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혼주의자였습니다만 쌍둥이 아빠가 됐습니다 - 겁 많은 예비 아빠가 성장하며 얻은 행복
양원주 지음 / 미다스북스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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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표지의 그림이 왠지 따뜻하다. 아기를 앞, 뒤로 안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 손에는 머그컵을 들고 있다. 아마도 따뜻한 차가 담겨 있으리라 생각된다. 책 제목에서 저자는 비혼주의자였다고 밝힌다. 비혼주의자란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을 개인의 가치관이나 신념으로 삼는 태도 또는 입장을 가진 사람을 뜻하는데, 그럼에도 한 명도 아닌 쌍둥이 아빠가 되었다니. 어떤 사연이 담긴 책일까 궁금하다.

저자 소개를 읽어보니 모태솔로로 어른이 되었고, 얼떨결에 결혼했는데, 예고 없이 쌍둥이를 신생하중환자실에서 만났다고 한다. 스물한 살 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기를 섰고, 이 책은 그 일기가 모인 결과물이다. 책은 총 6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는데, 저자의 자서전 같기도 하고, 어찌보면 육아일기 같기도 하다. '어쩌다가 결혼을 해서' 부터 시작해서, 뱃속에 찾아온 새 생명, 에정일, 신생아 부모, 부모가 되어가던 시간을 지나쳐서 '한 뼘식 자라 첫 생일에 닿기까지'로 마무리 된다.

자신의 생각, 마음이 담겨 있고, 아울러, 한 가족이 된 와이프와 주변인물들의 이야기도 소소하게 들어 있다. 결혼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조언들이나 쌍둥이는 어떻게 생기는지 등에 대한 의학지식들도 별도의 페이지에 묶었다. 페이지를 넘기는 재미가 쏠쏠하다.

"내년에 둘이 결혼할 수 있게 준비해 봐라."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말씀은 세상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시아버지의 프로포즈가 되었고, 조용한 식당에서의 반지 프로포즈를 거쳐 결혼을 약속하게 된다. 프로프즈는 과해서도 안 되고 너무 초라해서도 안된다는 말이 기억난다. 평생 그 날의 기억이 소환되기 때문이다.

결혼 준비할 때 겪는 다섯 고비는 현실적인 이야기가 가득하다. 커플이라면 함께 진지하게 읽어보아도 좋을 것 같다. 신혼집, 결혼식장, 신혼여행, 혼수, 청첩장 모임에 대한 저자만의 조언이 이어지는데, 이 돈을 아껴서 뭐 하나 와 아껴서 어디 쓸까의 고민 차이는 5년 뒤 나타난다는 말이 기억난다.

"오빠! 쌍둥이래!". 놀라고 다급했던 저자 아내의 외마디는 얼마나 놀랍고, 기쁨이고, 아찔한 충격이었으라. 03~04.%의 확률을 뚫은 아이들이다. 비용부담을 들어주는 정부 지원 제도도 소개하느넫, 보건소, 정부24, e보건소 등에서 확인 가능하다.

예정일보다 이른 33주 만에 나온 아이들. 남자 신생아 평균이 3.3kg인데, 행복이는 2.02kg, 건강이는 2.0kg이었다. 미뤄두었던 혼인신고를 하면서 혼자의 몸에서 법적으로 세 명의 식구를 거느린 어엿한 가장이 된 순간도 나온다. 혼인신고를 서두를 이유와 미뤄도 되는 이유도 읽어볼 가치가 있다. 다만 정해진 정답은 없다는 사실. 당사자의 마음이나 상황을 생각하며 결정하면 되겠다.

쌍둥이는 기쁨 두 배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렇다고 엄마의 스트레스와 우울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꽤 높은 층에 살고 있는데, 잠시나마 위태로운 상상을 했다고 고백하는 장면에서는 아찔함과 눈물이 났다. 산후우울증은 배우자, 주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함께 살펴야 할 부분이다.

책은 돌잔치를 지나서 옹알이를 하는 장면에서 끝이 난다. 그리고, 그 때의 쌍둥이들은 지금 열 다섯 살이 되었다고 한다. 시간은 정말 빨리 흐르는 것 같다. 책에 담긴 이야기는 특별한 사람의 이야기도 아니고, 특별한 경험을 모은 것도 아니다. 그저 결혼과 육아를 경험한 한 아빠의 일상적인, 소소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진실함이 묻어 있는 참 따뜻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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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자
김강 지음 / 일오아이엠아이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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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자살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 제목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게 책 표지는 밝은 연두색이다. 묘하게 대비된다. 복선을 담은 것일까. 궁금증이 생긴다. 저자 소개를 찾아 보았으나, 별 다른 소개가 없다. 세계 1,000여 도시를 여행했고, 음식, 문화, 도시와 자연을 따라 시간을 걸었다는 내용이 있다. 대표작도 아직은 이 책이 유일하다.

어떤 내용을 담았을 때 책 앞, 뒤를 뒤적이다가 뒤 편에서 이 책은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죽음을 말하면서도 삶의 행위를 멈추지 못하는 인간의 모순을 바라본다고 적혀 있다. 자살을 반대로 하면 살자라는 말이 생각난다. 죽고 싶다는 말이 때로는 살고 싶다는 강한 반증이라는 말 또한 있다.

100페이지가 조금 넘어가는데, 특이하게도 3시간여의 기록을 담았다. 보통 소설은 주인공의 일상을 담았기에 몇 십년에 달하는 시간이 담긴 것이 통상적인데, 이 책은 2020년 8월 15일 19:15 부터 시작되어서 8월 16일 6시 15분이 마지막이다.

죽음을 선택한 사람의 비극을 자극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을 담으면서도 살아가기를 멈추지 못하는 인간의 모순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죽음이라는 극단적 주제를 소주와 불고기, 빚과 농담이 어우러진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영역으로 끌어내린다. 대박이와 봉달이가 만난다. 밥을 먹는다. 술을 마신다.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다가 주변의 이야기로 넓혀가고, 그러다 보니 욕도 좀 섞인다. 주위 사람들과 마찰이 일어나고 결국 의외의 상황이 발생한다. 마지막 의외의 상황 부분을 빼면 우리 주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닌가.

작품 속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의식과 육체의 충돌이다. 주인공은 끊임없이 삶의 무의미와 죽음을 주저리 주저리 말하지만, 몸은 배고픔을 느끼고 술을 마시며 살아남기 위해 반응한다. 머리와 몸이 따로 논다는 표현이 맞을까. 머리로는 삶을 포기하려 해도 몸은 살고자 부단히 애쓴다. 그 묘한 대비와 균열이 팽팽한 긴장감을 만든다.

문체는 간결하다. 책 크기 자체도 일반 책보다 다소 작은 편이기에 글자 수도 작다. 감정을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입술을 다문다. 턱끝이 떨린다. 이런 신체적 반응에 대한 묘사로 인물의 괴로움을 간결하게 전달한다. 넘어진 의자와 깨진 접시처럼 사물을 나열함으로써 독자가 스스로 그 서늘한 분위기를 느끼게끔 한다. 직접적인 아닌 간접적인 전달이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입으로는 죽음을 외치지만 몸은 여전히 살아있는 현실을 따라가는 작품이다. 삶은 아름답다. 삶은 살아야 할 가치가 있다 식의 숭고함이나, 죽으면 안 돼, 살아야 해 같은 윤리적 교훈을 강조하지 않는다. 어쩌면 내 옆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인간의 솔직한 일상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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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은 계절보다 늦게
오윤희 지음 / 리프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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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책 표지의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들판에 서 있는 집, 그리고 오두막. 하얀 눈은 모든 것을 덮고 있다. 아직 겨울은 오지 않았지만 책 표지만 보고서도 벌써 겨울이 성큼 우리 곁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

역사의 물결 속에 등 떠밀려 살아간 사람들의 춥고, 아픈 계절을 다룬 이야기이다.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쫓겨나듯 이동해야 했던 소냐가 있다. 생존을 위해 시베리아 벌목장에서 도망친 북한 청년 영호도 있다. 국경과 체제의 장벽에 막혀 작별 인사조차 건네지 못하고 헤어졌던 두 사람은 25년이라는 시간 후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마주한다. 문득 여명의 눈동자가 생각난다. 상황은 다르지만, 본인들의 의미와는 상관 없이 이별을 겪어야 했던 사람들.

책을 읽으면서 고향이라는 단어가 지닌 의미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사전적 의미로 고향이란, "자신이 태어나서 자란 곳"을 뜻한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고향은 지도 위의 구체적인 장소가 아닌 듯 하다. 타인에게 인정받지 못한 사람, 외로운 이방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누군가의 따뜻한 마음이 고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그저 외롭고 쓸쓸했던 그들에게 서로의 존재는 겨울의 추위를 녹여주는 유일한 온기였을 지도 모른다. 서로가 서로의 고향인 셈이다.

작품이 인상적인 이유는 주인공의 범위에만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소냐의 곁에서 오랜 시간 가정을 지켜온 남편 파샤의 외로움까지 다룬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연인 사이라 할지라도 언제든 서로에게 낯선 이방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은 자칫 너무나 무겁게 다가왔다.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되돌리지 못한 행동으로 서로에게 이방인이 되고 그래서 헤어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방인의 정의는 특정 기준으로 구분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별은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문장으로 비유하자면 마침표가 찍히지 않는다. 오랜 세월 가슴속에 안고 살았던 마음을 온전히 보내주는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과거를 온전히 놓아줄 수 있다. 과거의 지나간 시간에 묶여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가.

25년 만에 전달된 붉은 포인세티아처럼 미루어둔 작별을 마친 후에야 각자의 가슴속 겨울을 내보낼 수 있다. 과거에서 벗어나 새로운 계절을 향해 발걸음을 옮길 수 있다. 포티세티아의 꽃말은 축복, 행복을 담고 있다. 새로운 미래를 향한 시작을 축하한다는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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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테토스의 지혜, 바꿀 수 있는 것에 집중하라 - 내 삶의 주인이 되는 53가지 인생 지혜 ㅣ 메이트북스 슬림북 8
에픽테토스 지음, 강현규 엮음, 김성훈 옮김 / 메이트북스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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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처음 접하는 사람의 이름이기에 위키백과를 찾아보니 고대 그리스 스토아 학파의 대표적인 철학자라고 한다. 소아시아에서 노예로 출생하였으며 고문을 받아 절름발이가 되었으나, 스토아 학자인 무소니우스 루푸스 아래에서 스토아 철학을 배웠으며 노예에서 해방되자 젊은이들에게 철학을 가르쳤다. 노예에서 철학자의 변신. 결과만 놓고 보자면 신분상승 정도로 보이지만 그가 겪었을 수 많은 고통과 핍박, 그리고, 철학자가 되기로 마음 먹었던 시간들이 무척 고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책은 에픽테토스의 철학과 지혜를 강현규가 다시 엮은 결과이며, 한 마디로 '내 삶의 주인이 되는 53가지 인생 지혜'를 담았다. 삶의 주인이 된다는 문구도 마음에 들어지만, 바꿀 수 없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기 마라. 라는 문구가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 우리는 흔히 지나간 과거에 얽매여 벗어나지 못하고,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며 불안에 떠는 경향이 있다. 책을 통해 부질없는 불안감과 고통을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해 본다.

책은 크게 4개의 파트로 구성된다.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부터 구별하라'에서 시작하여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먼저 나를 지켜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내 책임을 다하라'를 지나서 마지막으로 '생각을 점검하고 배운 것을 바로 실천하라'로 끝맺음한다. 에픽테토스의 철학이 주된 내용이지만, 독자가 이해하기 쉬벡 풀었기 때문에 편하게 페이지를 넘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새겨두면 좋은 내용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몇 가지를 꼽자면

'미래를 걱정하느라 지금 할 일을 미루지 마라'. 좋은 결과를 보장받아야만 움직이겠다고 하면, 현재의 책임을 피하는 핑계가 될 수 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전망과 조언만 찾으면 계속 늦어진다. 알 수 없는 결과보다, 지금 해야 할 일이 분명하다면 그 일을 하라.

'마음의 평온을 장소에서 찾지 마라'. 더 좋은 환경으로 바꿀 수 있다면 바꿔라. 하지만 그것은 습관을 고치는 것과는 다른 일이다. 장소에 얽매이지 말고, 어떤 환경에서도 내 생각과 행동을 다스리는 법을 익히고, 그 상황에서 해야 할 일을 하라.

'철학을 배웠다면 행동부터 달라져야 한다'. 책은 철학을 배우는 도구이지, 책을 보여주거나 많이 읽었다는 사실 자체가 나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일에 덜 매달리고, 잘못된 선택을 경계하는지 보라. 실제 선택과 행동이 변경되면 그 때야 비로소 철학을 배운 것이다.

'화가 나거나 욕망이 생길 때 바로 행동하지 마라'. 먼저 멈춰야 한다. 그리고 그 행동 뒤에 어떤 결과가 따라올지 생각해야 한다. 순간의 표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 뒤에 남을 후회와 자책도 반드시 함께 생각해야 한다. 행동까지 감정에게 맡기지 말자.

기술의 발달로 정보는 넘치지만, 오히려 불안감은 높아진다. 타인의 평가, 삶을 대하는 기준의 부재, 빠른 일상은 스스로를 돌아보고 생각을 다듬을 시간을 주지 않는다. 이 책을 통해서 그런 상황일 수록 잠시 멈추고, 나의 판단을 살피는 힘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론을 이론으로 끝내지 않고, 체화하여 삶의 행동으로 옮기려는 실천이 필요하다.

​#에픽테토스의지혜바꿀수있는것에집중하라 #에픽테토스 #메이트북스 #컬처블룸 #컬처블룸리뷰단 #스토아철학 #인생지혜 #처세술 #자아계발 #마음챙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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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케 호모 - 제16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오수완 지음 / 다산책방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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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재앙 때문에 인류 대부분이 사라진 황량한 세상. 한 남자와 어린 소녀가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길을 간다. 혼불문학상 수상작이라는 <에케 호모>는 종말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종말 하면 보통 떠오르는 폐허나 쓸쓸함, 고립 같은 차가운 느낌보다는, 따뜻한 인간다움이랑 삶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 더 먼저 다가오는 소설이다.

작품 속 세상은 '강림'이라고 불리는 재앙 이후로 모든 게 멈췄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냥 부서진 기계나 겨우 고쳐가며 근근이 살아가고, 법이고 질서고 사라진 길 위엔 늘 위험이 도사린다.

이런 폐허 속에서 남자는 소녀에게 기계 고치는 법만 가르치는 게 아니다. 타인의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까지 함께 가르친다. 무너진 세계에서 아이를 어떻게든 지켜내려는 남자의 노력이, 파괴된 세상과 대비되면서 묵직하고 따뜻한. 그러면서도 어딘가 외롭고 무거운 감동을 남긴다.

문장이 꽤 간결하다. 보통 소설이라고 하면 화려한 수식어가 주렁주렁 달리기 쉬운데, 여기선 수식어가 별로 없다. 근데 이 담백함이 오히려 문명이 무너진 상황의 서늘한 공기를 더 잘 살려주는 것 같다. 장면이 반복되고 대사도 무심한 편인데, 이상하게 한 편의 긴 시를 읽는 것처럼 운율이 느껴지는 묘한 매력이 있다.

이 소설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우리가 진짜 지켜야 할 게 뭔지 자꾸 물어온다. 거대한 문명이 무너지는 것보다, 요리를 하고 책을 읽고 누군가를 챙기는 그 소소한 일상이 사라지는 게 훨씬 더 절박하게 느껴진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근데 또 생각해보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지구 반대편에서 전쟁이 나고 세계 경제가 망한다 어쩐다 해도, 당장 오늘 출근하는 거나 퇴근하고 뭐 먹지 고민하는 게 보통 우리들 모습이니까.

결국 이 남자와 소녀의 여정은 파괴된 세상을 지나며 서로에게 구원이 되어주는 이야기다. 희망이라곤 없어 보이는 길 위에서도 누군가를 향한 애정을 끝까지 놓지 않는 모습. 팍팍한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한테 잔잔한 위로가 되기도 하고, 한편으론 묵직한 경각심을 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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