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의 저녁

 

골목 어귀에 뭉툭해진 하루가 누워있다.

빨간 감을 매단 채 늙어가는 저녁은

굴뚝 너머로 애써 얼굴빛을 붉힌다.

어깨를 낮추며 손을 내미는 노을빛 연기는

별빛을 부르는 소심한 파수병일까?

어둑해진 창문은 목이 긴 커튼을 부여잡고

외로이 눈뜬 가로등을 가여워한다.

돌개바람이 몸을 누이러 대문을 두드리고

서성거리던 사랑이 담에 기대어 고백을 한다.

안쓰러웠을까. 서걱거리던 시간들

전봇대 옆에 조용히 그리운 깃대 하나 세운다.

밥 짓는 냄새가 찌개냄비를 끌어올리면

하루의 생을 소진하고, 또 다른 하루의 생으로

회귀하는 허기진 뒷모습이 백열등 아래 부풀어 오른다.

바닥을 뒹굴며 소란스럽던 아이들의 웃음이

제각기 별자리를 찾아 사라지고, 자전(自轉)을 멈춘 듯

지친 두 바퀴는 구석에 제자리를 찾는다.

어둠의 여백을 찾아 골목의 저녁이 저물어가고

하루를 견디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불 밝힌 창문은

모퉁이를 돌아 그림자가 길어져간다.

오늘도, 상처를 안고 돌아와 살며시 대문을 열어

가족을 보듬는, 속 깊은 골목의 내력을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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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남자를 이유없이 센치(?)하게 만듭니다.

터벅터벅 걸어가는 낙엽 쌓인 퇴근길. 넉넉한 웃음으로 시장바구니를 든 엄마들. 골목 어귀에 걸린 빨간 홍시감. 그 너머에 고개를 떨구는 오늘 하루. 붉게 물들어가는 노을을 바라보며 고향집에 계신 어머니도 생각해봅니다. 골목길을 들어서면 고등어를 굽고 청국장을 끓이는 냄새가 시장기를 부릅니다.

 

우리 아이들은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냈을까? 학교에서 운동장에서 골목에서 집에서. 아이들이 뛰어 놀았을 그 골목에서 요란스러웠을 그들의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고, 어느 집 대문 앞에는 자전거가 서있습니다. 늦게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가 집을 향해 걸어가고, 그 집에는 아이를 기다리는 창문이 환합니다. 모퉁이를 돌면서 바라보는 골목안의 풍경이 그림 같습니다.

 

아침 일찍 골목을 벗어나 해질 무렵 돌아오는 아버지들. 오늘도 우리 가족이 즐겁게 하루를 지났을까 되물으며 현관문을 엽니다. 자신의 상처는 감추고 가족을 살필줄아는 아빠가 바쁘게 다가가는 그 골목길의 힘을 믿습니다. 온기가 살아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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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부분의 아침을 셋째인 큰아들과 함께 집을 나선다. 새벽을 깨우는 잠 없는 참새마냥 아빠를 향해 무언가를 조잘거리는 아이. 말없이 아이를 진지하게 응시하는 아빠. 이들의 대화는 삼거리에서 지하철역과 학교로 갈라서기 직전까지 계속된다. 아이의 아톰머리처럼 정리되지 않은 뒷머리가 든든하기까지 한 아빠의 출근길은 가볍기만 하다. 아빠와 이런저런 얘기를 통해 기가 살아난 아이의 어깨는 잔뜩 힘이 들어간다.

 

  퇴근길에는 막내를 데리고 풍납토성길을 걷는다. 다섯 살 먹은 우리 집 막내는 아빠에게 하루 종일 있었던 일을 속사포로 내뱉는다. 무어 그리 할 말이 많을까? 유심히 눈동자를 들여다보면 아빠와의 대화를 기다린 하루가 보인다. 가끔은 아이의 말도 안 되는 말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백제토성길을 걸어 나간다.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아빠를 보고는 아이는 토성길을 벗어날 때까지 말로 일기를 쓴다.

 

  분명한 것은 사랑과 존중을 받고 자란 아이들은 눈빛부터 다르다는 점이다. 또한 타인에 대한 애정지수와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포함한 자존감이 높다는 사실이다. “섬기는 부모가 자녀를 큰 사람으로 만든다”는 책을 썼던 전혜성 박사도 부모의 아이를 대하는 태도를 중요시했다. 오죽했으면 부모가 자녀를 섬긴다는 표현까지 썼을까. 전박사님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을 존중하고 있을까?

 

 

#2.

부모세대와는 다른 세상을 사는 현재의 젊은 부모들에게 아이들은 어떤 존재일까? 사회경제적으로 나아진 상황에서 아이들에게 좀 더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 있을까? 아이는 부모의 소유라는 착각에서 벗어나 대등한 인격체로서 자유롭게 아이를 대할 수 있을까? 경쟁이 심화된 한국사회는 오히려 부모와 아이들에게 더 큰 부담을 지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현재의 우리사회는 극심한 피로사회다. 무한 경쟁이 제도화되어 ‘루저’와 ‘00포기자’가 신조어가 된지도 오래다. 놀이터와 골목이 학원으로 대체된 사회, 스스로 생각하기보다는 문제풀이를 강요당하는 사회에서 아이들은 지쳐간다. 우리 부모들은 아버지 때문에 많이 주눅이 들었지만, 요새 아이들은 이러한 사회분위기 때문에 주눅이 든다. 문제는 아버지 때문에 주눅 든 아이들보다 사회분위기 때문에 주눅 든 아이들이 받은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성적이라는 결과 위주의 판단이 주를 이루는 사회에서 아이들은 끊임없이 비교 당한다. 미디어매체에서 보는 연예인과의 비교, 소위 엄친아들과의 비교, 부모의 사회경제적 신분으로 인한 비교 등 이들을 특정한 잣대로 비교하는 것들이 주눅 든 아이들을 또다시 멍들게 한다. 멍든 가슴을 부여잡고 힘든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한들 이들이 바르게 자랄 수 있을까?

 

  학원과 과외를 통해 원하는 대학에 가더라도 그게 끝이 아니다. 취업이라는 거대관문이 앞을 가로막는다. 청년실업이 만성화된 한국사회에서는 안정된 정규직에 취업하기가 쉽지 않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업전선에서 좌절을 맛보는 이들에게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

 

  주눅 들고, 비교당하고, 경쟁에 지쳐 미래가 암울한 아이들에게 과연 온전한 꿈이 있을까? 이들이 자신을 존중하고 스스로를 귀하게 여길 수 있을까? 이는 크게는 사회적인 문제이지만 작게는 가정 내에서 아이의 자존감에 관한 문제이다.

 

 

#3

* 모든 아이들은 결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 모든 아이들은 한 인격체로서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 모든 아이들은 학교성적이라는 하나의 기준으로 평가되어져서는 안된

  다.

* 모든 아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스스로 인생을 꾸려나갈 수

  있다.

 

너무도 당연한 이 명제들은, 우리 모두가 잘 알면서도 현실에서 적용하기 쉽지 않은 사실들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들이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자존감이 강한 존재로 커 나가게 할 수 있을까?

 

* 부모로부터 존중받는 아이

  바람직한 관계의 시작은 부모의 아이에 대한 존중이다. 우리도 모르게 아이들을 부모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행동이 비일비재하다. 우리는 가부장적인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똑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아이들 스스로가 부모로부터 하나의 인격체로서 인정받을 때 아이는 비로소 독립적인 개체로서의 인간이 된다. 자신만의 독특한 아이덴티티와 생각을 가질 수 있는 전제가 충족되는 것이다. 부모가 가정에서 아이를 대등한 인격체로서 존중하는 것도 하나의 습관이다. 문제는 어떻게 이러한 습관을 갖느냐가 문제다. 이 습관은 아이의 실수와 성취에 대한 부모의 반응과 관련된다. 결국 부모인 나에게 문제해결의 열쇠가 있다는 얘기다.

 

* 부모와 아이의 신뢰관계의 형성

  대부분의 인간관계는 상호대화를 전제로 한 소통과 이를 통한 신뢰관계의 형성이 중요하다. 부모와 아이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최근 소통이 화두가 되고 있지만, 이를 돌려말하면 불통의 시대라는 반증이다. 부모와 아이의 정보격차와 상호이해의 부족은 서로의 대화의 장벽이 될 수 있다. 진실한 대화가 빠진 소통은 없다. 밥상머리나 거실에서의 사소한 대화부터 성적이나 진로문제 등 무거운 주제까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특히 부모가 아이의 눈높이에 맞는 대화를 할 수 있을 때 아이는 부모에게 마음을 연다. 아이의 솔직한 말 한마디와 이를 지켜봐주는 부모의 따뜻한 눈빛은 서로에게 신뢰를 자라게 한다. 사춘기 시절의 아이에게 일관되게 따뜻한 미소를 보이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어찌되었건 일단 노력해볼 일이다.

 

* 긍정적인 관심과 아이의 자존감

  흔히들 학교성적이 좋은 아이들이 자존감이 높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성취욕구의 충족이라는 측면에서는 어느 정도 타당한 얘기다. 하지만 학생이라고 해서 성적이 그들의 전부가 아니듯이 성적이 자존감에 미치는 영향 또한 일부분에 불과할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에 자존감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타인과의 관계가 아닐까 한다. 우리의 생활은 대부분 타인의 삶과 결부된다. 특히 밀접한 타인인 부모의 지속적인 관심과 긍정적인 피드백은 아이의 자존감을 향상시키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부모가 아이의 성적뿐만 아니라 교우관계나 선생님에 대한 평가, 장래의 진로문제 등까지 관심을 갖고 아이에게 반응을 보일 때 아이는 건강한 자존감을 갖게 될 것이다. 훈육위주의 부모나 일관성이 없는 부모는 성적과 관계없이 아이의 자존감을 낮게 할 가능성이 크다. 일단 나부터 뒤돌아보자.

 

*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는 권한의 부여

  가정의 대소사를 논할 때 아이의 의견을 묻는 것도 중요하다. 아이는 그 논의 과정에서 자신도 가정의 구성원이라는 뿌듯함을 느낀다. 부모와 대등한 주체로서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할 수 있을 때 아이는 크게 자란다. 특히 자신의 문제에 관한한 부모의 입장이 주가 되지 않고 자신의 견해가 반영될 때 아이는 그 결론에 대한 책임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우리가 그랬듯이 부모가 일러준 대로 때로는 일방적으로 지시한대로 행동할 때 아이는 독립적이지 않다. 아이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정에 책임진다는 생각을 할 때 비로소 독립적인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알면서도 아이와 의논을 할 때 내 입장을 먼저 이야기하고 결론마저도 내 생각대로 이끌려는 경향이 강하다. 아이는 마냥 가르치고 따라만 오는 대상이 아님에도 말이다. 우리가 우리 부모들에게 불만을 가졌듯이 그 부정의 역사가 반복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이 또한 말이 아닌 행동으로 즉시 옮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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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노을

 

해질녘 저 너머에 커다란 눈이 나를 바라본다

거친 호흡은 온통 불붙은 억새밭이다

그 시선이 붉은 산 빛을 담고 강의 온기를 머금은 채

다가서면 차마 바라보지 못할 흰 소의 눈망울

우시장이 서기 전날, 그 두려운 밤에

뒷걸음치며 손길을 거부하던 물기어린 눈동자

멀리 드문드문 별빛을 응시하던 어찌할 수 없는 몸부림

마지막을 고하는 듯 숨소리가 잦아들고,

불그스레한 소의 눈망울이 말갛게 사그라지더니

이제야 어머니의 야윈 몸과 사위어진 눈동자가

어리고 여린 별빛으로 돋아난다

소의 눈망울이, 아니 어머니의 눈물이 잉태한

작은 별바라기가 서쪽하늘에서 조각달과 새로이 자란다

별은, 아 별빛은 노을이 낳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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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보기란 참 어렵습니다. 바빠서. 

일설에 의하면 농촌지역보다 도시지역의 노을이 더 그럴듯하다고 합니다. 온갖 미세먼지와 스모그가 결합된 먼지구름이 노을의 때깔을 이쁘게 한다는...

 

토요일 오후 아내와 함께 아차산과 용마산에 올랐습니다.

모처럼 가을하늘은 맑았고, 산등성마다 사람들은 붐볐습니다.

해돋이를 잘 볼 수 있는 곳에서는 저녁노을도 장관입니다.

한강과 김포 저 너머로 떨어지는 붉은 눈망울을 보다보면 괜스레 짠해집니다. 팍팍하게 살아가는 우리네 하루의 삶이....

 

허전한 속내를 달래기 위해 서둘러 막걸리 집으로 향했습니다.

노을이 낳은 별빛 몇 자락이 우리를 바라봅니다. 그 옆 초승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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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량휴업으로 인해 ○○초등학교 휴업이라는 문자가 왔다.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은 이유 불문하고 이 소식을 반긴다. 그저 학교에 가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학생일 때에는 학교에 가는 것과 공부하기가 싫다. 직장인인 경우에는 직장에 나가는 것과 일하는 것이 싫다. 그렇다. 호모루덴스(놀이하는 인간)의 유전자를 가진 모든 인간은 학교와 직장을 싫어한다.

 

마냥 공부하지 않고 일하지 않으면 좋을까? 꼭 그렇지만은 아닐 것이다. 놀고 즐기는 본능만큼이나 생존과 성장의 본능 또한 강하다. 하지만 아직 초등학교 3학년인 아이에게는 생존을 위한 돈의 품격이나 자아실현을 통한 성장의 희열은 머나먼 안드로메다의 이야기다. 그냥 노는 게 좋다. 특별한 놀이도구가 없어도 놀고자하는 마음과 공간, 시간만 있으면 된다. 더불어 마음에 맞는 친구가 몇 있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2.

아들이 여덟 살 때까지는 그림책과 동화책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심지어 아빠가 봤던 와인 관련 만화책까지 여러 번 읽어서 누나들에게 자랑하곤 했다. 화장실에 가서도 30분은 예사로 책을 보고 항문질환을 걱정하는 부모의 얘기는 귓등으로 흘리곤 한다. 주말이면 학교 개방도서관과 작은 소나무언덕 도서관에서 각 3권씩 책을 빌리고 반납하는 과정이 일과가 됐다. 책을 못 보게 한다는 것이 최고의 벌이 되었다.

 

아이들의 키가 커가는 만큼 호기심의 분야도 다양해진다.

 

어느 날은 종이접기에 빠져서 간단한 비행기부터 까다로운 동물 및 공룡까지 갖가지 사물을 종이로 접는 신공을 보여주었다. 신공의 결과물이 가는 곳은 늘 쓰레기통이지만 몰입의 과정에 더 만족하는 듯 했다. 누나들의 레고 조각과 본인 소유의 레고 부속품으로 교본에도 없는 레고작품을 만들어 아빠에게 보여주곤 한다. 아빠가 볼 때는 별 탐탁지 않은 놀이와 그 결과물이지만, 아들에게는 나름 심오한 작업의 결과물이거나 놀이문화로 보인다.

 

유튜브에 보면 종이접기에 관한 동영상이 많다. 한동안 누나들 때문에 걸 그룹의 춤사위에 빠져있던 아들은 얼마 전부터 종이접기 동영상을 즐겨본다. 종이접기가 비행기나 배를 만드는 것으로 생각하는 어른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이것도 하나의 예술분야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부분의 사물을 종이로 만들어내는 장인들이 있다. 특히 일본 쪽에서 이런 문화가 잘 발달되어 있다. 그들의 개인주의적 문화와 밀접한 관련성을 갖으리라 생각된다. 아들은 한 시간짜리 동영상을 보면서 색종이를 비롯한 갖가지 종이로 자신의 작품을 만든다. 11월 첫 번째 주에는 학교에서 전시회도 연다고 한다.

 

우리 아들은 다른 아이들보다 자전거를 늦게 배웠다. 본래 겁이 많아서인지 두발을 동시에 페달에 올리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 공포를 이기기까지는 자전거 뒤를 잡아주는 아빠의 거친 말투가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아무튼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잘 타고 다닌다. 친구들과 학교운동장과 골목길을 쏘다니며 라이딩을 즐긴다. 아빠랑 한강 자전거 전용도로에서 신나게 타보는 것이 목표이긴 한데 아직은 무섭다고 한다. 겁이 많은 것은 아빠의 업보다.

 

요즘은 아파트 단지마다 아이들을 위한 놀이공간이 있다. 부모가 어릴 적에는 학교 운동장에만 있었던 놀이도구들이 현관문만 열면 도착 가능한 공간에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해가 지고 부모가 부를 때까지 돌아오지 않는다. 사십년 전에 우리 부모들이 그랬던 것처럼 땅거미진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찾는 것은 짠하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우리 아들도 엄마 아빠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올라갈 때까지 놀이터에서 오지 않는다. 다섯 살 터울인 유치원생 동생과 전혀 격의 없이 미끄럼틀과 시소를 탄다. 서로 티격태격하면서 잘도 어울려 다닌다. 때로는 울고불고 하지만 그들이 느끼는 형제애는 두 사람에게는 큰 자산이다. 부모에게는 그들이 보람이다.

 

아들은 방과 후 수업으로 바둑과 로봇공학을 한다. 확인할 수는 없지만, 본인 주장에 의하면 바둑을 상당히 잘 둔다고 한다. 그 그룹에서는 적수가 없다고 하는 뻥도 친다. 어찌됐건 바둑을 배우는 것은 바람직하게 보인다. 바둑을 배우는 사람들은 자고로 엉덩이가 무거워야 한다. 한수 한수 두어야 하는 침착함과 다양한 수를 생각해야 하는 진지함까지 갖춰야할 것이 많다. 로봇공학에서는 일종의 조립식로봇을 설계하여 조립하고 해체하는 법을 배운다. 원하는 목적에 따라 로봇의 뼈대를 구성하고 전자칩을 고정시키고 이를 전자적으로 구동하는 것이다. 바둑과 로봇을 만들면서 아들은 지금까지의 놀이와는 전혀 다른 희열을 느꼈을 것이다. 자신의 몸을 쓰지 않고 머리와 손으로만 두는 바둑과 로봇공학은 그 세계가 넓고 깊다. 앞으로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고민해야 할 것이다.

 

 

#3.

다양한 놀이문화에 푹 빠진 아들을 보면 아빠도 즐겁다. 이는 의무적으로 학원에 보내지 않고 특별히 배워야 할 과외활동이 적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 몰입은 아이에게 즐거움뿐만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에 진짜 흥미를 느끼는지를 알게 해준다. 아이들의 미래는 가능성의 시간이다. 자신의 미래를 위해 현재의 시간을 여러 분야에서 스스로 탐색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다. 그 속에서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고 그 꿈의 성취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자신이 결정하게 될 것이다.

 

가끔씩 우리는 아이의 미래를 직업을 위한 경쟁이라는 분야에 한정시켜 생각하곤 한다. 그러다 보니 놀이는 아주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고 하지 않아도 될 것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교양을 위해 피아노를 배우고 운동을 위해 태권도를 배우고 나머지 시간은 온통 학과공부와 선행학습에 치중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한번 열 살 먹은 아이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다. 지금 하고 있는 공부와 학원 학습이 즐거운 것인가를.

 

아이들의 호기심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과 같다. 아이들 스스로 그 공의 운동성과 방향성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어떨까? 부모가 그 공이 함부로 튀거나 잃어버리는 것이 두려워 공에 실을 매달아놓는다면 그 공은 이미 아이의 것이 아니다. 부모가 아이의 동심과 호기심을 키우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그들이 즐거워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그냥 놔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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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의 분쟁이나 갈등의 원인에는 서로 다른 시선이 있다. 그 시선 이전에는 서로 다른 인식과 생각이 있을 것이다. 존재하는 인간의 수만큼의 다양한 시선이 존재한다. 올바르거나 바람직한 시선은 어떠한가라는 질문은 처음부터 어리석다. 애당초 시선이라는 것이 평가적 기준을 정할 수 없는 극히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불행하다.

 

  “미움받을 용기”란 책이 2년여 동안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다. 아들러의 심리학 이론을 바탕으로 쓰인 대화체 형식의 이 책의 인기비결은 무엇일까? 여러 해석이 가능하지만,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라는 주문에 대한 화답이 아닐까? 우리는 지금까지 아니 지금도 타인의 시선에 얽매인 삶을 살고 있어서일까? 대한민국이라는 피곤한 삶속에서 얻은 이 책의 영광이 역설적으로 안타깝다!

 

  시선은 그물코다. 각 그물이 목적하는 만큼 그물이 가진 코의 크기는 다양하다. 농어를 잡거나 전어를 잡는 그물이 같은 코를 가질 수는 없다. 농어 잡이를 주로 하는 배의 어부와 전어 잡이를 주로 하는 배의 어부는 서로 우열을 따지거나 비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서로 다른 배가 가진 그물의 그물코가 그 배의 품격이나 어부의 인격을 나타내지는 않기 때문이다. 서로 같은 바다에서 그물을 내릴 때에도 같은 어종을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경쟁하거나 갈등할 필요가 없다. 서로의 그물이 얽힌다면 그것은 서로가 양보하지 않은 조급함이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시선 속에서 하루를 산다. 우리 자신의 시선도 끊임없이 누군가를 향하고 있다. 나를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은 결코 나의 내면을 바라보지 못한다. 내 자신의 시선도 타인의 속내를 바라볼 수 없다. 하지만 시선의 교차 속에서 혹은 비교 속에서 괴로워하거나 고통을 당하는 것은 결국 자신들의 내면이다. 바라볼 수도 보여줄 수도 없는 내적인 세계가 가볍게 스치는 바람 같은 시선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이다. 무언가 옳지 않다. 심지어 부당하기까지 하다.

 

  조정래의 시선, 조르바의 시선, 니체의 시선 등 그 어느 것도 나를 구속할 수는 없다. 그들의 시선이 위대하고 존경스러울지라도 그렇다. 내가 받아들이는 것은 그들의 시선이 아니라 내 사고체계로 걸러진 그들의 생각일 뿐이다. 한낮의 태양에서 빛의 줄기보다는 따뜻함을 받아들이듯이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서 내게 유리한 자양분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것도 독립적으로. 내 삶의 온기와 만족도는 내가 정한다. 그것이 내 삶을 위한 진정한 용기다.

 

  내 방식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내 시선의 꿋꿋함을 간직한다는 것이다. 내 방식대로 산다는 것은 타인의 시선을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삶은 아니다. 그것은 서로간의 시선이 옳고 그름의 차이가 아니라 서로 다름의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는 방식의 삶이다. 또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어떤 하루를 지날 것인지,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를 내가 정하는 삶이다. 그것이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내방식대로 내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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