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미국 문학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하나라 일컫는 '윌리엄 포크너'는 194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다. 노골적인 제목이 주는 불편함 때문에 사놓고도 망설였던 작품인데, 결국은 '포크너'를 읽어야 했기에, 이 책으로 입문한다.
첫 몇 장을 가볍게 패스하지 못해서 서너 번은 도돌이표를 찍어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곱 명의 가족과 그의 이웃들, 그 가족의 여정에서 스쳐 지나며, 그 가족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이름이 각장의 제목이며 그들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번드런 가(家), 그 가족의 여정이란, '앤스 번드런'의 아내, '애디 번드런'의 매장을 위해, 40마일 떨어진, 그녀의 친정 가족 묘지로 마차를 타고 그녀의 관과 함께 가족 모두가 이동하는 길이다.
아버지 '앤스 번드런'은, 아내와의 약속이었다면서, 현재 살고 있는 곳에서 가까운, 번드런 가의 가족 묘지를 두고, 열 배나 더 먼 거리에 있는 처가의 가족 묘지로 옮겨야겠다는 의지가 확고하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유언대로, 가족의 손으로, 즉 그들의 장남 '캐시'가 짠 관에 누워있다.
그녀 '애디'는 꼬박 열흘을 꼼짝 않고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창밖으로 '캐시'의 목재 자르는 소리와 모습을 보면서.. 그녀는 아픈 것도 병든 것도 아니고 그냥 피곤할 뿐이었다 한다. 남편 '앤스'에게 그런 아내의 모습은 죽을 생각만 하는 것처럼, 죽으려고 작정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애디'는 사내아이 넷과 딸아이 하나를 낳았다.
'캐시', '달', '주얼', '듀이 델', '버더만'.
장남 '캐시'는 훌륭한 목수이지만, 교회 지붕에서 떨어져 다리를 전다.
엄마의 성품을 가장 많이 닮은 둘째 '달'은 애정을 품을 줄 아는 아이이다.
그리고 보석이란 뜻의 '주얼'은 말썽을 일으켜 엄마의 속을 가장 썩이는 아들인데 '애디'는 그 아들을 편애했다.
반쯤 벗고 다니는, 시골 소녀치고 예쁜 열일곱의 '듀이 델'은 죽어가는 엄마의 병상을 지키며, 부엌일을 챙긴다.
보살핌이 필요한 막내 '버더만'은 낚시를 좋아한다.
그들의 아버지 '앤스'는, 땀을 흘리면 죽는다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참 기독교인이고자 노력하며 사는 선량한 이웃들의 신세를 당연시하면서 때론, 이용해 가며 살아가고 있다.
아이들을 제대로 키우려고 애썼던 '애디'는 둘째 '달'을 낳고 자신이 죽으면 친정의 가족 묘지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편에게 말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우리가 살아 있는 이유가 오랫동안 죽어 있을 준비를 하기 위해서'라고 늘 말씀해왔었는데 비로소 그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 십 년 터울로 '주얼'을 낳고 그 '주얼'에 대한 속죄로 남편에게 '듀이델'과 '바더만'을 낳아주었다고 한다.
밤낮으로 톱질하는 '캐시'의 수고에도 관의 완성은 더디고, '애디'의 촛불 같은 목숨은 아직 붙어있을 때 '앤스'는 두 아들, '주얼'과 '달'에게 3달러를 벌 수 있다면서 벌목일을 내보낸다. 아이들은 그새 엄마가 어떻게 될까 봐 불안해하며 일하러 떠난다.
'앤스'는 자신의 불운이 길이 만들어진 때문이라고 여긴다. 집 앞에 길을 내면서 세금을 내라 하고, 그 탓에 '캐시'가 목수가 되었고, '달'이 땅만 바라보고, 아내가 아프다는 것이다.
'앤스'는 돈이 아까워서 아내의 임종 직전에나 의사 '피바디'를 부른다. 그 가족이 사는 집은 절벽 위에 있다. 뚱뚱하고 늙은 의사는 '앤스'의 전갈에 그녀의 시간이 이미 다 했음을 직감했고 그가 도착하자 몸져누운지 열흘만'에 '애디'는 눈을 감는다.
온 가족이 '앤스'가 미리 준비해둔 마차에 올라 장례를 위한 이동을 하려는데 며칠째 큰비가 내려 강물이 불어 다리가 떠내려갔다. '애디'의 주검은 삼 일 동안 관 속에 있고 '주얼'과 '달'은 빈털터리로 돌아왔다. 폭우 속 그 가족의 장례 행차는 장엄하기 보다 치열하다.
자기 몸에서 태어난 아이들 모두 자기의 주검과 함께 마차를 타고 가기를 원했던 그녀의 바램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주얼'은 별도로 말을 타고 동행한다. 사내 중의 사내 '주얼'은 무뚝뚝하고 공격적이지만, 그만의 방식으로 집안의 궂은 일들을 해결하기도 한다. 그가 탄 말은 그가 한때 가족들 몰래 잠을 아껴가며 노동한 대가로 구입했던 좋은 품종의 말이었다.
그들은 강의 다른 곳을 돌아 아직 남아있는 다리를 찾지만 대부분 떠내려갔고, 할 수 없이 강에 빠진채로 건너는 시도를 한다.
마차를 끌던 노새들이 물에빠져 죽고, 물속에서도 어머니의 관을 지키려던 '캐시'는 끝내 관을 놓치고 부상을 입는다. 그가 소중히 여기는 연장들과 어머니의 관이 물속으로 가라앉고, '주얼'의 맹활약으로 대부분 건져내는데 아버지 '앤스'는 그런 광경을 그냥 바라보기만 한다.
남은 길을 가려면 또 노새가 필요했다. 아버지 '앤스'는 상의 한마디 없이 '주얼'의 말과 노새를 바꾼다. '자신은 15년 동안이나 이빨도 없이 살고 있는데, 너도 말없이 살수 있지 않겠느냐'며..
꼴사나운 사람, '앤스'는 누군가는 꼭 요절을 내고 마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들의 여정은, 썩는 시체에서 풍기는 악취로 물든다.
그들이 지나가는 곳에서는 신고까지 들어오기도 한다. 언덕을 만나면 모두 내려서 걷고, 이때 부상당한 '캐시'는 엄마의 관위에 누워있고, 노새를 끄는 아버지는 제외이다.
별거 아니라며 부상을 견디고 있는 '캐시'의 다리가 검게 변하고,
마차가 쿨럭거릴 때마다 부러진 다리가 흔들려 고통스러워하자, 아버지 '앤스'는 시멘트를 구해와서 다리를 고정시킨다.
그들이 묵던 헛간에 화재가 발생하고, 가까스로 관을 꺼내낸, '주얼'은 화상을 입는다.
그 화재는 마차에서 실없이 웃어대던 '달'의 소행이었다. 눈치챈 가족들은 쉬쉬하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좋은 기독교인을 찾아서 도움을 받고 엄마의 매장을 끝낸다.
그는 딸, '듀이 델'이 가족몰래 낙태를 하려고 남자친구가 건네준 약값 10달러를 가지고 있는것을 보고는 꼬드겨서 빼앗아 버린다.
자꾸 사라졌다가 나타나던 아버지는,
가족의 귀갓길에 축음기를 든 한 여인을 동반하고 나타나 새엄마라고 한다.
그리고 그의 쭈글하던 얼굴은 빛나는 의치 덕에 비열하게 더 빛나고.....
이 가족들은 정말 고집이 세고, 타협이란 게 없다.
아버지 '앤스'는 정말 징글징글한 사람이다.
애들이 모두 제멋대로인데,, 답이 없지만, 엄마의 유언을 지키려는 노력만은 거룩하다 할 수 있다.
실험적인 시도를 많이 했던 작가로 알려져 있듯이, 이 책의 서술 방식은 독특하다. 서술자의 이름이 붙여진 각 장은, 그 서술자의 시점으로 독백하듯 이어지는데 후반부에 가서는 '달'이 '달'을 3인칭 시점으로 서술하고, 이 부분이 정신 나간 자의 영역인가 했고,
죽은 '애디'의 장에서는 '애디'가 '주얼'의 출산과 관련해 남편에 대한 속죄 부분과, 그녀의 죽음에 불려온 마을의 목사가 서술자인 장에서, '주얼'이 그들의 불륜의 씨앗이던가를 짐작해야 하는데, 제대로 해석한 게 맞는지.. 작가의 상징과 메타포가 난해한데, 또 책 읽기는 비교적 수월한 편이다. 이런 작가의 상상력을 어찌 나 같은 독자가 다 가늠할 수 있겠는가..
답답한 현실속, 가족 구성원과 그들의 기이한 장례여정을 묘사하는 문체의 서정, 독백으로 이루어지는 각 사람들의 심리 묘사가 여운을 남긴다.
일종의 부조리극 같다. 희곡으로 재탄생 해서 상연이 되어도 좋겠다 싶다. 왜 자꾸 [고도를 기다리며]가 떠오르던지..
- 머리는 명석한데 삶에 대한 성찰과 느낌이 없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상상력도 없다. 그런 사람들에게 포크너를 권하고 싶다. 한 점으로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하며 존재가 확대되는 기쁜 체험이 있길 바란다. 309(작품해설)
작품 해설의 끝머리이다. 삶에 대한 성찰은 좀 더 나이 들어 해도 된다. 한 점으로 작아지는 자신도 한참 후에 경험해도 된다.
일단 젊은 날엔 명석한 재주로, 자신의 존재를 한없이 키워가며 그냥 삶을 살면 된다. 그런데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상상력 부분, 그래서 작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독백으로 이 책을 엮었던가.. 누구나 다 자신의 관점으로 생을 살고, 자신의 관점으로 이야기하며 자신에게 함몰되어 있기에, 타인을 향한 진정한 이해는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하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