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착한 사람의 변명

 

어느 시인이 말했지

곡선이 이기는 것이라고

그래서 우아하게 돌아갔다

아주 많이 늦었다

 

어느 교수가 말했지

흔들려야 청춘이라고

그래서 수없이 흔들렸다

없는 멀미가 생겼다

 

어느 스님이 말했지

멈추면 비로소 보일 것이라고

그래서 오랫동안 멈추었다

앞서가는 이들의 뒷모습만 보였다

 

다른 어느 교수가 말했지

노는 만큼 성공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열심히 놀았다

계속 놀 것 같다

 

어느 정치인이 말했지

저녁이 있는 삶을 살라고

그래서 일찍 들어갔다

가족들이 돌아오지 못했다

 

어느 이상한 정치인이 말했지

모든 것을 주어야 한다고

그래서 무엇을 줄 것인지 생각했다

줄게 별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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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말합니다.

이 세상은 말 잘하는 사람들의 세상이라고

착한 사람들은 그 말을 믿었습니다.

좋은 말을 하는 사람들을 믿는 것이 그들의 신념이었으므로

하지만 그들의 믿음만큼 세상은 순진하거나 착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말 속에 숨은 진실을 발견하지 못했기에

아니 진실을 찾아낼 수 없었기에

착한 사람들은 자기를 위한 변명이 필요했습니다.

 

오늘도 누군가는 역사교과서를 핑계로 역사를 바꾸고자 합니다.

아무리 착한 사람들일지라도 이 말만큼은 믿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살다보면 변명이 필요하지 않는 믿음과 선택도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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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배경도 다르고 별로 친하지 않은 사십대 후반의 두 아빠(대치동 아빠, 그냥 아빠)가 맥주집에서 만났다. 어차피 코드가 맞지 않는 두 사람인지라 그들의 대화는 맥주집 사장과 친해 공짜 술을 좋아하는 풍납동 아빠가 사회를 보면서 진행됐다. 주제는 서로 공감이 가능한 아이들 교육문제를 둘러싼 이야기부터 먼저 나누기로 했다. 오늘의 주제는 최근 뜨거운 감자인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문제점이다.

* 약칭 (풍납동 아빠 : 사, 대치동 아빠 : , 그냥 아빠 : 그, 호프집 사장님 : 호)

 

저번 모임에 많은 관심을 보였던 오십대 호프집 사장님도 맥주잔을 들고 대화에 동참하는 것으로 서로가 합의하였고, 그 대가는 공짜 맥주 석 잔이었다. 오늘 안주는 골뱅이무침과 먹태다.

 

: 오늘 두 번째 만남이죠? 반갑네요. 며칠 동 지내셨나요? 저번에는 처음이라 서로가 낯설기도 조심스러워서 대화가 불편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 아빠들에게 자녀교육이라는 주제는 자신의 가치관에 관계없이 대화할 수 있는 이야기꺼리입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꺼내기 어려운 주제에 관하여 문제점을 공감할 수 있다면 우리 아이들의 교육에 좀 더 바람직한 결과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우리에게 있어 역사란 무엇인가?

 

: 특히 오늘은 교육부에서 한국사교과서를 국정화하기로 확정한 날입니다. 역사교과서의 국정화는 어떤 문제점이 있을까요? 저 개인적으로는 추진하는 분들이 역사를 모르지는 않을 테고, 다른 특별한 의도가 있을 것 같은데요. 역사는 무엇인가에 대한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 역사를 다양한 시각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시각으로 재단하겠다는 것은 야만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란 사실과 해석의 결합체인데, 하나의 사실에 대하여 단지 하나의 해석만 가능하게 한다면 그 해석의 주체에 따라서 사실 자체를 왜곡할 수 있는 여지를 주게 되죠. 저는 고향을 떠나서 정치적으로는 현재 여당 쪽의 정치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투표도 그렇게 했구요. 물론 지금은 그 선택을 뼈저리게 후회하지만요(씁쓸하게 웃는다). 현 정부여당 측에서 역사를 이런 식으로 재구성하려고 하는 것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상황입니다. 충분히 다른 의도가 있다고 봅니다.

 

: 역사를 역사학자가 아닌 정치가 좌지우지 한다는 것은 야만을 뛰어넘은 폭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과거도 유리한 기억만으로 구성하고자 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 하물며 균형 잡힌 시각이라는 이유로 국가가 직접 역사를 쓰겠다고 하는 것은 민주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특히 대통령의 지침에 의해 이념적 편향을 가진 기관이 이러한 일을 도맡아 추진하는 것은 웃기는 일입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빌미로 한 역사 왜곡의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역사는 사실의 기록이어야 하고, 단지 승자의 시각으로만 기록되어져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조선의 역사도 조선왕조실록만으로 완성될 수 없고 다양한 야사와 당대의 기록물의 종합된 결과물이죠.

 

: 우문이지만 역사는 객관적인가, 주관적인가 하는 질문을 다시 한 번 떠올려봅니다. 역사는 존재했던 과거의 사실과 그 사실을 바라보는 역사가의 시선입니다. 때문에 역사는 객관적 사실과 역사가의 주관적 인식이 종합된 결과물이죠. 역사란 무엇인가를 저술했던 E. H. Carr가 역사를 사실과 역사가의 상호작용이라고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에 역사라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그 사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에 관한 것입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죠. 단지 사실만 기록하고 그 사실에 관한 하나의 시선만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독선이자 독재입니다. 역사를 바라보는 바람직한 시각은 아닌 거죠. 현 정부가 추진하는 역사교과서의 국정화문제는 바로 이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사실에 대해서 어떠한 견해를 받아들이느냐는 개인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개인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표현하고 서로를 건전하게 비판할 수 있는 사회시스템이 우리가 생각하는 민주주의죠.

 

: 아따 나는 바쁘게 살다봉께. 역사가 머시고 정치는 머시고간에 관심이 없었는디. 오늘 보니께 선생님들은 참 말씀도 잘하시네. 가방끈 짧은 내가 봐도 국사교과서를 국가가 마음대로 만들어서 애덜 가르치는 것은 문제가 있제. 아야 아그들 느그들은 생각하지 말고 우리가 갈쳐준대로 외우고 시험이나 봐. 머 이런 거 아닐랑가 모르것네. 헤헤헤....우리 새끼들도 자기 스스로 생각허고 얘기할 수 있어야 좋은 사회가 아닌가? 고것이 풍납동 아빠가 말씀허는 민주주의가 맞것제?

 

: 우리 사장님 식견이 대단하신데요. 술만 드시고 돈만 많이 버시는 줄 알았더니만 사회를 바라보는 눈이 예리한신대요...

 

: 사장님, 멋지신데요. 사실 경제가 힘들고 사는 게 힘들어지면 사람들은 이념이니 정치니 교육정책이니 하는 것들은 먼 나라의 얘기처럼 들리잖아요. 조금 힘들어도 우리 문제니까 너나할 것 없이 관심을 갖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맞습니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얘깃거리나 거창하게 얘기할 수 있는 문제들도 결국은 나랑 연결되어 있죠. 문제가 있음에도 무시하고 무관심하게 지나쳐버리면 뒤통수 맞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바람직한 역사기록은 무엇인가? 올바른 역사기록은 가능한가? 올바르고 균형 잡힌 역사교과서가 가능한가?

 

 

: 여러분들의 말씀에 의하면 역사는 사실과 역사연구자의 해석이라고 생각됩니다. 다양한 해석과 견해가 가능하겠지만 결국에는 다수의 사람들이 공감하는 소위 통설적 견해를 바탕으로 역사는 기록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람직한 역사기록은 무엇일까요? 현 정부가 추진하는 올바르고 균형 잡힌 역사교과서가 가능할까요?

 

: 바람직한 역사기록이란 것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개념적 정의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바람직하다는 뜻은 결국 바랄만한 가치의 문제이고 판단의 문제입니다. 바람직한 역사기록은 다양한 견해 속에서 따르고 수긍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 바람직한 역사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실을 바라봄에 있어 그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공감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현 정부가 추진하는 균형 잡힌 역사가 가능한가의 문제는 바람직한 역사기술이 가능한가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균형을 잡는다는 것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것과는 다릅니다. 결국 시소가 추구하는 무게중심을 잡는 물리적 논리에서 나오는 정의라고 할 수 있죠. 다시 말해서 균형을 잡는다는 것은 무게중심을 맞추기 위해서 손을 보겠다는 의도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무게중심. 특히 대통령이 원하는 균형. 이게 핵심이 아닐까요?

 

: 그냥 아빠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다수가 동의하지 않고 외면하는 역사적 해석을 기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물론 다수가 옳지 않고 소수가 옳은 견해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가치판단의 문제에 있어 옳고 그름의 문제와 다름과 차이의 구분에 관한 문제는 단순하면서도 어렵습니다. 문제는 역사적 사실의 진실성 여부와 그 사실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 따른 해석은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6.25 한국전쟁과 대한민국 정부수립연도에 대한 논쟁 같은 경우 진실 여부와 관계없이 시각 차이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올바른 역사기록이 가능한가의 문제는 먼저 올바른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생각해봐야 합니다. 올바르다는 것은 말이나 생각이 이치나 규범에서 벗어나지 않고 옳고 바르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역사기록이란 것은 역사적 해석과 기술이 이치나 규범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하는데, 그러한 이치나 규범이 존재할 수 있는가가 문제가 됩니다. 과연 역사라는 그 자체를 이건 옳고 저건 그르다는 식으로 말할 수 있는 규범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현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의의 핵심은 이러한 규범이나 이치를 자신들이 만들 수 있다고 하는 오만에서 나오지 않았을까요? 존재하지도 않은 용의 머리와 여의주를 보았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요? 제가 너무 과장했나요? 허허허.

 

: 저는 쪼금 어렵기는 한디, 쉽게 얘기하자면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으면 일단 바람직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것네요. 지금 거시기(바람직) 한 것도 나중에 바뀔 수도 있지 않나요? 글고, 머가 옳고 틀리고하는 문제는 누군가 이것이 정답이여 하는 식으로 답을 정해놔야 될 것 아니여. 그라닝께, 지금 정부는 그런 자때를 즈그들이 정해서 역사책을 새로 만들겠다는 것 아닌가요. 결론적으로는 올바른 교과서를 만들수는 없다는 얘기 아닌가요?

 

: 사장님은 짧게 말씀하시지만 한마디 한마디가 정곡을 찌르시는데요. 평소 신문도 많이 보시고 하시죠?

호 : 그러지라. 가게 문열기 전이나 손님 없을 때에는 신문허고 TV 달고 살제. 헤헤헤. 뉴스는 외우다시피 한당께.

 

: 제 생각도 그냥아빠님이나 대치동아빠님과 동일합니다. 역사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기록하자는 것은 일종의 형용의 모순입니다. 일종의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올바르다는 것이 만약 도덕적 의미라면 규범적 기준을 정할 수가 있겠죠. 하지만 다양한 해석과 견해가 가능한 분야에서 무엇이 올바른가 하는 것은 기준을 정해서는 안되는 것이죠. 균형 잡힌 역사교과서를 만든다는 것이 현재까지의 역사교과서가 치우쳐 있다는 것인데 무엇이 치우친 것인지에 대해서도 정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균형을 잡으려면 시소와 같은 무게중심을 갖는 기준점이 있어야 하는데, 그 기준점을 어느 한 개인이나 집단이 정한다는 것인데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오히려 균형을 잡으려면 물리적 시도를 하지 말고 현재의 다수 견해에 대해 나름대로의 소수견해를 피력하고 서로가 논쟁이 될 수 있게 하는 게 최선이 아닐까 싶은데요? 소수견해가 언제든지 다수견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민주화된 사회의 장점이죠. 특히 역사적 견해나 평가도 연구자나 시대적 상황에 따라서 달리 볼 수 있기 때문에 특정한 의견으로 국정화를 시도하지 말고 그냥 의견제시만 하라는 거죠. 일단 여기까지 정리하고 다음으로 넘어가시죠?

 

때마침 술집에 손님이 뜸해 사장님이 옥수수 튀밥과 땅콩을 서비스로 내왔고, 맥주 넉 잔이 새로이 모습을 나타냈다. 사장님은 카운터를 부인에게 맡기고 아예 여유롭게 자리를 잡았다. 여느 논객처럼 비장한 모습이다.^^

 

 

대통령과 정부는 국민통합과 국민경제가 어려움을 이유로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주장하고 있다.

 

: 현재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 중입니다. 방문 전에 이례적으로 수석비서관 회의를 개최하여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당부를 하였다고 합니다. 이 문제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어찌되었건 대통령이 주무장관인 교육부장관에게는 어떤 식으로든지 지침을 내려 주었겠죠? 대통령이 국민통합과 국민경제를 이유로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는데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 제가 찍은 우리 대통령님은 유난히 유체이탈화법을 많이 사용하셔서 그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서로 구색이 맞지 않는 것들을 그럴듯하게 말로 표현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국민통합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게 말하는 당사자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일겁니다. 하하하.

 

: 또 국민경제가 어려운 것과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는 무슨 관계인지 영 어색합니다. 무슨 관계를 맺었는지 좀 속 시원하게 말해줬으면 하는데, 이것도 해석이 필요한 건 아닌가요? 아마도 현재의 역사교과서가 한쪽에 치우친 감이 있어서 이것을 바로잡아서 기존의 불균형에 분노한 이들에게 평화를 주자 이거 아닐까요? 그래서 통합이 이루진다면 좋을 텐데. 현재 대한민국이 국론이 분열되어 있나요? 아무튼 이해하기 힘든 이유입니다.

: 유체이탈화법이란 것이 아몰랑 그거 아닝게비여! 무식한 생각에 말이 앞뒤가 맞을라면 뜻이 통해야할 것 아니여. 근디 국사교과서를 국가에서 만들믄 그동안 갈라진 놈들이 갑자기 국민대통합이 이루어져서 서로 얼싸안을 수 있고, 가뜩이나 안 좋은 경제상황이 느닷없이 좋아진다는 얘긴가! 그 문제라믄 나는 무조건 찬성해야제. 장사가 잘된다는디!!

 

: 국내 일간지 어느 지면에서도 여기에 대한 해석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국민통합과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상관성이 규명하기 어려운 것은 분명합니다. 말하기 좋아하는 분들이라 느낌만 오면 이런저런 말씀들을 많이들 풀어놨을 텐데, 우리 대통령만 생각하는 특별한 관계가 있는지 이번 방미 기간 중에 그 해답을 가져올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생각 없이 들어보면 좋은 말씀이 나열되어 있어서 모양새는 괜찮기는 합니다. 이것 또한 일종의 형용의 모순 아닐까요? 한잔하시죠?

 

 

 

바람직한 역사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 역사교과서의 국정화는 역사 자체의 문제이기도 하거니와 역사교육의 문제입니다. 역사교육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의 아이들을 포함한 후세대들에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역사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고,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 역사는 자기의 뿌리를 아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역사라는 것이 현재와 과거의 부단한 대화라면 먼 과거세대와 우리, 그리고 우리와 미래세대를 연결시켜주는 중요한 고리입니다. 문제는 이 고리를 특정 세대가 자기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잘못 편집하게 되면 후세대에서는 이러한 사실도 진실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일본의 현세대가 반세기 이전의 자신 선조들의 침략사를 반성 없이 받아들이는 것도 왜곡된 역사인식의 한 예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구한말이나 해방 전후에 있었던 역사왜곡은 지금도 시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반성도 없구요. 그런 측면에서 역사교육은 오픈된 공간에서 제대로 평가가 이루어진 결과물이 역사가 되어 후세대들에게 전달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치명적인 문제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편향성을 가진 입장에서 국정화가 이루어진다면 그 시각은 단편적일 수밖에 없고 종국에는 역사왜곡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국정화 문제는 편향시정이라는 이유로 또 다른 편향을 낳고 있습니다. 만약 다른 시각을 가진 정권이 집권하게 되면 국정교과서는 그때마다 표지는 물론 주요내용이 바뀔 수 있습니다. 이게 과연 정상일까요? 우리 아이들에게 이런 역사교과서로 교육을 하고 시험을 보게 하는 것이 과연 정당할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하나의 역사적 사실도 다양한 해석에 의해 다양한 견해가 존재할 수 있다는 그 민주성을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 크. 갑자기 술맛나네요! 그냥 아빠님 논리도 장난이 아니네요! 저는 개인적으로 남들이 다 손가락질 하는 사람을 찬양하는 역사만 안 맹글어졌으면 좋것는디. 히히히.

 

: 역사는 우리가 공유해야할 경험과 지혜의 보고입니다. 우리의 현재를 있게 하고 미래를 존재하게 하는 질문의 창고이기도 하구요. 때문에 특정 이념이나 가치로 함부로 다뤄져서는 안 됩니다. 오픈된 공간에서 제대로 된 논의 없이 이루어진 특정 지침에 의한 역사교과서는 독재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합니다. 더욱이 이런 교과서를 국정화까지 한다니 한심하기 이를 데 없죠! 국민들에게 대통령이 정한 역사교과서의 답의 이미 정해져 있고 너희들은 그냥 대답만 하면 돼(소위 답·장·너)라고 말하면 안 되는 거죠. 국민을 계몽적 지도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은 교만한 전체주의적 사고입니다. 서로 다르더라도 상대방의 이야기 듣기를 부정하는 반민주적 발상이기도 하교요. 우리 국민은 개조의 대상이 아닌데, 현 정부는 국민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자꾸 국민들을 가르치고 의식을 일방적으로 바꾸려하는 것이 보여 안타깝습니다. 현재의 사실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도 다양한 해석과 의견이 자유롭게 개진될 수 있는 것은 민주주의의 생명입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해 현재의 다수견해가 언제든지 소수견해로 변경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민주주의적 역사관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 깨달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역사교육이 아닐까요? 역사적 사실 하나하나보다는 거짓 없는 평가, 열려진 공간에서의 자유로운 논쟁이 가능하다는 것을 아이들이 배울 수 있게 하는 것이 참된 역사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말씀을 나누기로 하겠습니다.

 

각자 가방을 들고 씁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쓰디쓴 소주를 마시고자 닭꼬치를 팔고 있는 다른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물론 호프집 사장님은 본인 말에 의하면 사모님과 알바생에게 자리를 맡기고 왔다고 하지만, 사실은 도망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이것 또한 왜곡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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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배경도 다르고 별로 친하지 않은 사십대 후반의 두 아빠(대치동 아빠, 그냥 아빠)가 맥주집에서 만났다. 어차피 코드가 맞지 않는 두 사람인지라 그들의 대화는 맥주집 사장과 친해 공짜 술을 좋아하는 풍납동 아빠가 사회를 보면서 진행됐다. 주제는 서로 공감이 가능한 아이들 교육문제를 둘러싼 이야기들을 먼저 나누기로 했다.

(사회자 아빠 : , 대치동 아빠 : , 그냥 아빠 : )

 

: 집안에 얘들이 몇 명인가요?

: 저 포함해서 세 명입니다. ㅎㅎ..

: 저 빼고 두 명입니다.

: 아 저는 저 빼고 와이프 포함 다섯 명입니다. ㅋㅋ..

 

: 아이들 구성이 어떻게 되시나요?

: 와이프를 전혀 닮지 않은 예쁜 공주 두 명입니다. 2, 4.

: 와이프를 빼닮은 잘생긴 아들 두 명입니다. 2, 6.

: ! 그러시군요. 저는 저를 빼닮은 공주 두 명과 아들 두 명입니다. 3,

      중2. 3, 다섯 살.

 

: 아이들 공부를 위해 학원은 보내시나요?

: , 큰애는 국어, 영어, 수학, 사회, 과학 학원을 보내고 수학은 별도로 과외

      도 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영어, 수학 학원과 피아노와 태권도 학원을 보내

      고 있 습니다.

: 예 큰애는 영어, 수학 두 과목 보내고 있습니다. 둘째는 합기도 학원만 보내

      고 있습니다.

: 우리집 아이들은 학교에서 하는 방과후 수업을 제외하고 학원을 보내고 있

      지 않습니다.

 

: 사장님, 여기 맥주 세잔하고 마른안주 주세요. 땅콩도 좀 주시고요.

 

: 한 달에 아이들 학원비로 얼마정도를 지출하시나요?

: 글쎄요. 와이프가 알아서 하는지라 저는 잘 모르긴 하지만 과외비 포함해서

     약 4백만 원 정도는 될 겁니다. 대치동이 학원비가 쎄긴 쎄죠.

: 4백이요! (깜짝 놀라며) 우리집 한 달 수입이 4백만 원인데. 저희집은 7,80

      만 원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 4백만 원은 장난이 아닌데요. 한 달 수입이 얼마나 되기에, 그 금액을 학원

      비 로 내고 있죠? 참고로 우리집 학원비는 제로입니다. 허허허.

: 전문직은 아니지만 맞벌이 부부라 둘이 합쳐 천만 원 정도 수입이 있습니

      다. 다만 거기에서 아파트 전세보증대출 관련해서 한 달에 이자비용만 150

      만원 정도가 나가고 있네요. 강남권 생활비 빼고 나면 저축하기도 빠듯하

      죠.

   

맥주와 안주를 서빙하던 술집 사장님이 지나가며, 학원비요, 우리는 세 명인디. 큰애한테만 과외 학원비 해서 한 달에 한 2백 들었을 것이요. 모르긴 몰라도. 근디 지가 안하니께 다 소용없드라고. 좋은 대학도 못 들어가고” . 나도 한잔 해불라요.....

 

: 애들이 학교공부는 잘 하나요? 실례가 안 된다면 성적이....

: 다행히 자기들 엄마를 닮지 않아 지금까지는 잘 따라가고 있습니다. 큰애는

     강남00중학교 자기반에서 4~5등 하고, 작은애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 우리집 애들은 엄마를 닮아 큰애는 반에서 가끔 1등도 하고 평균 2등 정도

      고, 둘째는 올A를 받아오는 것 같더라고요. 저도 소싯적에 공부를 잘하긴

      했죠.

: 우리집 큰애, 둘째 학교는 성적표를 주지 않는다는데요????? 진짜로!!!

, : (입을 모아서) 아니, 그럴 리가요!!! 혹시.....

 

: 허허 두 분,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죠? (맥주를 벌컥 들이키며 큰소리로)

     장님 여 기 시원한 맥주 한잔 더요.

 

: 아이들 학원 보내는 보람이 있나요?

: 글쎄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우리 애들한테는 비용 대비 효과가 그리 만족스

      럽 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대치동 주변 이야기 들어보면 학원

      잘 골 라 다녀서 성적 상위권 유지하는 애들이 많다고는 하죠. 애들 엄마도

      친하게 지내는 엄마들 얘기 듣고 그네들 학원에 보내려고 고생하고 있죠.

      하기 싫은 운전도 배우고요....아이도 엄마도 고생이죠 머.

: 우리 큰애는 영어 수학 부족한 부분을 학원에서 보충하려고 다니기 때문에

      만 족하고는 있는 것 같습니다. (대치동 아빠를 힐끗 쳐다보며) 저희 집은   

      비용 대비 효과가 만족스럽다고나 할까요?

: , 그렇군요.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문제라서 딱히 답은 없을 것 같네요.

      학원, 과외, 인강, 자기주도학습 모두 선택의 문제라서 자기 스스로 판단해

      야할 문제 로 보입니다. 우리 애들은 학원 대신 인강을 잘 활용하려고 하는

      데 만족도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 아이들이 학원 때문에 힘들어하지는 않나요?

: (잠시 머뭇거리며)사장님, 여기도 맥주한잔 추가입니다. 2 큰애가 학원

      끝나는 시간이 10시정도 되는데요. 집에 와서 간식 먹고 한, 두시 정도에

      자는 것 같은데요. 저랑은 평소 이야기는 잘 하는 편이라, 무지 힘들어하죠.

      저희 큰 딸은 혼자 공부하는 것을 좋아 하기는 한데. 어쩔 수 없이 엄마의 

      권유 때문 에 다니는 것이라서. 힘들다고 말하는 큰딸을 보면 딱히 할 말은

      없..... 그 문제 때문에 부부싸움도 여러 번 했지만, 와이프 태도가 워낙에

      완강해서... 허 허허

: 우리 큰 아이는 두 과목을 번갈아서 매일 학원에 가는 것 같은데 저녁은 같

      이 먹고 있습니다. 저녁 먹고 잡담하고 공부하다가 12시 정도에 잠자러 들

      어갑니 다. 학원 다니는 것을 자발적으로 선택했기 때문에 특별히 학원 때  

      문에 힘들 어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조심스럽게) 저도 맥주 한잔 추가

      요!

: 우리집 애들은 학원에 가본 적이 없어서 학원에 가는 것 자체가 힘들 것 같

      습 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중2라면 한창 놀고 잘 자야 할 나이죠. 학원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수면부족으로 고생하는 애들을 보면 불쌍하다는 생각

      이 먼저 듭니다. 두 분 생각은 어떠신가요?

: 맞습니다. 시대 상황이 틀리긴 하지만 저희때 중2는 엄청 자유로웠죠. 학원

      도 별로 없었고. 그때부터 인생이나 대학문제 같은 골치 아픈 문제를 고민

      하지도 않았었고....애들한테 말하면 욕만 먹을 얘기거리죠.

: 저도 그렇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좀 더 자유롭게 애들을 방치하고 싶습니

      다. 공부하는 것도 개인의 선택문제이고, 너무 일찍부터 경쟁의 수레바퀴

      에서 애들이 시달리는 것도 문제고....그렇지만 헬조선이라 불리는 대한민

      국의 현 실이 녹녹치 않습니다. 두 분도 잘 아시잖아요.

: 그렇죠. 아이들이 힘들어한다고 해서 공부하는 문제를 피할 수는 없는 것

      같습 니다. 어차피 뚫고 나갈거라면 애들에게 좀더 효율적인 방법을 강구해

      보는 것 도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네요. 저 같은 경우는 공부도 중요하지만

      애들이 자 기 스스로 헤쳐 나갈 수 있는 자신감과 자존감을 높여주는 것이

      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말씀에 동의합니다. 공부에 지친 아이들이 스스로 이겨낼 수 있는 자신감이

      나 회복탄력성이 없다면 일찍부터 번아웃될 수도 있어요. 생각만 해끔찍

      합니.

 

: 그렇다면, 애들도 힘들어 하고 부모들도 고통스러워하는 사교육문제의 해

      결책은 무 엇일까요? 힘들다고 애들 위한다고 학원에 안보내는게 유일한

     방법아니잖 아요?

: 뻔한 얘기이긴 하지만 결국 공교육의 정상화 아닐까요? 지금처럼 학원에서

      모든 것을 배워버리고 학교에서 잠을 자는 상황은 정상이 아니죠. 정상이

      아닌 상황을 정상적으로 받아들이는 우리 부모들이나 선생님들도 문제고

      요. 생각해 보면 교육정책으로 교육환경을 바꾸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 같

      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교육정책은 현장성이 떨어진 교육 관료들의 책상에서   

      나와서 교육현장의 목소리가 전달될 가능성도 적고 또한 정책입안자들의

      경험치가 부모들의 기대하는 정도에는 못 미치기 때문입니다.

: 그렇습니다. 사교육문제를 해결하라고 하면, 학원수강시간 제한이나 선행

      교육 금지라는 해프닝 같은 정책만 만들어서는 안 되는 거죠. 사교육 시장

      은 전형 적으로 풍선효과가 적용되는 영역입니다. 이쪽을 누르면 다른 쪽이

      튀어나오 는... 오히려 그런 정책들은 사교육 시장의 규모나 영향력을 키워

      주는 역효과 를 내고야 말죠. 반드시 좋은 의도가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오

      지는 않는 것 같 습니다.

 

      제 생각에는 사교육문제의 해결책은 어떻게 하면 학원의 도움 없이도 학교

      내에서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는가가 관건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교육

      관료들은  공교육 정상화하면 방과후 수업이나 쉬운 시험출제 정도밖에 생

      각 못합니다. 법으로 만들면 다 될 것처럼 생각해서, 공교육정상화법이라는

      이상한 법을 만 들기도 했죠. 법으로 다될 것 같으면 헌법 이외의 법들은 필

      요도 없을 겁니다.

: , 두 분이 일치해서 격하게 공감하시는군요. 사실 저 개인적으로는 공교

      육의 정상화 문제는 법적인 문제를 넘어 교육시스템 전반에 걸친 문제라고

      생각합 니다. 현행 일선 학교수업시간문제, 영어 수학에 치우친 수업과정,

      교육자들의 능력문제, 영어 수학에 치우친 대학수능, 현실에 맞지 않는 입

      학사정관제도 등 불필요한 제도의 도입, 지나치게 복잡한 대학입학전형의

      기형적 구조 등 상당 히 많습니다. 한두 가지의 해법으로 풀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여기에 대해 서는 할 얘기는 많지만 차차 하기로 하고.

 

      더 큰 문제는 이렇게 문제 있는 교육시스템에 분노하지 못하는 부모들입니

      다. 교육은 백년지대계라고 하지만, 우리 현실은 무한 경쟁구도에 휩쓸려

      지나가 는 시험기계를 양산할 뿐입니다. 이런 현실을 방관하거나 방조하고

      있는 저를 포함한 우리 부모들을 생각하면 울화가 치밉니다. 우리 부모들이

      함께 분노하고 교육정책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사는

      바쁘고 힘들 다고 아이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잘못된 정책에 맡길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 크. 옳습니다. 무기력한 부모들이 무기력한 아이들을 키웁니다.

: 맞습니다. 우리 부모들이 먼저 깨우치고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

      다. 교육부의 관료들이나 교육전문가들이 올바른 판단을 하고 바람직한 정

      책을 만 들 수 있도록 부모들이 두 눈을 크게 뜨고 있을 필요성이 있습니다.

 

: , 다 함께 한잔 하시죠. 사장님, 여기 시원한 것으로 세잔 더 주세요.

      사는 곳이나 경제적 배경뿐만 아니라 교육관이 전혀 다를 것 같은 두 분이 

      얘기를 끝내고 보니 공감하는 부분이 크네요. 지금부터라도 우리 아빠들이

      이렇듯 아이들 교육에 관한 문제를 인식하고 아이들을 위한 교육이 될 수

      있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 앞으로 우리 스스로 생각

      하는 부모, 행동하는 부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모임에는 공교육   

      정상화를 위한 교육정책을 주제로 얘기를 나눠보도록 하시죠.

   

      , 건배한번 하실까요? 우리 아이들의 행복을 위하여!!!

      용기 있는 아빠들을 위하여!!!

      그럼, 오늘 술값은 대치동 아빠께서....

: (깜짝 놀라며) !! 제가....제가 내야죠. 이차는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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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근 후에 넷째인 막내아이를 데리고 풍납토성길을 걷는다. 본격적인 가을로 접어들어서인지 이른 시간임에도 푸릇한 잔디위로 땅거미가 걸린다. 어둑해진 거리에는 주점의 불빛이 술꾼들을 부르고, 아득해진 노을 꼬리에 조각달이 얼굴을 내민다. 하루가 저무는 시간에는 사람은 물론이고 사물도 차분해진다. 온종일 주위를 헤매던 시선도 이제는 안으로 향한다. 다섯 살 먹은 아이와 함께하는 저녁은 순결하고 평온하다.

 

  저녁시간의 토성길은 건강을 위해 산책하는 사람들로 분주하다. 이어폰을 귀에 꼽고 음악을 들으며 힘차게 걷는 이십대, 어린아이의 유모차를 미는 삼십대 부부와 유모차에 자신을 의탁하는 칠십대가 공존한다. 낮 시간에는 단절되었던 가족 간의 대화의 실마리도 활동하는 약동의 시간이기도 하다. 가끔씩 출입이 금지된 애완견이 가족인 주인을 따라 나와 달빛 환한 길을 뛰어다닌다. 이 시간만큼은 모두가 살가운 하나의 그림이고 풍경이 된다. 그래서일까. 바벨탑처럼 높아만 가는 롯데월드 타워의 위용마저도 정겨운 풍납토성의 구릉아래 한수 아래일 수밖에 없다.

 

  토성길 끝자락에는 화덕피자와 파스타와 맥주를 파는 이층집이 있다. 분위기 있는 음악과 시원한 맥주에 한층 흥에 겨운 목소리가 창문을 넘어 나온다. 토성이 내다뵈는 테라스에서 음식과 술잔을 나누는 사람들의 표정은 붉게 물들어져 새하얀 달빛과 조화를 이룬다. 지나가는 행인들은 이층집에서 흘러나오는 음식냄새와 분위기에 군침을 다시고 걸음을 멈추고 잠시 고민을 한다. 그 집 3층에는 텐트와 바비큐를 할 수 있는 캠핑도구들이 있다. 도심 속에서도 야외에서 즐길 수 있는 캠핑의 소소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노을이 사라지는 순간 토성은 적막하다. 토성을 따라 지어진 아파트에 하나 둘씩 불이 켜지고 인간의 부재에서 존재로의 증명을 밝힌다.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할머니들 사이로 아이가 세발자건거를 타고 지나간다. 이른 저녁을 마친 노인들은 하루라는 삶의 시간을 지나왔던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들의 시선에 비친 아파트 창가의 토성은 쓸쓸하며 아늑하다. 천년을 넘어 이야기들이 쌓여 역사가 된 토성을 보면 쓸쓸하고,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부모를 반갑게 맞이하는 아이들이 살고 있는 집들을 보면 아늑하다. 생명의 순환은 개별적인 이야기를 낳고 그 개별성은 모두 모아져 역사라는 강을 이룬다. 할머니에게서 어머니에게로, 어머니로부터 다섯 살배기 아이에게로 유전되는 기억은 곧 우리의 삶이 된다.

 

  어두운 하늘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성급하게 고개를 내미는 별빛 몇 개가 보인다. 어린 아이들은 그 별들의 조급함을 빨리 찾아내는 신통함이 있다. 별의 이름은 모르지만 저 별이 조금씩 움직이며 반짝이는 것도 그들의 눈에는 쉽게 들어온다. 어른들 눈에 어른거리는 별빛은 찾아내기가 어렵다. 찾아보려는 의지나 노안도 문제거니와 동심을 잃어버린 까닭이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둥글어지거나 사그라지는 달의 모양과 별의 움직임은 신기함 자체이다. 아이들에게는 한낮 동안의 운동장만큼이나 밤하늘도 호기심 가득한 놀이터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도 늘 묻고 또 묻는다.

 

  하루를 온전히 살아낸 대가로서 저녁밥상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반찬 가짓수를 따지지 않는다면 식탁에서 받아들이는 만족감도 공평할 것이다. 저마다 준비한 저녁거리가 분주한 손길을 거쳐 식탁에 오르는 시간은 하루 중 가장 오붓하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학원에서 돌아온 가족이 저마다의 외형적 직분에서 해방되는 시간이다. 오직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식탁에 둘러 앉아 숟가락을 든다. 물론 돌아오지 않는 가족 때문에 저녁시간이 유예된 가정도 많이 있을 것이다. 아무튼 저녁밥상은 가족이야기의 오아시스이며 향기로운 꽃밭이다. 그 밥상둘레에서 아이들은 부모들의 말과 태도와 감정을 나누는 법을 배운다. 부모들은 아이의 눈동자와 말투 속에서 하루를 지나온 그들의 즐거움과 비애를 읽는다. 살아가는 참맛은 이렇듯 가족이 함께하는 저녁식탁에서 결정되지 않을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저녁은 바라볼 수 있는 별빛만큼이나 유한하다. 그 유한함을 숙명으로 여기고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진지하게 찾으려고 노력할 때 우리의 저녁은 풍성해질 것이다. 그저 지나가는 바람 같은 저녁이어서는 안 된다. 어느 하루라도 그저 그렇거나 무의미한 저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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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사회 전반에 경제적 부를 중심으로 한 교육과 직업의 대물림이 심각하다. 선택과 집중이 엉뚱한 방향에서 이루어지고 있어 대물림의 대척점에는 소외와 결핍이 새로운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일부 몰상식한 교육자들과 교육정책을 책임지는 일부 관료들, 사교육시장의 사업자들은 이러한 사회문제를 개인적인 문제로 치환시키고자 노력한다. 이들에 의하면 이유야 어찌됐던 뒤떨어지는 것은 개인과 가정의 능력의 문제라고 한다.

 

부모들은 치열한 경쟁사회의 룰에 압도되어 수동적으로 의식화될 수밖에 없다. 너도나도 아이들의 불확실한 미래를 교육투자를 통해 확실한 미래로 만들고자 한다. 의도된 불확실성에 경도된 수많은 부모들은 쳇바퀴 같은 경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자신과 자식들을 밀어 넣는다. 부모들은 하나의 미신을 신봉할 수밖에 없다. 우리사회의 미신은 사교육을 통한 교육투자와 직업적 세습만큼 확실한 미래보장이 없다는 확신이다. 이러한 미신을 부정하고 역행하는 사람들은 시대감각이 뒤떨어진 사람으로 치부된다.

 

과연 그 미신은 진실일까?

 

 

#2.

베로니카 로스의 소설을 영화화한 다이버전트는 전쟁과 자연재해로 파괴된 미래사회의 이야기다. 이 미래사회는 조화를 꾀하기 위한 하나의 사회로서 다섯 개의 분파로 이루어진다. 즉 이타심의 애브니게이션, 용기의 돈트리스, 지식의 애러다이트, 평화의 에머티, 정직의 캔더로 구성된다. 각각의 분파에 속하는 구성원들은 자신이 속한 소사회의 규범을 따르고 살아간다. 다이버전트는 이들 다섯 분파에 속하지 않은 변종의 자들로서 이 사회에서는 위험요소로 분류된다.

 

다이버전트에서 말하는 사회는 선악구도와 범주구분의 문제가 획일화된다. 정교하게 구획된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는 선에서 이들은 균형을 이루고 살아간다. 하지만 어느 사회든, 아무리 안정화된 사회이든 일정한 헤게머니의 출현은 숙명이다. 결국 일부 분파의 불온한 의도로 인해 이들은 균열되고 분리된다. 지식을 신봉하고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애러다이트의 오만과 편견은 이들 사회의 균형을 파괴한다. 특히 이들은 어느 한 분파에 속하지 못한 다이버전트를 획일화된 사회의 적으로 규정하고 색출하고 처단한다.

 

이 영화를 보면서 일정한 범주로 구분되고 획일화를 촉발하고 유지하고자 하는 한국사회가 오버랩 되는 것은 과도한 착각일까? 특정 관념의 고착과 이를 키우는 교육시스템의 문제를 떠올리는 것은 어느 한 다이버전트의 환상일까? 우리의 현실을 과대포장한 개인의 의견에 불과한 것일까?

 

 

#3.

우리는 늘 확실성과 불확실성의 경계에 서있다. 우리 인간은 자유로운 영혼이길 자처하고 획일화를 부정하는 불확실한 존재이다. 인간의 본성은 일정한 틀로 구분되고 억압되는 것을 부정한다. 그러함에도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개인은 제도적으로 의식화된 규범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한계를 가진다.

 

우리사회에도 다이버전트의 애러다이트적 심성을 가진 이들이 있다. 자신의 부와 지식을 최고로 치부하고 마치 세상사를 깨달은 것처럼 가르치고 명령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물질적 정신적 기반에 권력과 권위를 덧붙이고 사회를 규율하려고 한다. 이들 이외의 범주의 사람들은 타율적으로 규정된 질서 안에서 제한된 선택의 자유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 불순한 집단은 우리사회를 직업적 범주의 고착화를 통해 신분사회로 바꾸고자 한다. 불행하게도 이들에게 경제적 부를 이룰 수 있는 정보와 교육시스템에의 접근권이 집중되어 있다. 이들에 의해 부모의 경제적 부와 직업이 자신의 아이들에게 현실적으로 증여된다. 이들에게 있어 가치의 재분배와 불평등은 TV토론 프로그램에서나 나오는 거추장스러운 이야기에 불과하다.

 

우리 사회에는 이처럼 정의롭지 못한 시도가 현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이들이 많다. 이들은 이 사회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시민들이다. 이들은 거창한 이념이나 특정한 관념에 사로잡히기를 바라지 않는다. 이들은 학교성적과 학원에 얽매이는 아이들을 안쓰러워하고 가여워하는 대부분의 부모들이다. 이들은 십대 아이들의 희망이 교과서나 참고서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인간의 본성을 닮은 교육시스템 속에서 자유로운 영혼으로 자라나기를 바란다. 이들은 소소하게 차려진 저녁식탁과 원하는 만큼의 행복을 꿈꾸는 사회를 원한다. 이들은 결코 다이버전트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누군가의 부정한 꿈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 그 누군가에게 당당하게 아니라고 말해야 할 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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