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소설을 다 읽고 난 후엔 신음이 내뱉어진다. 티 안 내려고 숨죽이자니, 현기증도 나는 것이, '파이 이야기'를 통해 이 작가가 심상치 않음을 익히 느꼈었지만, 읽으면서도, 다 읽고 난후에도 뭐지 이 사람? 하는 생각이 들어 온다. 이 책을 자기의 인생 책이라고 말하는 이웃들도 많았지만, 난 이 책이 이 작가의 최고이지 않을까? 더 이상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더 읽어봐야겠지만..
'얀마텔'은 캐나다의 외교관 아들로 태어나서 알래스카, 프랑스, 멕시코, 코스타리카 등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성인이 되어서는 이란, 터키, 인도 등을 여행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철학을 전공하고, 다양한 직업을 거친 후, 27세부터 글을 썼다고 하는데, 일단 남다른 삶의 경험이 그의 이야기의 원천이 되겠고, 철학적인 사유가 또 그냥 흥미로운 소설을 넘어 서는 무언가를 던지기에, 내가 접한 이 두 책에서 나는 숭고함 마저 갖게 된다.
책은 세 개의 부제로 이루어져 있다. [집을 잃다], [집으로], [집].. 그리고 각자 다른 이야기, 다른 시대를 사는 주인공들의 삶이지만, 어떠한 단서들로 연결되어 있다. 이 연결이 경이롭고 매혹적이다. 주는 상실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세 남자의, 고통의 극복 보다는, 승화도 아닌, 치환쯤 되려나? 그러나 독자에겐 결국 승화로 남는다고 봐야 할 듯..
암튼 고통은 극복할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결국 고통 속에 떠나보내고, 떠나야 할 존재일 테니까...
이런 고통과 상실의 이야기는 애써 외면해 보자는 주의인데, 책을 읽는 내내 고통의 정서보다는 마력에 사로잡힌다. 남미 특유의 마술적 리얼리즘을 약간 버무린 탓에 ..
그리고 작가의 장치에..
[집을 잃다]
학예보조사라는 직업을 가진 '토마스'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의 거듭된 사업 실패로 가난하지만, 아프리카의 토산품 무역으로 큰돈을 번 부자 숙부 덕으로 살고 있다. 그는 숙부 집의 하녀 '도라'를 통해, 사랑과 성에 눈뜬다. 둘 사이에 아들 '가스파라'라는 사생아도 태어나지만, 숙부의 냉담 속에 결혼은 하지 못하고, 더 자주 숙부 집을 드나들면서 셋이 함께 어울린다.
그리고, 5세의 아들이 디프테리아로 죽자, '도라'도 죽고, 아버지도 죽는다. 죽음의 3연타, 이 일이 모두 일주일 사이에 일어난다.
'토마스'는 그 이후 뒤로 걷는다. 마을 사람 모두 위험하다고, 특히나 숙부의 걱정이 태산이지만, 이 비극의 주인공은, 애도보다는 신에게 반발하는 마음으로 뒤로 걷는다.
그즈음, 대주교의 포르투갈 전역에서 수집한 유물들을 박물관에 기증하기 위해 물건을 정리하는 중 오래 방치되었던, 목록에도 없는 낡은 책을 발견한다.
하도 읽어서 절로 외워진 이 책은 회복할 수 없을 만큼 황폐해진 '토마스'에게 사는 이유가 된다. 15세기 말부터 포르투갈의 식민지였고, 노예무역의 거점지였던 앙골라에 있던 항구에 파견된 '율리시스'라는 신부의 1631년부터 1635년까지의 기록이 담긴 일기이다. '율리시스'는 그 노예들을 하느님의 길로 안내하는 사제였다.
'이곳이 집이다. 이곳이 주께서 나를 품어 데려가실 때까지 주신 집이다'. 이 문구에 끌린다. '토마스'는.. 집이 없다는 것에 ..이 문구를 마음에 새기며 '율리시스'의 심한 향수병과 그 신부가 그린 독특한 얼굴 드로잉을 들여다보며 소일하던 '토마스' 는 '율리시스'의 그림 속 슬픔에 젖은 눈매에 빠져들어 아들을 잃은 기억을 되새기기도 한다.
노예(대부분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 세례를 주던 '율리시스'의 어느 날 일기에서 그가 선물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그 물건의 흔적을 좇으며 몇 달을 보낸다. 1년의 연구 끝에 그 선물은 십자고상이며 편지를 통해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 있는 한 교회에 선물로 보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십자고상이 예수를 독특하게 묘사했다는 사실도..
'율리시스'는 노예들의 사제를 자처해서 떠났었다. 나는 낮은 자들 가운데, 가장 낮은 자들, 인간은 잊었지만, 신은 잊지 않은 영혼들을 섬기고 싶다고,, 그러나 노예들의 침울한 행동과 무력감의 신호로 손으로 땅을 파서 흙을 빚어 먹던 토식증을 보면서 그들의 자유는 죽어서야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괴로워한다.
그리고 '신이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한짓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하기 위해 이 물건을 만들겠노라'는 다짐을 한다. 그는 성당에서 고함을 지르고 반항을 하고, 미사를 방해하는 소동을 벌이고 주교에게 말한다. '동등하지 않은 자들을 만났고, 그 만남에서 그들이 동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우리가 그들보다 나을 게 없으며, 사실 우리가 더 못하다'고.. 그리고 파문을 당한다. 그 이후 '율리시스'는 자신의 사명이, 죽음이 그를 데려가기 전, 신을 위해 선물을 만들 겠다며, 인간이 자초한 파괴를, 우리가 동산에서 몰락한 것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증언하겠다고 한다.
그리하여 '율리시스'의 고뇌에 찬 창작물을 찾는 것이 '토마스'의 과업이 된다.
1년간 뒤로 걷는 것으로 표출한 분노와 절망을, 관습에 어긋나는 십자고상으로 표출하고픈 ..
어렵게 열흘의 휴가를 얻어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 가기로 한 '토마스'를 위해 부자 숙부는 프랑스산 자동차를 빌려준다. 각종 먹거리와, 모피옷과, 장비들, 자동차 매뉴얼까지 살뜰히 챙겨서,
1900년대 초는 아직 마차와 말이 교통수단이어서 자동차란 물건은 낯설었다. '토마스' 역시 매뉴얼을 들여다보며 자동차와 씨름을 하듯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험난한 여정을 나선다.
어렵사리 도착한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는 산이 없었다. 언덕과 초원들뿐이었다.
그 마을의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그의 자동차만 보면 신기해하며 마구 달려 든다. 그리고 어떤 작은 아이를 친다. 부딪친 아이가 죽었는지? 아이가 맞는지?, 멀어지면서 구토를 하고, 결국엔 낮고, 단순하고 소박한 교회에 도착을 한다.
그리고 그 십자고상, 예수의 형상에 놀란다. '율리시스'의 스케치, 다른 예수상 모두를 조롱하는, '보라고, 당신이 내 아들을 데려갔으니. 이제 내가 당신 아들을 데려가는 거'라고 중얼거린다. 그리고 자기가 친 아이를 생각하고, 다시 토하고, 흐느낀다. 절규한다. 우리는 멋대로인 동물이다. 그게 우리이고 우리는 우리일 뿐 더 나은 무엇이 아니다. 더 숭고한 관계 따윈 없다.
* 토마스의 고통 만큼 율리시스 신부의 고통도 다가오는 이야기이다.
[집으로]
'에우제비우 로조라'는 병리학 과장으로 의사이다. 그는 시신의 부검을 통해, 죽음의 보고서를 만드는 일을 한다. 그는 시신의 응고와 액화는 견딜 수 있지만, 감정의 응고와 액화는 견딜 수 없기에 전문분야를 이 일로 선택했다. 표면상으로는 무자비한 데가 있는 직업을 가졌지만 부드러운 마음의 소유자이다.
죽음에 대한 인내심이 없다고 그가 말하는 그의 아내는, 책을 많이 읽고 유창한 말솜씨를 가진, 50대의 나이임에도 여전히 심오하고도 아름다운 여인이다. 38년간의 결혼생활을 이어오는데, 이 부부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광팬이다. 신작을 서로 돌려보며 토론하기를 즐긴다.
1938년 12월 마지막날, 부검 작업실에 아내 '마리아 루이자 모타알 로조라'가 나타난다.
"우리 모두는 육신 속에서 고통을 받다가 죽어요. 예수는 우리에게 죽음이라는 무거운 짐을 덜어주어요."
"예수를 죽인 것은 로마인도 유대인도 아닌 익명의 군중들이며, 우리 모두의 죄라고.."
"자연사는 처음부터 없다. 모든 죽음은 살해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부당하게 빼앗긴 것으로 느껴지니깐.." 이런 대화를 나누며
죽음에 대한 해답은 믿음이란 말을 남기고, '애거사 크리스티'의 신작 '죽음과의 약속'을 선물하고 돌아간다. 문을 나선 그녀가 다시 돌아왔나 했을 때 다른 여인이 들어온다. 검은 상복 차림으로 가방을 들고는, 그녀 역시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포르투갈의 높은 산이라는 시골마을에서 왔다는 그녀 '마리아 도르스 파수스 카스트루'는 자신의 가방에서 남편의 시신을 꺼내면서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았는지를 말해 달라고 한다. 밖에 나갔다 오니, 커피를 마시고 있던 남편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고, 그리고 부검하는 것을 직접 보겠다고도 한다.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해서 60년간의 부부생활을 해왔다고 말하는 그녀는 보통의 시체부검이 흉부와 두부 위주인데, 발부터 시작하자고 제안을 한다. 의아해하며 발바닥을 절개하자 토사물이 나온다. 놀라고 있는 그에게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죽었다고 말한다. 그 이후로 부부가 서로 원망하고 발톱을 세우면서 살았노라고,
늦둥이로 얻은 아들이 5살 나던 해, '라파엘'은 농장으로 일하러 가면서 아들을 데리고 간다. 그리고 그 아이를 잃고는 뒤로 걷기 시작한다. 난생처음 본 자동차란 기계를 몰고 왔던 그 이방인, 그럴 수 없이 슬픈 얼굴로, 애절과 비통으로 얼룩진 얼굴을 한 채로 뒤로 걷던, 교회에서 만난 그 이방인을 떠올리며 뒤로 걸었다고.
발바닥뿐 아니라 두발, 다리에서도 토사물이 나온다. 어느새 부검은 그녀의 지휘 아래 있다. 이어 양팔에서는 망치, 부젓갈, 긴 칼, 진흙 덩어리, 포크, 머리에서는 장난감과 거울 등이 나온다. 그리고 복부에서는 침팬지와 새끼 곰이 나온다.
상복을 벗어던지고 부검 대위에 알몸으로 올라선 그녀는 라파엘의 몸속에 자리를 잡고 함께 봉합해달라고 말한다. "여기가 집이야, 여기가 집이야, 여기가 집이야~" 하면서.
그리고 새해가 시작된다. 간밤에 그를 찾아왔던 아내는 산책을 나갔다가 사라졌었다. 그녀의 것이었던 '애거사 크리스티'의 책들이 발견되고 바위 틈에 낀 그녀의 시신이 발견되자, '로조라'는 직접 아내의 부검을 맡았다. 죽음의 단서는 찾을 수없었다. 생각이 깊고, 독실한 크리스천이자, 별나기도 했던 그녀의 죽음은 유서도 없고, 악천후 속에 돌아다닐 이유도 알 수 없었다. 인정이 많고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행복한 여인이었던, 그리고 그가 너무도 사랑했던 그녀의 죽음은 미궁에 빠진 살해 미스터리로 남았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미스터리는 해답이 있었지만은..
간밤 그를 찾은 아내의 혼과, 남편의 몸속으로 들어간 또 다른 '마리아'를 겪고 깊은 잠에서 깨어난 닥터 '로조라'는 꺼이꺼이 크게 흐느낀다. 그리고 '마리아'의 가방 속에 '라파엘'의 부검서와 그의 몸에서 나온 물건들이 담겨 있다.
* 의학의 본질적 사명은 고통을 완화시키는 것이다는 명제가 와닿음.
[집]
1981년 62세의 '피터로비'는 캐나다의 상원 의원이다. 그에겐 40년의 결혼생활을 함께 한, 사랑하던 아내 '클래라'가 있었다. 그녀를 병으로 잃은지 6개월이다.
그녀가 병중에 있을 때 아들의 파경을 맞이했다. 의료연구인 그들의 아들 '벤'은 '피터'의 중재에도 양육권마저 아내에게 빼앗기고, 며느리와 10대의 손녀 '레이첼'은 밴쿠버로 떠난다.
그리고 그는 유령처럼 살고 있다.
어느 날 의장은 그런 그에게 미국 오클라 호마로의 여행을 권유한다. 의원들 초대에 공석 자리가 있다면서..
'피터'는 동물 관련 일을 했던 아내가 좋아했던 동물원 방문을 하고자 의뢰 하지만 보수작업 중이라 출입할 수가 없다면서 유인원 연구소인 침팬지 보호소를 추천받는다.
진화론적으로 인간과 가장 유사한 침팬지를 연구하는 것이 결국엔 우리의 모습을 연구하는 것이라는 직원의 안내로 우리를 살펴보다가 큰 덩치와 까만 털, 그리고 지르는 소리에 놀라고 공포에 짓눌리다가 어느 한 침팬지의 눈빛에 끌리게 된다.
아내가 떠난 후 그렇게 충만하고 진솔하게 열린 문 같은 눈으로 쳐다봐준 사람이 없었음을 깨닫고, 침팬지가 보내는 눈빛에 사로잡히고, 침팬지가 내민 손을 위험하다는 경고를 뒤로하고, 맞잡으면서 '피터'는 그 침팬지를 사겠다면서 거금을 제시한다. 그 침팬지의 이름은 '오도'이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수없이 후회도 해봤지만, 결국엔 그 침팬지를 키울 수 있는 장소를 찾게 된다. 아내와의 추억이 가득한 지금의 집과 가구들을 정리하면서 그는 부모의 고향이었던, 그가 두 살 때 떠나온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오도'와 함께 가기를 도모한다.
아프리카에서 야생 포획된 이후 한때 나사에서도 있었다는 '오도'는 주유소마다 나무에 올라가 잠을 자고, 깨기를 기다려 움직여야 했으므로 예약된 항공편을 뒤로 미루며 수수료를 내야 했다. 비행기를 내려서 자동차를 구입하고,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향하면서도 '오도'와의 알 수 없는 교감은 때로 '피터'를 공포의 도가니에 몰아넣기도 한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는 역시 산이 없었다. 숲이 높은 골짜기일 뿐이다. 마을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통해 낡은 집을 구하는데, 사람들이 청소며 수리며 모두 거들어 준다.
'피터'는 시계를 풀어 버린다. 새들이, 교회의 종소리가, 벌레 떼가, 매미와 귀뚜라미가 시간을 일러준다. '오도'와 함께 요리를 하고, 털 고르기를 하고, 카페를 순례하고, 숲을 산책하며 지낸다. 마을 사람들도 낯선 '오도'에게 익숙해진다.
'피터'는 아무 생각 없는 '오도'의 순수한 행동을 보면서, 인간의 특징인 생각이 오히려 어설프게 한다는 느낌을 갖는다. '오도'의 감정을 감지하고자, 쉽고 자연스러운 '오도'의 행동을 이해하려고 분석하면서 그는 침팬지 '오도'를 따라 하고 싶어진다.
전기와 전화기도 없이 지내면서, 숲 탐험의 일과를 보내는 중, 그의 생활을 염려하는 아들 '벤'과, 동생 '테레사'와 통화도 하지만, 의장의 전화로 상원 의원 직을 사임을 하면서, 인간은 피로를 안겨주고 시끄럽고 성미 까다롭고 오만하고 믿음이 가지 않지만, '오도'의 곁에서 느끼는 강렬한 고요와 더딘 움직임, 대담하고 간결한 수단과 목적이 더 좋다고 말한다.
어느 날 마을의 장례 조문 행렬의 조문객들이 뒤로 걷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그들은 뒤로 걷기를 통해서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아들 '벤'이 열흘의 휴가를 얻어 찾아온다. 2년 만의 만남이다.
'오도'를 무서워하고 경계하던 '벤'과 지내면서 '오도'가 가져온 '애거사 크리스티' 의 포르투갈어 판 책을 보게 되는데, 그 책이 어디서 났냐고 '오도'에게 묻자, 가방을 가리킨다. 그 가방에는 부검 보고서와 함께 온갖 물건들이 있었다. 남편 '라파엘'의 몸을 집으로 여긴' 마리아' 그녀의 가방이었던 것이다. 그 책은 '죽음과의 약속' 이었고..
그 가방을 통해 자신이 머물던 집이 누가 살던 집이었는지가 궁금해진 '피터'는 자신의 집을 구해준 여인을 찾아 나선다. 가족사진을 들고..
그녀는 사진 속 '라파엘'과 '마리아' 그리고 아이를 가리키며 '황금 아이'라고 말하고는 '피터'를 교회로 데려간다.
부검 보고서에 있던 83세에 죽은 '라파엘'은 '피터'의 외가족 종조부였다. 이민을 떠나게 된 자신의 부모로부터 들은 이야기도 있었던 듯하다.
그 교회에는 오래된 자신의 사진 속 그 아이의 사진이 있었다. 농장 일을 도우러 떠났던 아버지를 따라나선 이 아이는 도로변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마을 사람들은 죽어 있는 아이의 상처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상처와 일치한다고 생각했다. 그 지역에 처음 등장했던 자동차 사고라기엔 증거도 없고, 미스테리 했다. 그래서 신이 한 일이라고 받아들였다. 천사가 하느님께 데려가려다가 아이를 떨구었노라고, 천사가 떨군 게 미안해서 그 아이에게 특별한 능력을 주었노라고, 그래서 그 아이에게 기도를 하면 임신이 된다는 것이었다.
한때 가난한 마을에 태어난 이 아이는 마을 전체가 사랑했던, 살아 있는 풍요와도 같은 아이였다. 그래서 그 아이를 '황금 아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자신이 '오도'와 함께 살던 그 집이 '라파엘'이 살던 집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집은 '오도'와 함께 하는 이야기였음을 깨닫는다.
'벤'은 그 교회에서 특별한 십자고상을 발견하고 가리킨다. '피터'는 응수하고 '오도'의 존재에 대해 '벤'에게 고백한다. '오도'는 내 삶을 채우고 있다고, '오도'가 내게 기쁨을 가져다준다...
'벤'을 놔두고 '오도'와 산책길에 나선 '피터'는 큰 바위에 올라 자신에게 손짓하는, 평소와 좀 다른 '오도'를 따라 급경사의 바위에 오르며 심장이 두근거리고 가슴의 통증을 느낀다. 그리고 '오도'의 시선이 멈춘 곳에서, 이베리아 코뿔소를 발견한다.
흐느끼던 '피터'에게 '오도'는 포옹을 해준다. '오도'의 든든하고 완전한 포옹 속 '피터'는 고통에서 벗어난다. 슬픔에 겨운 기침을 하던 '오도'는 이베리아 코뿔소를 향해 내달린다.
* 커다란 상실을 겪고 고통을 안은 채 남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미스터리니, 판타지니 하는데 그건 아주 작은 양념에 불과하다. 하지만 또 간과할 수 없는 주된 맥락이기도 하겠다. 슬픔을 바라보는 책이지만, 슬픔에 겨워지는 책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아름답다. 그리고 종교적 배경이 있지만, 종교의 이야기도, 절대자를 향한 어떤 것도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인간 자체를 향한다.
인간의 고통은 극복할 무언가가 아니라면, 받아들일 무엇인가? 이 책을 읽은 후의 나는 인간의 고통이, 삶이 이어지는 동안에는 함께할 무엇이라는 결론을 조심스레 내려본다. 삶의 이면이 어쩌면 고통은 아닌지..'얀마텔'이란 이 천재 작가는 공허하고 허기진 인간이 갈구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주는 사람인 듯하다.
* 나의 집은 어디인가? 인간의 집은 어디인가? 영원한 안식을 주는 완전한 포옹을 내게 해줄 존재는 무엇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