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부분의 아침을 셋째인 큰아들과 함께 집을 나선다. 새벽을 깨우는 잠 없는 참새마냥 아빠를 향해 무언가를 조잘거리는 아이. 말없이 아이를 진지하게 응시하는 아빠. 이들의 대화는 삼거리에서 지하철역과 학교로 갈라서기 직전까지 계속된다. 아이의 아톰머리처럼 정리되지 않은 뒷머리가 든든하기까지 한 아빠의 출근길은 가볍기만 하다. 아빠와 이런저런 얘기를 통해 기가 살아난 아이의 어깨는 잔뜩 힘이 들어간다.
퇴근길에는 막내를 데리고 풍납토성길을 걷는다. 다섯 살 먹은 우리 집 막내는 아빠에게 하루 종일 있었던 일을 속사포로 내뱉는다. 무어 그리 할 말이 많을까? 유심히 눈동자를 들여다보면 아빠와의 대화를 기다린 하루가 보인다. 가끔은 아이의 말도 안 되는 말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백제토성길을 걸어 나간다.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아빠를 보고는 아이는 토성길을 벗어날 때까지 말로 일기를 쓴다.
분명한 것은 사랑과 존중을 받고 자란 아이들은 눈빛부터 다르다는 점이다. 또한 타인에 대한 애정지수와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포함한 자존감이 높다는 사실이다. “섬기는 부모가 자녀를 큰 사람으로 만든다”는 책을 썼던 전혜성 박사도 부모의 아이를 대하는 태도를 중요시했다. 오죽했으면 부모가 자녀를 섬긴다는 표현까지 썼을까. 전박사님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을 존중하고 있을까?
#2.
부모세대와는 다른 세상을 사는 현재의 젊은 부모들에게 아이들은 어떤 존재일까? 사회경제적으로 나아진 상황에서 아이들에게 좀 더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 있을까? 아이는 부모의 소유라는 착각에서 벗어나 대등한 인격체로서 자유롭게 아이를 대할 수 있을까? 경쟁이 심화된 한국사회는 오히려 부모와 아이들에게 더 큰 부담을 지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현재의 우리사회는 극심한 피로사회다. 무한 경쟁이 제도화되어 ‘루저’와 ‘00포기자’가 신조어가 된지도 오래다. 놀이터와 골목이 학원으로 대체된 사회, 스스로 생각하기보다는 문제풀이를 강요당하는 사회에서 아이들은 지쳐간다. 우리 부모들은 아버지 때문에 많이 주눅이 들었지만, 요새 아이들은 이러한 사회분위기 때문에 주눅이 든다. 문제는 아버지 때문에 주눅 든 아이들보다 사회분위기 때문에 주눅 든 아이들이 받은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성적이라는 결과 위주의 판단이 주를 이루는 사회에서 아이들은 끊임없이 비교 당한다. 미디어매체에서 보는 연예인과의 비교, 소위 엄친아들과의 비교, 부모의 사회경제적 신분으로 인한 비교 등 이들을 특정한 잣대로 비교하는 것들이 주눅 든 아이들을 또다시 멍들게 한다. 멍든 가슴을 부여잡고 힘든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한들 이들이 바르게 자랄 수 있을까?
학원과 과외를 통해 원하는 대학에 가더라도 그게 끝이 아니다. 취업이라는 거대관문이 앞을 가로막는다. 청년실업이 만성화된 한국사회에서는 안정된 정규직에 취업하기가 쉽지 않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업전선에서 좌절을 맛보는 이들에게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
주눅 들고, 비교당하고, 경쟁에 지쳐 미래가 암울한 아이들에게 과연 온전한 꿈이 있을까? 이들이 자신을 존중하고 스스로를 귀하게 여길 수 있을까? 이는 크게는 사회적인 문제이지만 작게는 가정 내에서 아이의 자존감에 관한 문제이다.
#3
* 모든 아이들은 결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 모든 아이들은 한 인격체로서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 모든 아이들은 학교성적이라는 하나의 기준으로 평가되어져서는 안된
다.
* 모든 아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스스로 인생을 꾸려나갈 수
있다.
너무도 당연한 이 명제들은, 우리 모두가 잘 알면서도 현실에서 적용하기 쉽지 않은 사실들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들이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자존감이 강한 존재로 커 나가게 할 수 있을까?
* 부모로부터 존중받는 아이
바람직한 관계의 시작은 부모의 아이에 대한 존중이다. 우리도 모르게 아이들을 부모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행동이 비일비재하다. 우리는 가부장적인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똑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아이들 스스로가 부모로부터 하나의 인격체로서 인정받을 때 아이는 비로소 독립적인 개체로서의 인간이 된다. 자신만의 독특한 아이덴티티와 생각을 가질 수 있는 전제가 충족되는 것이다. 부모가 가정에서 아이를 대등한 인격체로서 존중하는 것도 하나의 습관이다. 문제는 어떻게 이러한 습관을 갖느냐가 문제다. 이 습관은 아이의 실수와 성취에 대한 부모의 반응과 관련된다. 결국 부모인 나에게 문제해결의 열쇠가 있다는 얘기다.
* 부모와 아이의 신뢰관계의 형성
대부분의 인간관계는 상호대화를 전제로 한 소통과 이를 통한 신뢰관계의 형성이 중요하다. 부모와 아이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최근 소통이 화두가 되고 있지만, 이를 돌려말하면 불통의 시대라는 반증이다. 부모와 아이의 정보격차와 상호이해의 부족은 서로의 대화의 장벽이 될 수 있다. 진실한 대화가 빠진 소통은 없다. 밥상머리나 거실에서의 사소한 대화부터 성적이나 진로문제 등 무거운 주제까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특히 부모가 아이의 눈높이에 맞는 대화를 할 수 있을 때 아이는 부모에게 마음을 연다. 아이의 솔직한 말 한마디와 이를 지켜봐주는 부모의 따뜻한 눈빛은 서로에게 신뢰를 자라게 한다. 사춘기 시절의 아이에게 일관되게 따뜻한 미소를 보이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어찌되었건 일단 노력해볼 일이다.
* 긍정적인 관심과 아이의 자존감
흔히들 학교성적이 좋은 아이들이 자존감이 높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성취욕구의 충족이라는 측면에서는 어느 정도 타당한 얘기다. 하지만 학생이라고 해서 성적이 그들의 전부가 아니듯이 성적이 자존감에 미치는 영향 또한 일부분에 불과할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에 자존감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타인과의 관계가 아닐까 한다. 우리의 생활은 대부분 타인의 삶과 결부된다. 특히 밀접한 타인인 부모의 지속적인 관심과 긍정적인 피드백은 아이의 자존감을 향상시키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부모가 아이의 성적뿐만 아니라 교우관계나 선생님에 대한 평가, 장래의 진로문제 등까지 관심을 갖고 아이에게 반응을 보일 때 아이는 건강한 자존감을 갖게 될 것이다. 훈육위주의 부모나 일관성이 없는 부모는 성적과 관계없이 아이의 자존감을 낮게 할 가능성이 크다. 일단 나부터 뒤돌아보자.
*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는 권한의 부여
가정의 대소사를 논할 때 아이의 의견을 묻는 것도 중요하다. 아이는 그 논의 과정에서 자신도 가정의 구성원이라는 뿌듯함을 느낀다. 부모와 대등한 주체로서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할 수 있을 때 아이는 크게 자란다. 특히 자신의 문제에 관한한 부모의 입장이 주가 되지 않고 자신의 견해가 반영될 때 아이는 그 결론에 대한 책임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우리가 그랬듯이 부모가 일러준 대로 때로는 일방적으로 지시한대로 행동할 때 아이는 독립적이지 않다. 아이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정에 책임진다는 생각을 할 때 비로소 독립적인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알면서도 아이와 의논을 할 때 내 입장을 먼저 이야기하고 결론마저도 내 생각대로 이끌려는 경향이 강하다. 아이는 마냥 가르치고 따라만 오는 대상이 아님에도 말이다. 우리가 우리 부모들에게 불만을 가졌듯이 그 부정의 역사가 반복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이 또한 말이 아닌 행동으로 즉시 옮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