 시계 속의 작은 부품 하나의 오작동이나 고장 때문에 시계는 멈출 수밖에 없다. 우리 개인 스스로가 자신의 직분에서 성실한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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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부모들이여, 푸르디푸른 십대 때 꽃다운 뜻을 품어본적이 있었던가요?

그 풋풋한 시절에 날카로운 희망에 가슴을 깊이 찔려본적이 있었나요?

하여, 부모들이여, 아름다운 시절에 가졌던 꿈을 지금 이루었나요?

혹여나, 지나간 그 시절에 이란 단어를 떠올리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요?

하면, 못내 아쉬움에 시간의 뒤안길을 돌아다보지는 않았나요?

어젯밤 꿈속에서나, 투명한 소줏잔 속에서 어른거리는 그 꿈의 실체를 보지는 않았나요?

 

누가 이 질문과 대답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우리 모두는 한때 꿈 많은 소년소녀였는데 말이지요. 많은 우리의 부모님들은 보릿고개를 넘고, 산업화의 파도를 힘들게 넘느라 매일 매일 자라는 아이들의 꿈을 몰랐을 테지. 다행히 그때 아이들의 하루는 배고픔과 더불어 미래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 아이들의 가슴은 많이들 비어있었으니까요.

 

우리 아이들은 어떤 꿈을 갖고 어떤 아름다운 뜻을 품고 살고 있을까요?

 

궁금합니다. 성인들도 불편한 이 사회에서, 희망보다는 절망을, 미담보다는 악담을, 배려보다는 경쟁을 먼저 알아버린 우리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스마트폰을 비롯한 각종 편리한 전자기기 속에 파묻히고, 밤늦게까지 학원에서 기계적으로 반복학습을 하는 아이들에게 파릇한 새싹이 돋아날 토양이 남아 있을지 의문입니다.

 

 

#2.

누군가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꿈은 무엇인가요? 대부분 나는 이런 저런 직업을 갖고 싶다라는 대답을 합니다. 꿈은 직업과 동일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닌데 말이지요. 물론 꿈과 성취한 직업이 같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요. 하지만 꿈은 직업이라는 상태의 범주를 벗어난 행위와 실존의 카테고리입니다.

 

문제는 꿈과 직업을 동일시하는 성인과 아이들이 너무 많다는 점입니다. 이는 치열한 경쟁사회가 만들어낸 맹점중 하나입니다. 그러다 보니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선망하는 직장에 취직을 하는 것이 이라는 이름으로 과대 포장됩니. 우리가 진정 바라는 꿈을 담을만한 여유가 그들 가슴속에는 없습니다. 과잉정보와 과잉경쟁이 일반화된 사회에서는 무엇으론가 꽉 채워져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까닭입니다. 여백이 없는 공간에 원하는 물건을 채울 수 없듯이, 여유가 없는 가슴에도 원하는 뜻을 채워넣을 수 없습니다.

 

하여, 잠시 멈추고, 비워두자는 이야기가 선문답을 넘어 시대의 화두가 되는 이유입니다.

 

꿈은 무언가 간절하고, 이루어야 할 뜻이 있고, 가슴에 여유가 있을 때 푸르게 자라납니다.

 

 

#3.

우리 사회의 과도한 경쟁은 아이들이 만든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깊은 성찰 없이 사회시스템을 만들어낸 기성세대 때문이지. 숨 막히는 사회분위기를 만들고 격차가 큰 계층구조를 만들어 내고 있는 어른들에게 아이들이 배울 것은 죽어라고 공부하는 것뿐입니다. 물론 공부만 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그럴듯한 직업을 갖더라도 이 답답한 사회를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는 있습니다. 단지 벗어날 수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직업현장을 떠나 아이들의 교육현장을 돌아봅니다. 정권이 바뀌고 교육부장관이 바뀔 때마다 너무 당연하게 바뀌는 교육정책을 자세히 바라보세요. 거기에 무슨 아이들을 위한 철학이 있고, 이 나라의 백년을 내다보는 혜안이 있습니까? 외국에서 몇 년 공부해 교육공학 학위를 받아온 기술자나 이론적으로나 체험적으로도 미숙한 탁상관료들이 만들어 낸 조잡한 정책이 있을 뿐입니다. 일명 좀비양산 프로그램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피조물에 아이들이 맞춰지기를 바라는 어리석은 미신을 품습니다. 하지만 정권은 유한하고, 교육부장관은 단명하고 남는 것은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주어진 혼란뿐입니다. 일례로 대한민국에서 입학사정관은 웃기는 얘깁니다.

 

우왕좌왕하는 교육현장, 죽어라고 공부하지 않으면 뒤떨어질 수밖에 없는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사교육시장의 상인들과 독서실의 원장밖에 없습니다. 부모들도 경쟁에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피로사회의 주인공이 됩니다. 충혈된 눈으로는 아이들의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여유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아이들에게 희망, , 아름다운 뜻이 자라날 수 있을까요? 아이들에게 암기식 공부할 시간을 줄여주고, 삶의 양분이 되는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늘려주는 정책을 만들 수는 없을까요? 자기 생각 없이 10대를 보낸다면, 그 다음 20, 30대에는 생각이 저절로 만들어지나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복마전 같은 20대의 취업시즌과 대략 난감한 30대의 결혼시즌에서 또다시 홍역을 치르느라 자기생각을 만들어낼 겨를이 없지요. 오히려 정체성 없는 사회에 대한 분노만 키우고 맙니다.

 

 

#4. 잠시, 삼천포로 빠지면

요새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직업체험을 시작합니다. 당연 학교 과제물이죠. 다양한 직업세계를 미리 알아보고 조사하고 체험하라는 의미에서 일면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부모의 직업이나 소득수준에 따라서 아이들이 체험할 수 있는 직업은 한계가 지워집니다. 소득이 높은 직업에 종사하는 부모들은 자신의 직업이나 유사 직업의 소개를 통해 아이들의 눈높이를 높이고자 합니다. 반면 소득이 낮거나 사회적 인지도가 낮은 직업에 종사하는 부모들은 자신의 직업을 소개하는 것조차 꺼려합니다. 부모의 직업이나 소득수준에 따라서 직업체험의 편차가 발생하는 문제점은 어떻게 볼 것인가요? 이는 직업의 대물림까지는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그 편차가 빚어낼 결과물 때문에 속내가 불편한 것은 사실입니다.

 

아이들은 보고 듣는 대로 자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철학을 가진 고품질의 교육이 중요하고, 공동체를 조망할 수 있는 체험학습이 높은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러한 교육프로그램에 대한 깊은 고민이 부족합니다. 결국은 좋은 의도가 바람직한 결과를 빚어내지 못합니다.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교육당국에서는 핀란드식이니 아일랜드식이니 무늬를 바꿔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만들어 시행하고 있지만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실질적이지는 않습니다. 예산 문제니 전문가 확충이 문제니 하면서 졸속으로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회구조적인 한계는 시스템적 반성을 불러오기보다는 종국적으로는 한 가정의 문제로 다시 환원됩니다. 결국 부모의 책임이고, 부모의 문제라라는 얘깁니다.

 

 

#5.

우리 아이들에게 어떻게 꿈의 새싹을 틔울 수 있을까요?

아니, 어떻게 아이들이 꿈을 꿀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요?

해답은 꿈이 자랄 수 있는 양질의 토양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양질의 토양은 어떻게 생겨날까요?

 

이 어려운 질문의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우리사회가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하는 사회는 아주 나쁜 사회입니다. 교육문제 또한 부모들에게 부담을 줄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는 부정의를 넘어 부당하기까지 합니다. 국가나 정치사회 시스템이 존재하는 이유는 구성원의 안전과 행복에 그 본질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구성원이 국가나 사회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불행하다면 그 구성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를 운영하는 사람, 사회시스템을 조정하는 사람들의 문제라는 겁니다.

 

아이들은 생각을 낳는 좋은 책을 읽고, 배움이 될 만한 사례들을 많이 접할 수 있는 체험의 공간이 제공되면 자연스럽게 꿈을 꿉니다. 숨 막히는 학교시간표, 치열한 시험의 연속, 학대에 가까운 이중언어 습득의 공포, 사교육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공교육의 부실로 인해 아이들은 메말라갑니다.

 

과거 핀란드나 아일랜드도 자살문제나 교육문제가 큰 사회적 문제였던 적이 있는 나라들입니다. 현재는 어떠한가요? 교육시스템과 사회안전망에서 세계적인 모범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 현저한 개선의 이면에는 문제 있는 사회시스템을 바꾸고자 노력했던 정치인들과 전문가들, 그리고 사회적 합의가 있었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려울까요? 우리에게는 없는 그 무언가가 그들에게만 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현재의 우리가 그들과 다른 것은,

 

우리사회가 가진 근시안적 조급증, 미래를 내다보는 교육철학의 부재, 졸속정책에 대한 진지한 반성적 고려의 부족, 사회적 합의도출을 위한 노력의 부족, 정치인과 교육관료들의 문화적 사대주의. 이것들은 우리가 과감히 버려야할 과거의 유산입니다. 하지만 말이 쉽지 이것들은 하루아침에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상당한 시간을, 진지한 반성을 토대로 전문가, 정치권 및 공무원, 국민적 합의가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무조건 핀란드의 정책을 도입하면 한국의 아이들이 쉽게 적응할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핀란드의 교육정책이 꽃피우는 것은 핀란드의 사회현실을 토대로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의 체질개선 없이는 종국적으로는 귤화위지가 되고 말 것입니. 먼저 한국적인 교육문제를 냉정히 분석판단해보고 그 토대위에 외국의 선진화된 교육정책의 도입필요성을 논의해도 늦지 않습니. 우리의 답답한 교육정책이 환골탈태가 가능하다면 굳이 외국의 제도를 수입해야할 필요는 없으니까.

 

우리의 분노수준을 높여주는 이 문제의 구체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지요.

 

 

#6.

양질의 토양을 만들기 위해 우리 부모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첫째는, 공부시간 이외에 여유시간을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여유시간이란 놀 수 있는 시간, 비어있는 시간을 말합니다. 여유 있는 시간이 있어야 교실을 벗어나 세상을 바라보고, 자연을 느끼고, 타인들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그로부터 비롯되는 의문과 고민과 생각을 위해 다양한 책을 읽을 수밖에 없고, 풀리지 않은 어떤 것들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대화를 시도할 것입니다. 아이들이 가진 생체에너지가 공부하는 데만 소용되어질 때 아이들은 행복을 못 느낍니다. 열려진 공간에서 마음껏 뛰놀고, 소리 지르고 에너지를 여러 방향으로 발산할 때 아이들은 살아있음의 진정한 의미를 느낄 것입니다. 예체능과목 수업시간이 줄고, 학원이 아니면 함께 놀 친구가 없고, 공부라는 하나의 기준에서 성적순위만이 유일한 평가기준이 되는 이 교육현실이 부모들은 반갑습니까?

 

둘째는, 아이들의 사교육 의존도를 낮춰주어야 합니다. 학원을 끊어버리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아이의 자존감을 높여줄 수 있는 부모의 관심과 노력이 있다면 아이들은 스스로 자기인생의 주체가 됩니다. 특히 공부에 있어서는 알아서 자기주도학습을 하게 된다는 거죠. 수동적인 학습이라는 타성에 젖게 되면 암기된 공부만 남게 되고 공부하는 주체는 소외됩니다. 스스로 학습방법과 학습량을 결정하고, 자신의 노력한 결과에 만족할 줄 알게 되면서 아이들은 정신적인 성장을 합니다. 그러한 성장은 직업이라는 좁은 범주를 뛰어넘어 인생이라는 여행에서 진짜 하고 싶은 꿈을 발견하고 자라게 할 것입니다.

 

셋째는, 책을 읽을 수 있고, 세상과 공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부모들이 청소년일 때 가장 후회되는 것이 무엇이었나요? 공부라고 대답하는 분은 거의 없습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부모들은 독서와 부모와의 대화의 부족이라고 말합니다. 책은 인간에게 생각을 일깨우고, 그것을 크게 하고, 또 다른 새로운 생각을 창조하게 합니다. 어느 비범한 천재도 하늘아래 새로운 것을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시간이 만들어 논 동서양의 고전과 양서를 통해 현자들은 하나의 발자취를 남깁니다. 또한 책은 세상과 공감할 수 있는 최고의 도구입니다. 책 한권을 통한 간접체험의 힘은 주변의 평범한 인간관계에서는 얻지 못할 지혜를 주기도 합니다. 책을 많이 읽고, 사색할 수 있는 가족 공동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합니다. 세상을 올곧게 바라보고, 가슴으로 세상을 안을 수 있는 힘도 여기에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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