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때 천사였다. 아니 천사였을 것이다. 흔히들 말하는 천국이 아닌 순수한 영혼이 모여 사는 천사의 나라. 난 그곳에서 살고 있다가 엄마의 간절한 부름을 받아 엄마에게로 왔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빠를 통해 엄마에게로 왔다. 모든 빛과 모든 색상이 존재하는 그 곳에서의 기억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내가 천사였다는 사실은 내 천진난만한 미소에 남아있다. 사람들은 내 미소와 눈망울을 보고는 천사의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눈치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래서 엄마는 나에게 주문을 하곤 한다.

엄마에게 사랑의 하트를 날려봐

나는 한 눈을 찡긋 감고(실제로는 두 눈을 감고), 두 손으로 작은 하트를 만들어 발사시키면 주위의 모든 사람은 쓰러지고야 만다. 마치 큐피드의 화살이라도 맞은 것처럼. 나는 그들에게 입술을 둥글게 내밀어 온기를 불어넣고 천사의 사랑을 일깨워준다.

 

빅뱅이론은 우주의 탄생을 설명하는 이론임을 나는 알고 있다. 위대한 이 이론이 어찌 우주의 탄생만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모든 인간은 하나의 소우주임을 나는 안다. 나 또한 천사의 신분에서 인간으로 변화할 때 이 이론의 도움을 받았다. 이른바 엄마 아빠의 감정의 폭발. 그 것은 어떠한 감정보다 위대했으며 값진 결과를 낳았다. 우리는 그 감정을 사랑이라고 부르는데, 천사들은 누구보다 사랑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천사의 기억을 머금은 젖먹이 시절 우리는 옹알이로 부모의 행위에 반응한다. 부모들은 자신의 눈빛과 손짓에 반응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속에 깃든 사랑의 감정에 반응한 것이었다.

 

감정의 대폭발을 거친 육체는 열정과 환희를 꿈꾼다. 엄마와 아빠는 사랑의 기쁨이 넘치는 작고 소란스런 행위를 통해 나를 불러내는 신기한 재주를 가졌다.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비밀스런 행위를 통해 잠자고 있던 나의 영혼은 깨어났다. 그동안 오랜 시간을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우리 천사들은 한 가지를 빼고는 모든 것을 가졌다. 가족이라는 명사. 그래서 천사들에게 꿈이 있다면, 행복한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불러준 우리 엄마, 아빠에게 감사드린다. 그리고 누나들과 형에게도. 앞으로 몇 년 동안 그들은 나로 인해 사랑과 감동으로 충만한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부모와 가족이라는 이름이 가져다주는 그 무한한 기쁨. 물론 그 뒤로는 이를 보장해주지는 못할 수도 있지만.

 

현재의 내 이름이 지어지기 전, 사람들은 나를 길동이라 불렀다. 혹자는 강동구 길동에서 낳은 것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지만, 그 것은 아니다. 2월의 어느 새벽 송파구에 위치한 저명한 산부인과 병원 앞 인도에서 나는 첫울음을 터뜨렸다. 나를 받아낸 산파는 의사가 아닌 레깅스라는 분이었고, 라면을 먹고 귀가하는 이름 모를 취객의 도움(간호사를 불러왔다고 한다)도 받았다. 엄마가 정신줄을 놓은 상황 속에서도 침착함과 유연성을 잃지 않았던 레깅스라는 분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 당시 길을 지나던 여러 사람들도 어쩔 줄 몰라 했었다는 후문이다. 그들에게는 살면서 두 번 보기 힘든 광경이었으리라.

 

아홉 살 먹은 형은 학교가기 싫은 날이면 배가 아프다고 한다. 나는 다 안다. 나도 어린이집이 가기 싫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침마다 묻는다.

엄마, 아빠, 오늘 어린이집 가는 날이야? 안가는 날이야?”

돌아오는 대답은 늘 그렇듯이 실망스럽게도,

, 어린이집 가는 날이야! 얼른 치카치카하고 옷 입자

이때는 천사시절에 익혔던 애교가 덩어리로 발사돼도 통하지 않고, 결과는 유모차 탑승이다. 천사의 미소도 통하지 않는 세상의 실망스런 규칙이 있는가보다.

 

천사의 나라엔 온갖 신화가 있다. 그 중에서도 곰에 관한 신화도 있는데, 인간 세상에도 곰에 관한 이야기가 존재하고 있었다. 비록 세 마리밖에 등장하지 않지만. 그래서 나는 천사 때의 기억을 되살려 곰 세 마리라는 동화를 노래로 열심히 부른다. 그런데 왜 아빠곰은 늘 뚱뚱하고 엄마곰은 날씬한지 의문이다. 내가 몇 년 동안 봤던 현실은 정반대가 많았다.

 

엄마는 나에게 내가 좋아하는 멍멍이와 같은 강아지라는 별명을 부른다. 아니 천사의 윙크와 미소를 가진 나를 멍멍이에 비유하다니, 분명 이건 나에 대한 모독이다. 하지만 강아지라는 말도 우리 강아지, 우리 강아지라고 자꾸 듣다보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 스스로 보물 강아지로 부르게 했다. 이왕이면 보물강아지가 더 좋지 않은가? 주위에서 보물강아지로 불리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렇다. 난 우리 집에 엄마, 아빠의 부름을 받고 온 네 번째 천사이자 유일한 보물강아지다. 나는 서열상 22남 중 막내이지만, 우리 가족 중에서는 슈퍼 갑이다. 네 살 먹은 세상에서는 아무도 나를 이길 수 없다. 그리하여 아빠는 슈퍼 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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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엄마, 아빠가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일(주로 반찬, 청소, 말투 등)로 말다툼이 있었다.

 

엄마는 왜 그게 문제가 되냐고?”

아빠는 그것이 문제가 안 되면 뭐가 중요한 문제냐고?”

 

엄마는 남자가 그런 것은 대충 넘어가지, 아무것도 아닌 것을 문제 삼어?”

아빠는 그러면 당신한테 중요한 문제는 무엇인지 나를 이해시켜봐

 

엄마는 멀 이해를 시켜, 척하면 알아야지. 꼭 이야기해야 알겠어?”

아빠는 나랑 18년을 살고도 아직까지 나를 이해 못해, 내가 허수아비랑 살고 있는 건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막내인 네 살배기는 분위기가 수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간파하고 엄마에게 있는 애교 없는 아양을 다 떨려고 노력해본다. 살살 눈웃음을 치면서 엄마 품을 파고들었으나, 아빠랑 감정싸움에 짜증이 날대로 난 엄마는 오히려 네 살배기에게 화풀이를 한다.

 

, 생긴 것은 꼭 지 애비 닮아가지고, 저리 가. 느그 아빠한테나 가

 

엄마의 예상 밖의 반응에 놀란 네 살배기는 눈만 껌벅거리며 갑자기 몸이 굳었다가 아빠한테 달려간다. 그러면서도 엄마 품에 대한 아쉬움을 떨치지 못한다.

 

 

#2.

삼십년, 사십년 전에는 이런 풍경은 흔했다. 동네방네 사랑싸움도 아닌 지지리도 못난 감정싸움 때문에 집집마다 아이들은 경기를 일으키곤 했다. 말다툼이 좀 커지면 밥상이 방에서 부엌으로 날아다니곤 했다. 그래서 그때는 장날마다 상고치는 사람이 부러진 상다리를 수선하는 재미를 보곤 했다. 이건 옛날 얘기다. 하지만 그때 밥상 주변에서 서성이던 아이들은 다 기억한다. 날아간 밥상 때문에 못 먹었던 밥도 국도 다 아쉬웠다. 배도 고팠고 마음도 아팠다.

 

그런 아이들의 마음을 부모들은 잘 몰랐다. 왜냐고? 부모들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기 때문에.

 

현재의 부모들은 자신의 부모들보다 덜 싸우기는 하지만 여전히 말다툼을 피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어쩌면 인간의 본성이나 부부의 본질 속에 분쟁의 속성이 담겨있는지도 모르겠다. 부부만큼이나 쉽게 이야기하고 속내를 드러내기 쉬운 인간관계도 없다. 그만큼 편안 사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서로에 대한 조심성이 없다. 사소한 감정도 쉽게 드러내고 결국은 그것 때문에 다시 분쟁이 야기된다.

 

부부는 어떠한 문제에 관해서든지 말다툼을 할 수 있고, 자신의 감정 상태에 충실해서 상대방을 설득할 수도 있다. 부부관계에 어찌 이성적인 판단과 냉철한 분석에 기한 생활만이 존재하겠는가? 전직 대통령을 지낸 어떤 분도 밥상에서 배우자님이랑 수없이 싸웠다지 않는가? “어째 오늘은 찌개가 좀 짜네. 자네 말수가 없는 것을 보니 나한테 감정 있는가?” 하면서 말이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로 끝날 수 있으나, 이 싸움을 관전하는 아이들은 물 베기로 끝나지 않는다. 아이의 성장단계에 따라서 부모의 다툼에 대한 반응은 다양할 것이나, 아직 감정처리에 성숙하지 못한 아이들은 작은 상처를 입거나 커다란 분노를 배우기도 한다. 말다툼에서 비롯되는 언어에 고상한 교양과 고품격의 매너가 끼어들었다는 얘기는 아직까지 들어본 적이 없다. 결국 상처를 주거나 선하지 못한 말들이 오갈 수밖에 없는 고성의 현장에서 아이들은 심박동이 빨라지고 불안감이 커질 수밖에 없다.

 

 

#3.

어찌되었건, 다음날 엄마는 네 살배기를 데리고 어린이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평소에 말이 많던 네 살배기가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말이 없었다. 엄마는 영문도 모르고 이를 궁금해 하던 차에, 아이가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어젯밤에는 내 마음이 세모마음이 되어버렸어

 

엄마는 세모마음이라는 의미를 바로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의미를 깨닫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젯밤에 벌어진 사단 때문에 아이가 자신의 마음이 동그란 마음에서 세모마음이 되었다는 표현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부모의 말다툼과 엄마의 표현이 네 살배기를 불편하게 했다는 의미였다. 네 살짜리다운 표현이었다.

 

아무튼 네 살배기의 입에서 세모마음을 들었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엄마 아빠의 말다툼이 그냥 지나가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잊혀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런 것이 아니었다. 집안에서 일어나는 작은 사건이나 사단도 아이에게는 충분히 불편한 상황일 수 있고, 그 것이 아이마음에 무엇인가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나 어린 시절은 부모로부터 영향이 절대적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이의 나이가 어릴수록 부모와의 감정견련성이 크다. 부모 입장에서는 부모의 다툼이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과소평가되기 쉬우나, 아이들 입장에서는 쉽게 지워지기 않는 마음의 생채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부모가 사소한 다툼이라도 아이들에게 보여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하지만 우리의 부모들이 이 점을 소홀히 했듯이 현재의 부모들인 우리들도 많이들 이 점을 잊고 살아가고 있다.

 

 

#4.

엄마, 이젠 내 마음이 다시 동그래졌어.”

 

어린이집에서 네 살배기를 데리고 돌아오는 도중에 엄마는 이 말을 들었다. 멀리 초승달이 수줍게 웃고 있었고, 엄마 마음속의 불편함도 눈 녹듯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렇다. 아이들이 가지는 마음의 모양은 세모나 네모가 되어서는 안 되고, 동그란 모양을 가져야 한다. 동그란 마음.

 

아이들은 그렇게 동그란 마음으로 세상을 동글동글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상처로 인해 마음이 세모나 네모가 되어 각진 마음을 갖게 되면 세상도 각지게 보일 수밖에 없다. 아이들 마음을 동그란 마음으로 키워줄지 아니면 세모마음으로 아프게 할지는 우리 부모들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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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은 늘 가까이 있다. 몸과 정신에 대한 분별, 속과 겉에 대한 분별, 사랑과 미움에 대한 분별처럼. 하지만 오늘 저녁은 그 분별을 잊고, 아니 잃어버려 혼란스럽다. 내 몸과 영혼이 분별을 잃었다. 차가운 내 몸을 바라보는 내 영혼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생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분별이었기 때문이다. 생과 사에 대한 깨달음이 시작되는 또 다른 분별이다. 그럼 이제 내가 살아있지 않은 것인가?

 

멀리 빛이 보인다. 나는 저녁을 먹고 있었고, 오래전 세상을 떠난 부모의 얼굴이 나를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안타가운 손짓으로 거친 손사래를 치며 나를 말린다. 그들에게 제사를 올릴 때마다 영정사진 속에서 기억은 하나씩 잃어가고 있었다. 그들이 나를 말리는 것은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직은 이르다는 것일 터인데,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이제는 모든 것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살아온 모든 것들이 착각이었던가. 짧은 시간동안 오래전 기억부터 최근의 내 마음까지 모두 내 생각의 통로를 지나고 있다. 천천히 멀어져가는 봄 아지랑이처럼 아스라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짧고 강열한 전율이 영혼의 핏줄을 떨리게 한다. 마음이 아리게 아프다.

 

어느 때인지 자세한 기억은 없다. 그때 양복을 입고 찍은 내 사진이 영정사진이 될 줄, 그때는 몰랐었다. 좀 더 환하게 웃을걸. 좀 더 따뜻한 시선으로 아내와 아이들을 바라보았으면 좋았을 걸. 모든 후회는 항상 나중에 온다지만. 이번 후회는 너무 늦었다. 그들에게 용서를 빌 시간도 이제는 허용되지 않는다. 함께 했던 시간보다 함께 하지 못할 시간들에 대해 그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데. 그들이 내 마음을 이해할까. 두려운 마음이 장막처럼 나를 감싼다. 그럼에도 나는 남겨진 가족들에게 용서를 구한다.

 

안경을 쓴 영정사진은 나조차도 낯설어 보인다. 검은 상복을 입은 이들이 외딴 섬처럼 점점이 떠있다.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원래 외로운 섬이다. 한때는 엉겨서 붙어살기도 하고, 영영 떠나버려 정처 없는 섬도 있다. 나로 인해, 내가 낳은 섬들이 보인다. 그들의 탯줄을 자르고 숨결을 불어넣던 기억이 새로 돋아난 새싹 같다. 그들로 인해 내가 얻었던 세상의 기쁨을 말도 다할 수는 없다. 그들에게 자잘한 애정표현마저도 다하지 못하였다. 속내를 감춰두는 것이 미덕이 아니었는데, 나는 아직까지도 그 고마움을 마음속에서 꺼내지 못하고 있다. 진정 미안하다.

 

맏상주인 아들의 눈빛은 오늘따라 유난히 할 말이 많아 보인다. 과묵하게 다문 입이 더 무겁게 느껴진다. 속으로 삼킨 눈물이 어찌 서럽지 않을까. 그래서 아들의 숨겨진 슬픔 때문에 내 마음은 더욱 무거워진다. 그 아들의 아들, 그러니까 손자가 나를 보고 웃는다. 아직은 할아버지의 부재를 몸소 깨달을 수 없는 나이다. 그에게 나의 부재는 하나의 일상일 수밖에 없다. 아홉 살 먹은 조카손자가 나를 위해 향을 사르고, 거듭 거듭 절을 한다. 죽음이라는 의미를 알 수는 없겠지만 이 의식이 가져다주는 슬픔은 알고 있는 눈치다. 그래서 그가 보내준 인사가 고맙고 또 고맙다.

 

멀리 캐나다에서 오는 비행기는 아직 태평양 상공에서 날짜변경선을 넘지 못하고 있다. 누군가 보이지 않게 흘린 눈물이 태평양에 작은 파문을 일으킨다. 드문드문 흩뿌려진 작은 섬들이 시야에서 급히 사라진다. 난기류에 접어들지 않았음에도 기체는 작은 어깨의 흐느낌에 흔들린다. 조급한 마음이야 이미 태평양을 몇 번이나 건넜으리라. 몸이 느끼는 슬픔보다 마음이 느끼는 서글픔이 먼저 날아온다. 나의 고통을 통해 나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

 

나를 위한 마지막 의식은 나흘이나 이어져 왔다. 일부 직계가족의 부재는 나의 소멸을 하루 더 늦추고 있다. 평생은 기다려왔을 이 적막한 순간에 나는 눈을 감지 못하고 있다. 나흘 동안 그들도 나처럼 잠도 못 이루고 있다. 충혈된 눈동자가 나를 더 슬프게 한다. 육친의 정은 이토록 깊고 넓은 것임을 왜 예전에는 몰랐을까. 그들이 보여준 참다운 슬픔에 대해 나는 할 말이 없다. 진정 고맙다.

 

한 가지에 난 누이들과 동생들의 가슴에 멍이 들었다. 실핏줄이 불거진 눈동자에는 한여름 밤의 강물이 흐른다. 어느 가을날 내장산에서 보았던 붉은 애기단풍만큼이나 애달픈 서러움이 낮게 깔린다. 해가 저물고 그들이 마지막 눈인사를 보냈지만 나는 애써 못본척하고 만다. 어느 해인가 어머니를 영계로 떠나보내고 처음 맞이한 생신날 느꼈던 비통함을 그들도 공감한 것일까. 그들의 술잔에 흘러넘치게 술을 따른다. 쓰디 쓴 술잔이 달디 달도록.

 

조급한 발걸음이 내 딸의 것인 줄 알았다. 그가 걸어온 발걸음의 수를 하나하나 헤아리고 있다. 이것이 내 마지막 기억이 될 수도 있어 내 딸이 격하게 내놓은 울음의 개수를 기억하고자 한다. 속절없는 안타까움은 부녀의 인연의 끈을 쉽게 놓지 못한다. 무엇이 급한지 나와 눈을 맞추지도 못한다. 무엇이 그리 미안한지 미안해, 미안해하고 거듭 고백한다. 머리를 들지 못하고 몸은 바닥에 낙엽처럼 눕는다. 처량하게 젖은 목소리가 침묵을 삼킨다. 눈물이 가진 힘이 또 블랙홀을 만들고 내 마음은 텅 빈 우주와 같다. 내 사랑하는 딸이 무어가 미안할까. 오히려 더 사랑해주지 못한 내가 더 미안하지.

 

태평양을 딸과 함께 날아온 두 사람 중 한사람. 40년 결혼생활을 함께한 여인이 오늘따라 외로워 보인다. 내 인생의 혁명과 같은 사랑을 일깨워준 그녀에게 내가 무슨 위로를 할까. 무슨 말을 건네며 앞으로의 생에 대하여 이야기할까. 이미 커버린 아들딸을 대신한 손주를 키우는 재미에 대해 어떻게 그 즐거움을 다시 나눌까. 말수가 적은 나를 위해 그녀가 풀어준 수많은 말들의 향수를 내가 어찌 잊을까. 허약한 나를 위해 붕어즙과 보약을 고던 그녀의 하얀 손길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다시 한 번만이라도 만져볼 수 있을까. 그 여인을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가족들은 나의 부재를 생각하겠지. 제사상 위에 어색한 얼굴의 내영정이 걸리고, 나는 또 내 생전의 기억을 떠올리겠지. 푸른 나뭇잎같은 수많은 생전의 기억을 내 영혼이 기억하고 있다. 무등산의 일출, 광주 댐에서 붕어낚시, 딸의 결혼식, 아들의 대학입학식, 월남에서의 달빛아래 전투, 생과 사는 늘 함께 했었다는 것을 이제 알겠다. 모든 게 소중하다는 것도.

 

나한테 음복은 과한거지. 평생 분에 넘치는 술잔을 기울였음에. 어느 날은 아침부터 소주잔이 나를 삶의 활기로 이끌었고, 어느 날은 낚시터에서 피라미라면과 소주잔이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늘 술잔을 비우면 별 하나가 떨어져 가슴속에 긴 꼬리를 남기곤 했다. 별자리를 대신한 수많은 술 취한 밤에 나는 누구에게 가족의 행복을 빌었을까. 그때도, 지금도 소중한 이들에게 이제는 내가 그들의 행복을 빌어야 한다.

 

그래, 빛이 가까워지고 있다. 멀리 있던 등대가 마지막 항로를 비춰주는 것처럼. 머지않아 나의 육신은 분별을 넘어 분토되어 흩어질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지닌 기억은, 내가 살아온 기쁨의 흔적은 내 가슴에 영원토록 안고 갈 것이다. 지구라는 별에서 내 소우주를 가능케 했던 작은 섬들의 추억과 행복의 조각들을 영원의 기억속에 지니고 있을 것이다. 다음에, 아주 나중에 그대들을 다시 만날 때 다시 꺼내볼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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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플스테이

    

산 그림자 잠들어 고요하다

산문 밖 어미를 찾아 헤매는

노루울음은 어제의 절망을 꾸짖고

새벽 네 시는 홀로 깨어나

미련에 휩싸인 홑이불을 헤집는다

맑은 울음으로 침묵을 깨뜨린 종소리는

면벽한 노승의 손끝에 적시어오고

정적에 갇힌 어둠의 시간은 물비늘을

내려놓고 염주 속으로 적멸해간다

목어에 울림의 경()을 풀어놓은

솔바람은 떨어지는 별빛에

귀를 기울이고, 선방의 창문은

죽비소리에 서둘러 불을 밝힌다

무위(無爲)를 향해 거듭 무릎을 꺾던

108배는 여운에 겨워 눈뜨지 못하고

솔향에 연잎밥 느리게 물 말은 발우공양은

검은콩 밥알 한 알 한 알에

아프게 잊혀 간 전생의 사랑을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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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능을 치르고도 밤잠을 못 이루는 학생들과 부모들이 많다고 한다. 몇 일전 그 문제의 수능점수가 발표됐다. 예상했던 대로 물수능이란다. 한두 문제 때문에 과목별 등급이 달라지는 해괴망측한 사태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 한두 문제가 학생들의 수준이 다르다는 것을 누가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안타깝기 그지없다.

 

하여, 불안한 부모들은 오늘도 무료 입시설명회에 줄을 서고, 고액 입시컨설팅업체에 전화를 한다. 지푸라기라도 잡아보고 싶은 심정에. 부족하고 모자란 점수 때문에 수시로 눈을 돌려보는 부모들. 하지만, 누가 만들었는지 이렇게 복잡한 전형이 있을까? 전형절차 중 항목상의 상관성이나 각 지표간의 유의미한 결론이 과연 가능할까? 입학사정관의 통찰이 준비된 수험생의 성실성을 꿰뚫을 수 있을까? 일부 부모들이 만든 만들어진 상장과 성과는 구별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 입학사정관은 전문성이 갖춰져 있을까?

 

허점투성이의 시스템이 불러들인 결론은 사교육시장의 부흥이다. 왜 우리의 교육당국자들은 하는 일마다 공교육부실과 사교육시장 배불리기를 동시에 가능케 하는 능력을 갖추었을까? 진정 그 능력이 아깝다. 짜고 치는 고스톱도 아닌데, 아무튼 기가 막힐 노릇이다.

 

 

#2.

그러나, 우리 집은 멀리 있는 수능이 아니라 발등의 불인 기말고사가 문제다. 2인 큰딸이 이번 주부터 기말고사를 치른다고 한다. 온 가족이 비상체제에 들어갔다. 네 살배기 막내도 정숙을 요하는 놀이를 하고,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셋째는 묵언수행중이다. 엄마 아빠는 일단 큰딸의 비위를 거스를 가능성이 있는 질문을 하지 않은 것을 원칙으로 한다.

 

벼락치기에 능했던 아빠는 큰딸의 시험공부하는 방법에 늘 의문을 갖는다. 복습과 반복학습을 그토록 강조했건만, 막상 시험공부하는 딸의 모습 속에는 생소하고 난해한 학문을 하는 초짜의 진지한 모습뿐이다. 투입 대비 산출의 경제적 효율성이 떨어지게 보인다. 각 과목마다 자기 학습방법을 생각하라고 했건만, 그 역시도 말한 사람 입만 아프다.

 

하지만 아빠도 공부하는 딸의 진지한 모습에서 고민스럽다. 가장 바람직한 공부방법은 자기만의 방식인데도 자꾸 딸에게 아빠가 생각하는 공부방식을 주입하려고 한다. 아빠가 생각할때 가장 경제적인 시험공부는 시험 직전의 벼락치기다. 이는 경제적 효율성면에서는 탁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장기적인 기억이나 보다 큰 시험에서는 취약한 공부방법이라 결코 추천할 수는 없다. 아빠는 그것을 잘 알기 때문에 좋은 습관을 들이는 공부방법을 계속 잔소리처럼 조언하고 있다.

 

대부분의 좋은 결과는 자신에게 맞는 좋은 습관과 반복의지에서 나온다. 중고등학교 공부나 대학교 공부, 각종 취업시험이나 고시공부에 있어서도 이 원칙은 타당하다. 문제는 우리집 큰딸이 이 보편타당한 원칙을 이해하고 있는가가 관건이다. 우리는 왜, 인생에 있어 중요한 깨달음을 늘 시간이 지나간 다음에 얻는지 모르겠다. 이 또한 하나의 원칙인지도 모를 일이.

 

 

#3.

요즈음 학생들은 중간고사나 기말고사시험일 이전 한 달도 전에 시험준비를 시작한다. 특히 선행학습과 무한반복을 중시하는 학원시스템에서 키워진 아이들의 평균성적은 기대이상이다. 문제는 사교육비용과 아이들 스스로의 자생력이다. 학원 종합반과 영수 전문학원의 교습비용은 부모의 허리를 휘게 한다.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는 고1인 아들의 사교육비로 한 달180만원을 지출하고 있다. 이는 누군가의 월급이다.

 

더 큰 문제는 자기주도성이 결여된 상태에서 반복학습으로 길러진 문제풀이 능력은 시험성적은 오르게 할지언정 아이 스스로 자생력을 키우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개인차에 따른 개별성과 예외성은 있다.

 

어찌되었건, 우리 큰딸은 오늘밤도 혼자서 교과서와 참고서를 뒤적이고 있다. 다니는 학원이 없기 때문에 예상문제 강의나 과도한 반복의 폐해는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이다. 큰딸의 방은 새벽 1시까지 불이 꺼지지 않고 있다. 덕분에 아빠도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책을 보고 있. 아침에도 혹여 큰딸이 알람소리를 놓칠까 두려워 먼저 일어나 아이를 깨운다.

 

아무튼 한사람이 시험을 치르면 온 가족이 시험준비를 한다. 그게 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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