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땅에 펀드 - 땅, 농부, 이야기에 투자하는 발칙한 펀드
권산 지음 / 반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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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받고 어떤 책일까 궁금해 살짝 몇장을 넘겨 보았다.

그런데 한장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진격의 대평댁(할머니)'의 사진이었다.

감자밭으로 씩씩하게 걸어오고 있는 대평댁 사진을 보고 대평댁(할머니)의 매력에 빠졌다.

'호랑이 똥구녕을 씹어불겄네!'라는 말을 자주 하신다는데 요즘 말로 '음성지원'까지 되는 듯했다.

책의 내용도 보기 전에 사진 한장에 빵~하고 터져버린 것이다.

와~어떻게 이렇게 표지를 잘 만들었나.

 

 

 

원래 '투자'나 '펀드' 같은 재테크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유는 단지 '원금 보장'이 어렵다는 것이 이유다. 어렵고 힘들게 번 돈, 그 원금을 손해본다는 것은 피같은 돈이기에 정말 그런 위험을 안고까지 투자를 해 큰 돈을 벌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번도 '펀드'에 투자를 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런 맨땅에 하는 '펀드'라면 관심이 생긴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어디쯤 되는 지리산 한 자락에 '맨땅에 펀드'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도시 사람들이 시골에 오는 '귀농(또는 귀촌)'이라는 것에 환상을 가진 듯하다.

농촌에 가서 텃밭 가꾸고 텃밭에서 나온 농작물로 반찬을 해서 먹는 그런 환상 말이다.

농촌도 나름 사람 사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 사람들과는 다르겠지만 스트레스도 있고 고충도 있다. 그런데 그런 생각에서인지 어떤지 지리산자락에 귀농을 해 사는 도시 사람들이 만든 작은 모임(?)이 있다. 그들은 '땅과 사람에 투자하라'는 문구로 투자자를 모집한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100명 투자자가 고집되고 일인당 30만원의 투자금을 받아 농사를 짓기 시작한다. 공통 텃밭은 구입하고 감나무밭을 임대하고 작물을 심기 전에 심을 수 있는 땅으로 만든다.

그리고 첫번째 작물인 씨감자를 심는다. 농사를 지어본 적도 없고 귀농한지 몇년 안되는 그들이 이런 어마어마한 1년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 있었던 데에는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든든하고 항시 대기중인 '펀드 매니저'들이 다수 보유(?)하고 있기에 '맨땅에 펀드'는 시작할 수 있었다. 펀드 매니저들은 30~40년 이상의 경험자들로 그들이 없었다면 1년 농사는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이 안간다.

 

 

펀드의 성격상 모든 농작물은 유기농을 원칙으로 한다. 하지만 농사를 지어보면 안다.

벌레도 쉽게 생기고 농약을 쓰자니 많은 양도 아니고 팔 것도 아니라 그냥 두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수확량이 적어 투자자들에게 돌려줄 양이 줄어들게 된다. 하지만 한해 동안 열심히 일한 것이니 500원짜리 작은 감자부터 시장에 나가서 팔아도 될만큼 토실한 감자까지 수확을 한다.

 

농사 초보자들이 직접 지은 감자 농사. 크기는 보잘것 없지만 그 정성도 보잘것 없을까.

땀흘려 지은 농사를 직접 수확해 투자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나눠준다.

잠자 파종을 시작으로 봄엔 고구마, 땅콩, 토란 등을 심어 수확한다. 그리고 추자자들에게 산지직송으로 택배 배달을 한다.



 

작은 수확이지만 수확의 기쁨을 알게 되었지만 곧 여름 태풍이 닥친다.

여름 태풍은 누구의 감나무, 누구의 벼를 구분하지 않고 농작물에 손해를 입힌다.

태풍이 지난 후 여름 매실을 따고 매실 효소를 만든다.

 

'맨땅에 펀드'는 수확한 농작물을 그대로 배송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작물을 이용한 반찬이나 다른 건강 식품을 만들어 보내기도 한다. 이런 배당금이라면 건강과 만족을 한꺼번에 얻을 수 있는 펀드가 아닐까 싶다.

 



가을엔 감밭에 도둑이 들어 누군가 많은 양의 감을 곱게, 깨끗하게 따가는 일도 발생한다.

그런 노력을 무참히 짓밟은 도둑(?)을 보며 흔하게 일어나는 농작물 도둑들이 생각났다.

1년을 고대하고 기다리며 땀흘려 키운 작물을 아무런 수고도 없이 가져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농민들을 두번 울리는 일이다. 매년 폭락하는 농작물의 가격 하락과 함께 말이다.

 

겨울엔 배추를 키워 김장까지 담근다.100명의 투자자들에게 모두 보낼 김치는 엄청난 양으로 며칠을 벌여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겐 무작정 달려와 주는 펀드 투자자들이 있었고 그들의 노력으로 김장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1년 농사가 마무리 되었고 '맨땅에 펀드'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를 한다.

1회에 의한 '펀드'가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투자자들을 모집해서 펀드의 규모를 늘릴 계획이라고 하니 두고 봐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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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코스투라 1 - 그림자 여인 시라 샘터 외국소설선 9
마리아 두에냐스 지음, 엄지영 옮김 / 샘터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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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을 소재로 한 소설 중에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바로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이다. 어릴 적, 흑백 영화로 본 이 영화가 너무 인상에 남았다.

그때는 아무래도 글을 겨우 읽을 수 있을때인 것 같다. 어린 때였지만 그 영화가 너무나 재미있었다.

나중에 고등학생 때 다시 소설로 접하게 된 스페인 내전은 영화에서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수많은 장면들이 조금은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의 내용보다는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이 내 눈에 예뻐 보여 영화를 봤었던 것 같다. 아직도 여리면서 순수한 짧은 머리카락의 마리아가 기억에 오랫동안 남아 있다.

 

 

 

이번엔 스페인 내전의 또 다른 여주인공이 나오는 소설이다. <라 코스투라>는 스페인인으로 '바느질'을 뜻하는 말이다. 주인공 시라의 직업이 옷 디자이너이다.

물론 당시엔 그냥 '재봉사'였겠지만 말이다. 

 

시라는 이제 막 소녀티를 벗은 젊은 여자 아가씨다. 엄마와 단둘이 가난한 삶을 살아오던 시라는 모든 것을 엄마의 결정에 맡겨서 살아왔다. 그리고 장래를 약속한 약혼자와의 결혼을 앞두고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아버지를 만난다. 그 뒤로 세상이 변하기 시작한다.

아버지 곤잘로를 만나고, 때마침 만난 한 남자 라미로. 곧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고 시라는 약혼자와 결혼 할 수 없다며 라미로와 사랑의 도피를 한다. 얼마 뒤 시라는 라미로가 편지 한장을 두고 연기처럼 사라져버린다. 엄마의 말을 거스른 작은 변화도 혼란스러운 시라에게 일어난 일이다.

 

 

 

그런데 라미로는 그냥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시라가 가지고 있던 모든 돈을 가지고 가 버린것이다.

배신에 배신을 당한 기분의 시라는 실의에 빠진다. 큰 사기를 당하지 않아도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면 누구라도 앞이 캄캄하다고 느낄 것이다. 나라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사실 닥치지 않은 일을 상상하기 조차 싫을 정도로 시라의 상황은 막막했다.

 

 

 

시라는 자신에게 닥친 절망을 기회로, 희망으로 바꾼 사람이다.

자신의 고향도 아니었지만 새로운 친구들도 만나 고급 의상실을 열어 상류층 사람들과 만나게 된다.

그러면서 그녀의 인생이 달라지는데.......

 

사랑하는 남자에게 배신을 당하고 뱃속의 아이마저 유산하면서 온갖 일을 겪게 되는 시라.

소녀에서 여자로, 또 강한 여성으로 거듭나면서 시라는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간다.

시라는 축복 받은 자신의 재능으로 꿈을 찾게 된다. 그리고 인생도 찾게 된다.

내전과 세계 전쟁 속에서 시라가 어떻게 살아남는지 그 끝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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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알수집가
제바스티안 피체크 지음, 장수미 옮김 / 단숨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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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는 읽지 마라!! 책표지도 쳐다보지 마라!!!

 

여름밤 오싹하게 만들어주는 <눈알수집가>.

하지만 난 이 두가지 (나의) 경고를 무시하고 읽어버렸다. 그리고 밤새 공포에 떨어야했다.

보통 사람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잔인한 범죄의 사이코패스.

일어나면 안되는 범죄인 어린이 유괴범죄. 가장 잔인한 범죄가 사이코패스에 의해 일어나고 있다.

 

저항할 힘없고 작은 아이들을 유괴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잔인한데 살해까지 하다니.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며 책을 읽어나가야했다. 허구의 스토리지만 꼭 범인이 경찰의 손에 잡혀 최후를 맞기를 바랐다. 대리만족이라고 할까.

글이라도 범인은 꼭 잡혀 벌을 받는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사람을 죽인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기자 알렉산더 초르바흐, 접촉한 사람의 과거를 볼 수 있는 맹인 물리치료사 알리나와 범인인 눈알수집가가 이 스토리를 끌어가고 있다.

도시에서는 같은 범인에 의한 사건이 일어난다. 아이가 유괴되고 부모가 살해되고.....

이런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면서 도시는 혼란속에 있다.

범인을 당장에라도 잡고 싶지만 단서가 없다. 오직 살해한 사람의 왼쪽 눈을 가져간다는 것 외에는.

 

눈알 수집가를 쫒던 초르바흐는 자신이 범인을 보았다는 제보를 받고 제보자인 물리치료사 알리나를 만난다. 하지만 그녀는 맹인이다. 겨우 빛의 형태만 느낄 수 있는 그녀가 범인을 볼 수 있다는 것에 놀랐지만 알리나에겐 특별한 능력이 있다. 다른 사람을 만지면 그 사람의 과거가 보인다는 것이다.

초르바흐는 그런 알리나는 의심하지만 아무런 단서가 없던 그에겐 알리나가 유일한 희망이었다.

 

 

 

추리소설의 묘미는 범인을 주인공들과 함께 잡는 것이다. 아니면 내가 먼저 범인을 찾든지.

그렇기 때문에 소설의 줄거리는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다.

독일 추리소설이 이렇게 재밌는 줄 몰랐다. 한땐 일본의 추리소설에 빠져 밤새 읽곤 했다.

그런데 그것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비슷한 패턴에, 비슷한 트릭이 등장해 멀리하게 되었다.

범인을 잡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거나 중간엔 밋밋해도 마지막 5줄에 반전이 있다면 그것은 인상이 깊게 남고 재밌는 추리소설이라 한다.

 

식상해진 일본 추리소설에서 구해준 것이 바로 독일 추리소설이다.

유럽의 낯선 추리소설은 의외로 재밌고 구성도 탄탄하고 가끔은 액션 영화를 보듯 속도감도 느껴진다.

게다가 <눈알수집가>는 약간 괴기스럽게 신체 일부를 '수집'하는 사이코패스를 등장시키고, 범인이 정해놓은 시간 내에 사건을 풀어야 한다는 긴박감까지 독자들에게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

꼭 폭탄의 타이머처럼 한장 한장을 넘길때마다 째깍째깍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까지 들린다.

 

 

 

소설은 누구 한명의 시점에서 사건을 조사하거나 바라보지 않는다.

나오는 인물들 모두가 주인공이고 관찰자이다. 끝까지 누가 범인인지 단서도 없다.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을 번갈아가며 모든 등장 인물을 범인으로 의심하게 만든다.

모든 사람이 과거의 어느 시간에 한 무의식이거나 의식적인 행동 속에서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요소를 가지고 있으면, 모두가 용의자적인 성향이나 경험을 가지고 있다.

 

누가 범인일까? 누가 아이들을 납치하고 잔인하게 살해할까? 왜 범인은 그렇게 해야만했나?

 





 

<눈알수집가>는 첫장엔 '맺음말'이 마지막 439페이지에는 '첫장, 시작'이 있다.

특이한 구조의 책이지만 추리소설의 금기는 역시 마지막장을 보는 것이다.

구조는 거꾸로 되어 있지만 첫페이지, 맺음말부터 읽기를 권한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서 거꾸로 한번 더 읽어보면 새로운 재미도 느낄 수 있을 정도이다.

추리소설을 두번 읽는 일만큼 재미없는 것도 없지만 밝혀진 범인의 흔적을 찾아

역으로 읽어보면 그때 '왜 이사람이 이렇게 말했나?'하는 의문이 풀리면서

범인을 찾은 느낌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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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여름밤 서늘한 바람이 알려주는 것들
김유정 지음 / 자유정신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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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는 여행, 자신을 찾는 여행.

더운 여름날 밤, 나 자신을 찾는데 계기를 마련해 줄 책 하나를 만난다.

한창 나의 존재감에 대해 생각할 나이인 청소년 시기에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심각하게, 오랫동안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르셀이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 냄새를 맡으며 과거를 회상하듯, 여름날 밤의 개구리 소리에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한 책속으로 여행을 떠났다.

'나'는 어디에 있을까? '나'는 누구일까?

 

 

 

일상 생활에선 하기 힘든 이런 낯선 질문들이 고민의 늪으로 빠지게 했다.

'나'라는 존재를 알기 위한 탐구를 시작해야 한다. 조금은 철학적인 접근에서 말이다. 

지금까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존재인지 인식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왔다.

그런데 알고보면 '나'라는 존재는 무한한 능력과 힘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대부분 그 힘을 모르고 살아간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인생 역시 타인과의 투쟁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를 완성시키는 과정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나'라는 존재는 항상 변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변화속에서 자신을 찾기 힘들다. 우리 자신의 본질은 다양하고 복합적이라고 본다.
이 복합적인 본간의 본질은 학자들이 이렇다 저렇다라고 구분해 놓은 개념에 불과하다. 인간이란 일반론적인 본질로서는 파악이 어렵지만 개인의 본질로서는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쉽게 말해서 모든 인간은 이렇다라는 평균값을 내기는 힘들지만 개인의 본질은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에겐 다른 사람들과 다른 개성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절대 다른 사람과 개성이 겹치거나 일치하지 않는다.

 

솔직히 철학적인 사고의 내용은 좀 어렵다.
이해도 하기 힘들지만 생각을 오래하다 보면 그 문제에 대해 더 어렵게 느껴지고 도대체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든다. 답이 없는 질문 같으니까 말이다. 두꺼운 책을 다 읽고 며칠동안 고민도 했지만 원점으로 돌아온 듯하다. 마지막이자 첫질문으로 말이다.

 

과연 '나는 누구인가? 나의 본질은 무엇인가?'.

 

실패.

삶에서 실패란 없습니다.

사실만 있을 뿐.

실패와 성공을 판단할 수 있는 자는

누구도 없습니다.

신(神)과 나 자신밖에 없습니다. (p.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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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즐거운 사라
마광수 지음 / 책읽는귀족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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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이 낯설지 않았다. <즐거운 사라>. 1992년 작가의 소설은 음란물이라고 규정지어지며 작가가 감옥까지 가게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리고 곧 책은 "금서'가 되어 판매 금지된다.

당시엔 어렸기 때문에 책의 내용은 모른다. 당연히 지금은 판매금지가 되어 읽어보지 못한다.

 

작가는 자신의 판매금지 된 소설이 '해제'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20여년이 지난 지금 이 소설 <2013 즐거운 사라>를 썼다고 한다. 보통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자식'라고 표현을 한다.

산고를 거쳐 나온 하나의 작품이 아니라, 한명의 생명을 가진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자식'말이다.

작가는 그런 자식을 어두운 감방에 홀로 가두어 둔 심정일 것이라고 예상해 본다.

 

 

 

그런데 읽다보니 작가의 고백서인지 일기인지 혼동이 될 만큼 작가 자신의 감정을 듬뿍 이입을 시켜 소설을 쓴 것 같다. 소설 속 주인공 역시 지금의 작가 자신의 모습과 같다.

그렇다보니 더욱 작가의 일기인지, 수필인지, 소설인지 구분을 할 수 없다.

 

주인공 '나' 마광수 교수(전직)와 여자친구 루리, 루리의 친구 '사라', 이렇게 세사람이 중심인물이다.

나는 전직 교수로 '즐거운 사라'라는 책을 썼다 학교를 그만두었다. 여자친구 루리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여자이고, 친구 사라는 묘한 매력을 가진 여자지만 아름다운 루리를 너무나 질투하고 있다.

그런데 루리라 없는 자리에서 나와 사라는 부적절한(?)관계가 되고 사라의 미에 대한 탐욕은 줄어들지 않고 급기야 자신의 밋밋한 얼굴을 성형하려고 한다. 그렇게 루리에 대한 콤플렉스를 극복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나는 친구 성형외과의 박창일을 소개해준다.

 

 

 

 

대강의 줄거리는 접고 이 소설의 두 주인공 '루리'와 '사라'로 대표되는 현대 여성 둘을 볼 수 있다.

'루리'는 선천적으로 아름다운 자연미인이고 주변에 남자들도 많다. 회사원, 소설가 등등 마교수 이외에도 여러명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남자들과 일명 '엔조이'라는 명목으로 자유연애를 하고 있지만 속마음은 '플라토닉 사랑'을 더 갈구하는 유형이다.

 

반면 너무나 평범하고 보통으로 생긴 '사라'는 루리의 화려해 보이는 남성편력을 보고 자신의 외모를 바꾸어서라도 화려해지고 싶다. 완전 서구형인 얼굴뿐만 아니라 몸매로 바꾸고 연애를 하려한다.

사라가 자신의 외모를 바꾸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처녀성을 버리는 것이었다. 그런 것은 이제 필요없고 새로운 '사라'로 태어나는 것이다.

 

 

 

이 두사람으로 대표되는 여성상을 비판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 '마교수'를 좋아하고 마교수의 사랑을 받고 싶어한다.

사라가 자신이 상대적으로 루리보다 못생겼다는 생각에 성형을 하고 마교수에게 접근하는 것은 여자들이 성형을 하는 이유가 단순하게 남자에게 '사랑'을 받기 위함으로 비춰지는 것이 불편하다.

어떠한 성형도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여자들이 성형을 하는 이유는 여러가지다. 물론 최종적인 결과는 더 예뻐지기 위한 것이겠지만. 여자가 예뻐지는 것은 만족한다는 것이다. 남자의 사랑은 그 다음 문제이다. 단순하게 남자들의 관심과 사랑을 바라며 얼굴에 칼을 댄다고 생각하지 말기를.

 

그리고 루리는 완벽하게 아름답지만 유교 이념에 반하는 남성편력을 가지고 있다.

자유로운 여성상을 대변하는 것이겠지만 그런 자유로움 속에서 플라토닉 사랑을 원하는 이중적인 모습도 있다. 에로스와 플로토닉이 공존하는 여자. 매력적인 인물이라는 것일까?

 

그런데 여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 소설엔 남자들이 '원하고 좋아하는'여자들만 나온다.

절대 여자들이 좋아하는 '남자들'은 나오지 않는다.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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