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더운 토요일 오후, 셋째인 큰아들 손을 잡고 잠실에 있는 교보문고로 향했다.

골목길을 걷는 도중에 초등 2학년생인 아들이 말했다

“아빠, 내가 나중에 크면 모든 자동차를 하이브리드나 전기차로 바꿀 거야. 그리고 모든 집에 태양열 발전장치를 지붕에 만들어서 전기도 만들고....”

아빠가 묻는다.(속으로는 의문을 갖고)

“왜 하이브리드고, 왜 태양열 장치야....”

아들이 대답한다.

“응, 책을 보니까 화석연료 때문에 오존층이 파괴되고, 남극과 북극의 얼음이 녹으면 저지대의 국가들이 물에 잠긴데. 엄마, 아빠 신혼여행 갔던 몰디브도 2050년에 물에 잠긴다는데”

 

아빠는 생각해본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이런 대화를 나눠본적이 있었던가? 같이 논길을 걷고, 리어카를 밀었던 기억은 있는데 대화내용은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도... 아마도 없었던 것 같다.

 

다시 아들이 묻는다.

“아빠, 와인하고 코냑은 어떻게 달라”

아빠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이 집에 있는 와인 책을 보았군....쩝쩝

“응, 와인은 네가 알다시피(?) 포도를 발효시켜 만든 것이고, 브랜디(코냑도 브랜디의 일종)는 그런 과실주를 끓이고 증류해서 만든 거야”라고 아빠가 답했다.

 

호기심 많은 나이의 아들은 별걸 다 묻는다. “대통령은 어떻게 뽑는 거야? 앙코르와트는 어디에 있어? 지하철 한 칸은 얼마정도 할까? 아빠 꿈은 뭐야? 미국과 북한은 왜 사이가 나빠? 잠잘 때 꿈은 왜 꾸는 걸까? 포경수술은 꼭 해야 돼?....” 일일이 대답하기에 골치 아프다.

 

부모는 아이들의 보물창고가 되어야 하고, 고물창고가 되어서는 안 된다.

 

 

#2.

   요새 아이들은 공부만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책을 읽고 수많은 정보를 얻는다. 분명한 것은 부모들이 책을 읽지 않거나 정보수집능력이 떨어지게 되면 아이들에게 책망을 당한다는 것이다. 거침없는 한마디. ‘아빠는, 엄마는 그것도 몰라“

 

   어느 날인가 부엌에서 소동이 일었다. 전후사정은 그랬다. 큰딸이 엄마에게 사회 관련 용어가 이해가 안 되어 물었더니, 엄마가 엉뚱한 얘기를 하더란 거다. 그런데 그게 처음이 아니었다는 것이 중요했다. 엄마는 평소에는 가지지도 않은 자존심을 (쪽)팔렸고, 아이는 엄마한테 다시 물어볼만한 신뢰를 잃었다. 이러한 등가교환은 중요한 결론을 가져왔다. 다시는 큰딸이 엄마한테 공부관련해서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짐이 아빠에게로 넘어왔다. 적지 않은 공부를 하고 상식이 풍부하다고 자처(?)하는 아빠지만 부담스럽다. 조만간 자존심을 팽개칠 위기의 순간이 올 것 같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오늘도 내가 알던 정보를 업데이트한다.

 

아이들의 머리가 커갈수록 부모의 공부는 계속되어야 한다.

 

 

#3.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아빠랑 다정하게 손잡고 다니던 큰 딸이 중학생이 되더니 손은 고사하고 멀리 떨어져 걷는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이런 질문을 해대던 어린아이는 사라지고, 까칠하기 이를 데 없는 중학교 2학년이 되어서는 꼭 필요한 말을 빼고는 묻는 법이 없다.

 

   한국사회에서는 최근 우리 큰딸 같은 아이들에게 “중2”라는 사회적 신분을 부여했다. 심지어 “중2병”(중학교 2학년의 심리적 상태를 일컫는 말)이 실체가 있다는 연구보고도 있고, 북한의 김정은이 방위병과 함께 중2를 무서워한다는 소문도 있다. 외계인이 중2 때문에 지구침공을 못한다는 믿지 못할 말들에 대해서는 할 말을 잃었다. 어찌되었건, 중2병을 앓고 있는 큰딸과의 대화는 어렵다. 아! 이런...

 

   아빠 입장에서도 어찌어찌해서 다정하게 말이라도 붙여볼라치면 싸늘하고 가시 돋친 대답이 돌아온다.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혼자서도 분을 참지 못하고 씩씩거리기 일쑤다. 우리 큰애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아서 안심이기는 한데, 사춘기라 부르는 이 시기를 지혜롭게 잘 지나갈 수 있을까? 아마도.... 이것 또한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애들도 마찬가지지만, 어느 누구도 명확히 규정하지 못하는 상황을 두고 부모 스스로가 애걸 복절할 것은 아니다. 시간이 여러 경계를 지나 우리를 만들었듯이, 또 다른 시간이 우리 아이들을 어른으로 만드는 발효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아이의 눈빛은 분명 저항의, 이유 없는 분노의 그것이지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도 내 마음을 알 수 없으니, 엄마 아빠가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라는 의미로 읽힌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부모가 자신의 말을 그냥 들어주기를 원한다. 이러한 맥락의 의미를 이해하고 편하게 아이를 받아들여줄 부모가 필요한 것이다. 어린아이로서 부모에 대한 응석이 아니라 성장해가는 자아를 가진 존재로서 인정받고, 스스로의 인생에 대해 결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사춘기를 지날 때 부모는 또 다른 성장기를 지난다.

 

 

#4.

   저녁밥상에서 여러 설전으로 인해 밥알이 포탄이 되는 경우가 많다. 밥상머리의 기적이라 부르지 않았던가. 우리 집은 일주일 중 네다섯 번은 가족들 모두가 6인 상에 둘러앉아 조촐한 저녁을 맞는다. 아름다운 밥상을 예상하거나 둘러앉은 의도는 거창한데, 밥상은 늘 시끄럽고 어쩔 때는 말다툼으로 끝을 보고야 만다. 애들끼리, 부모끼리, 부모와 애들 간에 사소한 입씨름이 어느덧 반찬처럼 놓여있다. 멀리서 보면 평화로운데 가까이서 보면 전쟁터가 따로 없다.

 

   그럼에도 애들 눈치(?)보면서 서로간의 대화를 끊이지 않게 하여야 한다. 아이들이 오늘 학교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는 몇 마디 말만 들으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들의 쏟아낸 말 속에는 하루를 지탱해온 감정의 농도나 그 이상의 의미가 숨겨져 있다. 때문에 부모들에게는 그 몇 마디가 지니는 행간의 의미까지도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들이 내뱉는 말이 사실적이면서도 거칠더라도 그 속에 아이들의 진심이 들어있기 때문에 부모는 그 말의 형식이나 품격을 고려할 것이 아니라 그 의도와 내용에 주목하여야 한다.

 

   부모가 보기에 많은 것들이 서투른 아이들에 대해, 성인의 기준으로 말의 형식을 재단하고 그 내용의 격을 심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는 것 같다. 당장은 십대의 잦은 욕설이 귀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그 옛날 거친 욕을 해대던 지금의 부모들도 그 십대를 거쳐서 완성되지 않았던가. 우리 또한 부모들을 분노케 했던 한때의 철부지였다.

 

우리도 한때 철부지였고, 하고픈 말과 표현되는 말이 다른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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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보계가 전하는 안부

 

흔들려야 자란다는, 말은

이웃 세상의 슬픈 루머

나처럼

설레임 없는 아침이 또 있을까

 

길모퉁이 행복건강원에서 졸여지는 염려들

, 잊기 위해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아침마다 집을 나서는 당신

 

무언가를 담아내기 위해

안팎으로 자라야 하는 강박증의 당신

당신의 가방 속에서 흔들거리는 나

 

당신의 근심은

잔설 덮인 마지막 감보다

붉은 노을을 탐하는

철새의 날갯짓

 

나에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자라지 못했다는 말의 부제(副題)

 

당신도, 나처럼

셈으로 시작하는

하루를 지나고 있는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알람이 울린다. 똑같은 시간에.

일정한 공간에서 시작하는 하루, 음미하는 수준보다는 때우는 의미의 아침식사.

아침을 알리는 새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바쁜 발걸음만 있을 .

 

3~4분을 간격으로 수많은 문이 열리고 닫힌다.

무가지 신문이 사라진 공간에서 스마트폰의 세상이 열린다.

누군가는 만화를 보며 웃고, 누군가는 음악을 들으며 고개를 흔든다.

가볍지 않은 제목의 책을 든 이가 드문 세상이라, 두 번씩이나 쳐다본다.

 

어제와 같은 인스턴트커피를 입에 머금고, 개인용 PC를 켜고, 또 낯익은 일과가 반복된다.

메뉴만 다른 점심식사가 어제 그 사람들과 함께 줄을 서있다.

인터넷 뉴스에서 바라본 익숙한 구태들, 특히 정치하는 인간들, 이들을 버려야 하는데. 아직 우리는 그들을 버리지 못했다.

 

퇴근을 알리는 알람은 없다.

아침과 동일한 풍경이 다시 배경이 된다.

누군가에겐 저녁식사를 위한 시장보기와 어린이집에서 아이 데려오기가 아직 남아있다.

오늘 저녁은 어제와 달리 무얼 먹을 수 있을까?

 

직장에서, 학교에서, 학원에서, 어린이집에서 가족이 모두 돌아와 저녁을 먹는다.

 

평범함이, 일상이 행복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이런 반복되는 매일 매일이

행복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걸?  나만, 그런가?

 

어느 교수의 책제목처럼 청춘만 흔들림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매일 자그마한 자극이나 변화를 통해서 조금씩 흔들릴 필요가 있다.

그 것은 성장을 가져오기도 하거니와 삶의 성숙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하여, 매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만보계는 슬픈 것이다.

성숙은 고사하고 자라지 못하는 숙명을 가진 만보계.

설레임이 있을 턱이 없다.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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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즘 밴드가 유행이다. 밴드에 가입하라는 말을 처음 듣고, 나는 악기를 다룰 줄 아는 게 없는데, 혹시나 보컬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돌아본 대답은 당신 같은 보컬은 필요 없고, 아는 사람끼리 모여 인터넷상에 모임을 만드는 밴드란다. 아무튼 나는 초, 중, 고 밴드에 가입했고, 추억 속에 남아있는 여러 친구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한 장의 파노라마 같은 살아온 얘기들을 술잔 속에서 듣고 많이 웃고 때론 안쓰러워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여자동창생들은 남자 동기들보다 결혼이 빠르다. 그 덕에 군대 간 아들이 있고, 대학에 다니는 딸이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운동을 잘했던 여자 친구가 밥을 먹다가 하소연을 했다. 나름 열심히 애들을 키우고 없는 살림에도 학원과 과외를 시키고, 소위 ‘In 서울’(서울시내에 있는)의 대학에 딸을 진학시켰다고 한다.

 

어느 날 학교에 다녀온 딸이 푸념을 늘어놓았다고 했다. 자신은 돈을 벌기 위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돈벌이를 했던 엄마의 악착같은 모습이 싫었고, 가끔씩 술에 취해 들어온 엄마의 뒷모습이 너무 싫었다고 했다. 혼자 집에 돌아와 저녁밥상을 차려먹는 것도 싫었고, 친구들한테 엄마의 직업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하지 못했던 자신이 더더욱 싫었다고 했다. 친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친구의 말끝에 배어나온 서운함이 어미 새의 안타까운 절규처럼 들렸다. 누군가 따라준 소주잔 속에 적막이 맴돌았고 일행은 조용히 잔을 비울 수밖에 없었다. 자식이 부모의 인생을 타박할 때 부모는 무슨 변명을 하고, 어떤 심정으로 자신을 추스를 수 있을까! 어렵다. 우리네 인생은....무슨 말로 어떻게 위로를 건넬까. 주점의 형광등 불빛이 유난히 깜빡거렸고, 물기어린 눈빛 몇 개가 공감의 잔을 함께 들었다. 엄마를 위하여.

 

  

#2.

엄마의 삶 어느 부분이 딸에게 상처를 주었을까? 엄마는 몇 마지기 땅도 없는 빈한한 집에서 태어나 실업계 고등학교를 겨우 마치고, 서울에서 이런저런 직장을 전전하고, 사랑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 둘을 낳았다고 한다. 아이를 낳고부터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고 한다. 남편이 자리를 잡지 못해 여기저기 직장을 떠돌 때도 집안을 지탱했던 사람도 그녀였고, 아들이 군대 가고 딸이 대학갈 때까지 여느 슈퍼맘처럼 고생한 사람도 그녀였다고,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보통 사람들이, 엄마들이 살아온 궤적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터인데, 그 일상적인 삶이 왜 딸아이를 서럽게 했을까?

 

모를 일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상처가 아이에게 옹이처럼 자라났는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짐작컨대 열심히 살아온 엄마에게 불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 둘을 키우며 희생하고 즐기지 못한 엄마의 인생이 안쓰러워서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엄마의 아쉬웠던 삶의 실루엣이 자신에게 투영돼 그 것이 어린 딸의 가슴에 슬픔을 자라게 하지 않았을까. 술 취한 엄마의 목소리에 담긴 연민이 한참 예민했던 시절의 여고생에게 여자의 일생을 생각해보게 하지 않았을까. 예쁘게 자라는 자신을 거울에 비춰보았을 때 문득 엄마의 얼굴이 겹쳐져서 자신의 성장이 두려워지지 않았을까. 아마도 부쩍 커버린 정 많은 딸은 엄마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화내고 있는 것이리라.

 

 

#3.

이 땅에서 살아가는 어머니들은 헌신과 희생의 상징이자 기호이다. 많은 시인들이 자신의 영혼을 통해 어머니의 헌신과 진정한 가치, 한없는 베풂에 대한 고마움을 노래한다. 어머니의 시적 추상화로 인해 어머니로부터 구체화된 아이들은 가슴아파하고 눈물짓는다. 어머니에 관한 사회적 관점이 보통의 연민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이 나라에서는 그 눈물이 더 흔하다.

 

자식들이 비록 철부지라 하더라도 어찌 이를 모를까?

 

인생의 어느 한때, 철없던 그 한때에는 어떤 철학적인 조언과 설득도 철부지의 귀를 뚫지 못한다. 남자다움이 여성성을 억누른 사회에서 성장한 그들의 귀와 눈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무르익은 후회가 그들을 철들게 하고, 그 철부지들은 어머니가 된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어머니를 찾는다.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사모곡

 

이제 나의 별로 돌아가야 할 시각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

지상에서 만난 사람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여인은

어머니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나의 별로 돌아가기 전에

내가 마지막으로 부르고 싶은 이름

어. 머. 니

 

김종해, <풀>

 

 

#4.

신은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어머니를 보내주었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누군가는 이런 어머니의 얼굴을 모르고 평생을 살다 가기도 한다. 고 정채봉 시인이 그랬다. 시인이 두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 서러움으로 인해 시인은 어머니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이라는 슬픈 시어로 그려냈다.

 

단 5분 동안이란 짧은 시간 안에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시간 안에 단 한번 어머니가 하늘나라에서 휴가를 나오신다면 시인은 어머니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그것이 진정 궁금하다. 이제는 고인이신 정채봉 시인께서 하루라도 휴가를 나오실 때다. 가족과 팬들을 위해 하루쯤 말미를 내시라.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된다면

단 5분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 번 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내어 불러보고

숨겨놓은 세상사 중

딱 한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정채봉,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5.

어린 시절, 특히 8, 9살 무렵의 어린 아이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엄마의 상실이라고 한다. 그 시절에 엄마를 잃는다는 것은 세상 전부를 잃는 것과 같다. 세상이 좋게 변해가고 아이들이 커나가도 엄마의 삶은 결코 가벼워지지 않는다.

 

낳고 기르는 것과 같은 엄마로서의 삶이 전부가 아닌 아내로서, 여자로서의 삶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단한 엄마의 삶만큼이나 이 땅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의 인생도 애달프다. 팍팍한 엄마의 하루는 자식들의 어깨에 그대로 놓이기도 하고, 가슴 한구석에 응어리로 자리 잡기도 한다. 굳은살이나 상처는 그때 생기는 것이다.

 

우리가 어릴 적에 어머니랑 겸상은 드물었다. 어머니의 식탁은 주로 부엌의 부뚜막이었거나 가족들이 상을 물린 후에 그 밥상에서 잔반을 처리하는 것이 예사였다. 갈치나 조기구이는 늘 아버지의 밥상에 먼저 놓여있었고, 어쩌다가 아이들의 숟가락에 살이 발리어진 게 전부였다. 생선가시에 붙은 먹을 게 없는 생선살이 어머니의 몫이었다.

 

어린 아이들의 눈에는 엄마가 어디서 끼니를 해결하는지가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들의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한 밥이 더 소중했기 때문이고, 그 때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었기 때문이다. 힘든 밭일에 지친 엄마를 보고도, 엄마의 발뒤꿈치가 갈라지고 거칠어져도, 일 년에 한 번도 외갓집에 못가더라도 엄마는 괜찮은 줄 알았다. 심순덕 시인도 어린 시절 그렇게 느꼈을 것이고, 그래서 그의 시가 더 마음 아프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 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 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 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썩여도 끄덕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 인줄만--

 

한밤중에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심순덕,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6.

아이들뿐만 아니라 엄마를 잃은 어른들도 ‘엄마’를 그냥 부르지 못한다. 발음은 엄마라 부르지만 그 것은 세상 모든 것이거나, 저 깊은 곳에서 나오는 안타깝고 서러운 눈물이어서 그렇다. 이들의 눈물을 위로하기 위해서는 모성애와 여성성을 온전히 간직한 엄마를 위한 사회학이 필요하다. 어려운 개념과 화려한 수사가 필요한 이론적인 사회학 말고.

 

스무 살 무렵 군대 가는 날 아침 분명 시골집 앞에서 엄마의 배웅을 받았다. 잘 다녀오라는 눈물바람 없는 밋밋한 인사로 기억된다. 그런데 목포시외버스터미널에서 광주로 떠나는 버스 옆에 다시 엄마가 서 계셨다. 그냥 웃으시면서, 밥맛없으면 찬물에 말아먹으라고 하셨다.  "... ...."  오래전이라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엄마의 말씀과 웃음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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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두른 탓일까. 아니면 서투른 탓일까. 처음 가보는 낯선 길. 지하철 하나가 방금 지나갔다. 줄지어 걷는 이들의 걸음걸이엔 조바심의 꽃이 피었고, 어떤 이들의 얼굴엔 아쉬운 한숨이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시간은 늘 정해져있기 나름이다. 오늘도 930분까지는 도달해야한다. 조금만 빨리 걸었더라면 하는 작은 후회가 파동을 일으켰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아쉬움을 머금은 동지가 많았다. 일단은 안심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누군가의 눈길은 온갖 색으로 꾸며진 수험용 책을 놓지 않았고, 내손에도 그동안 정성들여 정리한 노트가 주목을 받고 있었다.

 

   어젯밤은 잠들기 힘들었다. 머릿속은 온통 시험관련 지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른 봄기운이 창문으로 배꼼 고개를 내밀었지만 상응할 여유가 없었다. 이른 봄꽃 향기에 취해 술 한 잔 생각이 간절했지만 안 될 일이었다. 억지로 잠을 청했지만 어렴풋한 꿈속에서 알람이 나를 깨우고 있었다. 소풍가는 날 아침과는 다른 기분, 그 당혹스러움이 세수하는 순간까지도 어깨위에서 나를 누르고 있었다. 잘 할 수 있을까. 조금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어쨌든 언덕 위를 오르는 경쟁자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지만 희미한 미소만 서로 교환했을 뿐이다. 고시학원에서 제공하는 공짜 커피를 서둘러 입안에 흘려 넣고는 시험실로 향했다. 생각보다 빈자리가 적었다. 먹고살기 힘든 까닭이리라. 신성한 밥벌이를 위한 첫발걸음이 이리 어려울 줄 몰랐다. 부모님이나 선배들이 갔던 길은 왠지 순탄해 보였는데 시대를 잘못만난 것 일까. 심란한 마음에 변명이 제 구실을 찾고 있었다.

 

   손에 쥔 컵을 내려놓고 오전 과목을 정리한 노트를 펴고 빠르게 넘겼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시험 직전의 강박감을 해소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냉정해 보이는 시험감독관이 교실로 들어서는 순간 과민성 방광의 또 다른 압박이 있었다. 화장실에는 줄이 길에 늘어서 있었고, 그 자리에서도 여전히 책장은 넘어가고 있었다. 경쟁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었지. 알지 못할 짜릿함이 가슴을 설레이게 했다. 그래 반드시, 언젠가는 거쳐야 할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피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래 오늘 마지막 시험이 되게 하자. 거울속의 얼굴이 비장하게 웃었다.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순간은 가능성의 시간이다. 무언가를 위한 종도 늘 울리기 마련이다. 다만 그 의미를 알고 가능성을 기회로 바꿀 수 있는 가는 선택하는 자의 몫이다. 시험 시작을 알리는 전자벨이 경쾌했다. 기분 좋은 시작이다. 네 과목 중 첫 과목 첫 문제가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지문이었고 전혀 힘들지가 않았다. 어젯밤에 슬쩍 지나간 부분이긴 했지만 습관처럼 답을 골라낼 수 있었다. 아! 이런 통쾌함이란!!

 

   국어 과목은 예시문이 무척 길었지만, 평소 다양한 책을 섭렵하고 있었기 때문에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법정스님의 무소유’, 그리고 김사인의 시까지 출발이 순조로웠다. 문제에서 출제위원의 속내가 들여다보였고 답이 손을 들고 있었다. 날카롭게 보이던 시험감독관의 눈초리가 한층 부드러워져 있었다. 내 기분때문이리라. 조용히 웃고 있는 나를 창문 밖 토요일의 봄이 바라보고 있었다

 

   헌법은 예상했던 대로 판례와 헌법 및 각종 법조문을 아는지를 시험하는 듯 했다. 내가 출제위원이라도 이러한 문제를 출제했으리라. 문제는 영어시험이었다. 과연 무슨 의도로 이렇게 긴 지문을 본문으로 만들었을까. 번민은 짧았다. 재빨리 문제부터 훑어보고는 다시 본문으로 다시 문제로 의외로 답을 골라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한국영어시험의 가장 큰 난관인 문법문제가 이번에도 여러 개 눈에 보였다 개탄스러운 대한민국 영어시험의 현주소를 또 한 번 체험했다.

 

  종료 20분전을 알리는 방송이 정적을 깨트렸다. 누군가는 잠에서 깬 듯 화들짝 놀라고, 또 다른 누군가는 순조롭게 문제지를 넘기고 있었다. 시험 종료 10분 전의 태도가 다른 것은 서로에게 주어진 똑같은 시간을 계획하고 안배한 그 차이 때문일 것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오직 수험생에게는.

 

   시험 종료 5분전에 답안지 기재까지 모두 마칠 수 있었다. 몇 문제 아리송하기는 했지만 미련을 갖지 않기로 했다. 백점을 목표로 시험장에 오지 말자고 몇 번이나 다짐하지 않았던가. 단지 커트라인 안에 내 점수가 들어있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오전은 수험전략과 선택, 시험시간의 집중이 모두 조화로웠다. 욕심을 버리니 타깃이 분명해보였다.

 

   집에서 정성껏 챙겨준 죽이 무슨 맛인지 모르게 점심시간이 흘러가고, 캔 커피의 달콤함이 100년만의 따뜻한 봄 날씨의 유혹으로부터 나를 막아주었다.

 

   오후 과목은 모두 법과목이었다. 평소 자신만만한 과목들이어서 시험시간 백분이 길게 느껴질 정도였다. 매 과목 지문이 거의 판례 위주로 출제되었고 대부분이 아는 판례의 결론이었다. 슬쩍 옆에서 열심인 수험생들의 눈길을 쳐다보았지만 별다른 동요는 없었다. 나와 같은 느낌 때문일까. 나이가 들어 보이는 옆자리 수험생의 안경테가 유난히 빛나보였다. 그동안의 마음고생은 나보다 더했겠지. 경쟁심과 동정심, 서로 어울리지 않은 궁합이지만 시험장에서는 서로 어울릴 수 있었다. 삶의 현장이 누군가의 말처럼 정글은 아니지 않은가. 짧은 한숨이 창문가를 맴돌고 있었다.

 

   시험시간 종료를 알리는 벨이 울리니 창문 밖 햇살이 손짓을 했다. 후련함보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원한 맥주 한잔이 그리웠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의 얼굴이 맥주잔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래 오늘이 토요일이지. 누군가에게는 토요일은 행복한 주말이었지만 그동안 밥벌이를 하지 못했던 나에게는 주중의 하루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평범한, 지극히 일상적인 토요일을 즐겨보리라. 나중에 이런 수험생활이 그리울 날이 있겠지. 후회는 없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과목, 잠이 오지 않는 불면의 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긴 시간 함께 했지만 오늘 같은 하루를 위해 그 날들을 잘 참고 즐겨왔기 때문이다.

 

   시험장을 나서면서 핸드폰 전원을 켰다. 문자메시지가 여러 개 도착해있었다. 부모님, 사랑하는 친구들로부터 고생했다는 격려의 문자였다. 아름답고 따뜻한 3월 오후 3시의 태양이 나를 위해 길을 내어주고 있었다. 햇살 하나하나에 솜사탕을 매달고 나를 반기고 있었다. 흐뭇한 정적이 머무른 순간, 푸른 하늘 어디에선가 맑은 물방울이 비쳤고, 지하철역 입구가 흐려보였다. 혼자만의 여행, 내가 선택한 삶의 길, 카타르시스란 진정 이런 것이었던가.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 첫 계단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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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루의 삶도 기나긴 인생도 질문과 의문의 연속이다. 부딪치는 수많은 상황에서 선택을 해야 하고 합당한 답변을 구해야 한다. 자식을 낳고 부모가 되면서 부모의 역할과 좋은 부모란 어떠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하고, 어떤 식으로든지 자신의 방식을 정하고 이를 실천해나가야 한다. 하지만 아이들 양육이나 교육에 관한 정답이 있을까? 부모들이 참고할만한 모범답안이 필요할까?

 

‘엄친아, 엄친딸“이라는 단어는 엄마친구의 아들, 딸이라고 한다. 이 단어 속에는 아들이나 딸을 잘 키운 그들의 부모가 숨어 있다. 잘 키워진 아들이나 딸이 부러운 것이 아니고, 그 부모가 부럽다. 유행하는 말로 부러우면 진다고 했던가. 누군가 웃자고 한 얘기일터인데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이들이 많다. 부러움은 내 욕망의 동기일 뿐 아니라 내가 성장할 수 있는 계기이기도 하다.

 

부러워하는 것이 나를 자극해서 스스로를 깨어나게 하고, 나를 올바른 방향으로 변화시켜주는 것은 오히려 이기는 것이다. 부러움으로 인해 나를 타인과 비교해서 자조적으로 되거나, 패배주의적인 의식과 행동을 불러오는 것이 지는 것이다. 그것도 누구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자발적으로 지는 것이다. 때문에 엄친아나 엄친딸로 인해 속상해할 필요는 없다. 그 부러움을 긍정적인 선순환의 에너지로 바꿀 필요가 있다. 그리고 혹여 우리 얘들이 엄친아, 엄친딸로 불리고 있을 줄 누가 아는가!

 

#2.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번듯하게 생긴 이들이 학벌, 직업까지 좋아 선망과 질투의 대상이 된다.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화면 속에서 내가 시기했던 한 장면을 목도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가공의 현실과 실재하는 현실은 전혀 다른 시간과 공간이다. 그들은 우리처럼 살 수 없고, 우리 또한 그들처럼 살기가 쉽지 않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존재와 비존재, 가능과 불가능의 경계를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 깨달음의 맛은 쓰다.

 

요즘의 아이들은 너나할 것 없이 대중매체 속의 아이돌스타를 좋아한다. 그들의 팬을 자처하고 콘서트 티켓이나 음반을 구입하며, 그들이 온몸으로 생산해내는 대중문화를 소비한다. 부모들이 보기에는 넋을 잃고 책상에서 멀어진 아이의 행태가 한심한 현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새벽에 발매하는 콘서트입장권을 예매하려고 밤을 새우던 아이가 시험 전날에는 천하에 무거운 두 눈을 하고 다니는 것을 보면 속이 뒤집어질 수도 있다. 내가 지금 그런다.

 

삼십년도 훨씬 전에 상영되었던 영화 ‘라붐’을 기억할 것이다. 그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소피마르소의 청초한 눈빛에 열광했던 소년, 소년들이 있었다. 이소룡을 지나 성룡과 이연걸의 액션에 어설픈 춤을 추고, 각종 배우들의 브로마이드로 방을 도배했던 아이도 있었다. 조금 지나서는 가수 서태지를 문화대통령으로 만들어 준 아이들도 등장했다. 그 때의 부모들도 역시 분개했었다. 방안을 상장으로 도배를 해도 성이 안차거늘, 책받침과 연습장에 서정윤의 홀로서기 시리즈는 뭔 얘기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밤새워 녹음하는 열정의 아이들은 누구란 말인가. 그 당시 아이들도 부모들의 입에서는 늘 술자리 오징어 같은 존재였다. 누구의 얘긴가. 바로 우리의 기억나지 않는 과거의 이야기다. 애써 부정하지 말자. 삶의 모든 아이러니는 바로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거늘.

 

#3.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인내’의 열매를 맛보았다는 거다. 달거나 혹은 쓰거나, 사람에 따라서는 무미건조했을 수도 있다. 그 맛은 사람마다 다르다. 태생이 나름 훌륭해서 인내를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 또한 부러움의 대상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생에 있어 행복과 불행의 총량은 일정하다는 것이 행복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중론이기 때문이다.

 

동양고전에서는 인생의 세 가지 불행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소년시절에 과거에 급제하고, 부모형제의 권세가 높고, 자신의 재주가 뛰어난 것이 그 세 가지다. 세 가지 모두 부러움의 대상이지만 그 속에서 불행이 싹틀 수도 있음을 경고하는 의미이리라. 그래도 부러운 것은 사실이다. 주위에 일찍이 고시에 합격했지만 자기관리에 실패해서 끝이 좋지 않은 친구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일찍 피어난 꽃은 교만하지 않지만 쉽게 지고, 일찍 피어난(?) 인간은 교만하기 때문에 쉽게 지기 마련이다.

 

부모들이 맛보았던 참고 견딤에서 나오는 열매의 맛을 아이들에게 강요하지는 말자. 그 맛은 우리의 경험에서 나오는 극히 주관적인 맛일 뿐이다. 객관화할 수도 없고, 그 달고 쓴 것에 관해 미리 맛을 보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안 될 일이다. 생각보다 우리의 인생은 길다. 학원에서 선행학습 하듯이 인생을 땅겨서 살수도 없고 그리 살아서도 안 된다. 일모작, 이모작이 아닌 삼모작 이상의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축구도 후반전이 중요하지만, 인생은 초반보다는 중반 이후의 삶에서 실패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지금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에게 진정 의미 있는 공부를 스스로 하고, 인생의 꽃망울로 불리는 ‘십대’를 마음껏 즐기는 것 빼고 무엇이 있겠는가. 그때그때 누려야 할 삶의 즐거움은 따로 있다. 아이돌 스타에 열광하고, 선생님을 짝사랑하고, 거친 욕을 입에 달고 사는 것도 한때다. 일정한 시기가 지나가면 아무리 애를 써도 다시 뒤로 돌아갈 수 없다. 인생에도 당연히 불가역성의 법칙이 적용된다.

 

오히려 우리 아이들이 너무 빨리 삶의 경계와 인내를 배우고자 하고, 그 결론까지 알아보고자 하는 조급함을 경계해야 한다. 큰 길에도 지름길이 없지만 긴 인생 또한 그렇다. 인생은 한권의 책을 쓰는 것과 같아 앞 페이지를 채우지 못하면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 수 없다. 흔들리고 방황하는 ‘십대’의 한 페이지를 꽉 채울 수 있도록 그들의 처진 어깨를 두드려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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