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루의 삶도 기나긴 인생도 질문과 의문의 연속이다. 부딪치는 수많은 상황에서 선택을 해야 하고 합당한 답변을 구해야 한다. 자식을 낳고 부모가 되면서 부모의 역할과 좋은 부모란 어떠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하고, 어떤 식으로든지 자신의 방식을 정하고 이를 실천해나가야 한다. 하지만 아이들 양육이나 교육에 관한 정답이 있을까? 부모들이 참고할만한 모범답안이 필요할까?
‘엄친아, 엄친딸“이라는 단어는 엄마친구의 아들, 딸이라고 한다. 이 단어 속에는 아들이나 딸을 잘 키운 그들의 부모가 숨어 있다. 잘 키워진 아들이나 딸이 부러운 것이 아니고, 그 부모가 부럽다. 유행하는 말로 부러우면 진다고 했던가. 누군가 웃자고 한 얘기일터인데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이들이 많다. 부러움은 내 욕망의 동기일 뿐 아니라 내가 성장할 수 있는 계기이기도 하다.
부러워하는 것이 나를 자극해서 스스로를 깨어나게 하고, 나를 올바른 방향으로 변화시켜주는 것은 오히려 이기는 것이다. 부러움으로 인해 나를 타인과 비교해서 자조적으로 되거나, 패배주의적인 의식과 행동을 불러오는 것이 지는 것이다. 그것도 누구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자발적으로 지는 것이다. 때문에 엄친아나 엄친딸로 인해 속상해할 필요는 없다. 그 부러움을 긍정적인 선순환의 에너지로 바꿀 필요가 있다. 그리고 혹여 우리 얘들이 엄친아, 엄친딸로 불리고 있을 줄 누가 아는가!
#2.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번듯하게 생긴 이들이 학벌, 직업까지 좋아 선망과 질투의 대상이 된다.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화면 속에서 내가 시기했던 한 장면을 목도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가공의 현실과 실재하는 현실은 전혀 다른 시간과 공간이다. 그들은 우리처럼 살 수 없고, 우리 또한 그들처럼 살기가 쉽지 않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존재와 비존재, 가능과 불가능의 경계를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 깨달음의 맛은 쓰다.
요즘의 아이들은 너나할 것 없이 대중매체 속의 아이돌스타를 좋아한다. 그들의 팬을 자처하고 콘서트 티켓이나 음반을 구입하며, 그들이 온몸으로 생산해내는 대중문화를 소비한다. 부모들이 보기에는 넋을 잃고 책상에서 멀어진 아이의 행태가 한심한 현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새벽에 발매하는 콘서트입장권을 예매하려고 밤을 새우던 아이가 시험 전날에는 천하에 무거운 두 눈을 하고 다니는 것을 보면 속이 뒤집어질 수도 있다. 내가 지금 그런다.
삼십년도 훨씬 전에 상영되었던 영화 ‘라붐’을 기억할 것이다. 그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소피마르소의 청초한 눈빛에 열광했던 소년, 소년들이 있었다. 이소룡을 지나 성룡과 이연걸의 액션에 어설픈 춤을 추고, 각종 배우들의 브로마이드로 방을 도배했던 아이도 있었다. 조금 지나서는 가수 서태지를 문화대통령으로 만들어 준 아이들도 등장했다. 그 때의 부모들도 역시 분개했었다. 방안을 상장으로 도배를 해도 성이 안차거늘, 책받침과 연습장에 서정윤의 홀로서기 시리즈는 뭔 얘기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밤새워 녹음하는 열정의 아이들은 누구란 말인가. 그 당시 아이들도 부모들의 입에서는 늘 술자리 오징어 같은 존재였다. 누구의 얘긴가. 바로 우리의 기억나지 않는 과거의 이야기다. 애써 부정하지 말자. 삶의 모든 아이러니는 바로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거늘.
#3.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인내’의 열매를 맛보았다는 거다. 달거나 혹은 쓰거나, 사람에 따라서는 무미건조했을 수도 있다. 그 맛은 사람마다 다르다. 태생이 나름 훌륭해서 인내를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 또한 부러움의 대상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생에 있어 행복과 불행의 총량은 일정하다는 것이 행복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중론이기 때문이다.
동양고전에서는 인생의 세 가지 불행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소년시절에 과거에 급제하고, 부모형제의 권세가 높고, 자신의 재주가 뛰어난 것이 그 세 가지다. 세 가지 모두 부러움의 대상이지만 그 속에서 불행이 싹틀 수도 있음을 경고하는 의미이리라. 그래도 부러운 것은 사실이다. 주위에 일찍이 고시에 합격했지만 자기관리에 실패해서 끝이 좋지 않은 친구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일찍 피어난 꽃은 교만하지 않지만 쉽게 지고, 일찍 피어난(?) 인간은 교만하기 때문에 쉽게 지기 마련이다.
부모들이 맛보았던 참고 견딤에서 나오는 열매의 맛을 아이들에게 강요하지는 말자. 그 맛은 우리의 경험에서 나오는 극히 주관적인 맛일 뿐이다. 객관화할 수도 없고, 그 달고 쓴 것에 관해 미리 맛을 보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안 될 일이다. 생각보다 우리의 인생은 길다. 학원에서 선행학습 하듯이 인생을 땅겨서 살수도 없고 그리 살아서도 안 된다. 일모작, 이모작이 아닌 삼모작 이상의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축구도 후반전이 중요하지만, 인생은 초반보다는 중반 이후의 삶에서 실패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지금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에게 진정 의미 있는 공부를 스스로 하고, 인생의 꽃망울로 불리는 ‘십대’를 마음껏 즐기는 것 빼고 무엇이 있겠는가. 그때그때 누려야 할 삶의 즐거움은 따로 있다. 아이돌 스타에 열광하고, 선생님을 짝사랑하고, 거친 욕을 입에 달고 사는 것도 한때다. 일정한 시기가 지나가면 아무리 애를 써도 다시 뒤로 돌아갈 수 없다. 인생에도 당연히 불가역성의 법칙이 적용된다.
오히려 우리 아이들이 너무 빨리 삶의 경계와 인내를 배우고자 하고, 그 결론까지 알아보고자 하는 조급함을 경계해야 한다. 큰 길에도 지름길이 없지만 긴 인생 또한 그렇다. 인생은 한권의 책을 쓰는 것과 같아 앞 페이지를 채우지 못하면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 수 없다. 흔들리고 방황하는 ‘십대’의 한 페이지를 꽉 채울 수 있도록 그들의 처진 어깨를 두드려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