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용돌이
전건우 지음 / 엘릭시르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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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빵!
마실 나온 노인네처럼 운전하는 앞차에다가 경적과 하이빔을 먹여준 다음 차선을 바꿔 가속페달을 밟았다. 쏘나타가 앓는 소리를 냈지만 발을 떼지 않았다. 속력을 줄이면, 끝도 없는 불안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속도계가 140을 가리켰다. 차체가 떨렸다. 한여름의 찬란한 풍경이 휙휙 지나갔다.
그때도 여름이었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모기가 몸을 불려가던 칠월. 여름방학, 수영, 서리, 저수지, 비밀 아지트, 독수리 오형제, 그리고.......
내 인생을 바꿔놓았던 1991년 여름,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

어른이 된 주인공이 잊고 있던 어린시절을 떠올리는 초반 부분이다. 자동차를 운전하던 주인공이 속도를 높이면서 시속 140을 육박하고, 마치 시간여행을 하는 것처럼 어린시절 기억이 이어진다. 뭔가 익숙한 느낌이 들어 찾아보니 시속 141킬로가 88마일이었다. 88마일은 영화 <백 투 더 퓨쳐>에서 타임머신 ‘드로리안‘이 작동하는 속도다. 의도한 게 아닐 수도 있지만 재미있는 디테일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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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숙하게 소재와 플롯을 다루는 솜씨 좋은 작가이다. 아주 안정적이고 쉽게 읽히는 편이다. 이런 류의 ‘스티븐 킹스러운‘ 이야기 구조를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한국의 어느 시골로 구조를 거의 그대로 옮겨와서 이식했고, 그 이식은 꽤나 성공적으로 보인다.
단지 그 이상의 새로움이나 재미가 없다. 거의 모든 부분에서 예측가능하고 읽는 내내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을 떨칠 수가 없다. 등장인물들은 뻔한 말을 하고 뻔한 반응을 보이며, 문장은 상투적인 표현을 쏟아낸다. 잘 읽힌다는 말은 그래서 칭찬이 아닐 수도 있겠다.
이 정도로 능숙하게 이야기를 엮는 사람이 그 자리에 안주하는 모습을 보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아주 많은 새로움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조금이라도 새롭기를 바랐고 최소한 뒤틀기라도 해서 변주를 느끼기만 해도 족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끝까지 그런 건 없었다.

재밌고 익숙한 요소들이 많은데, 그 요소들이 헐겁게 배치 되어있다. 죽음을 찍는 사진작가, 독수리오형제와 남박사, 20세기소년 혹은 기묘한 이야기, 저수지에 나오는 물귀신, 빙의와 퇴마...
전체적으로 봤을 때 요소들 사이의 연관성이 부족한 편이다. 하나의 의도를 가지고 요소들이 선별됐다는 느낌보다는 그냥 재미 요소가 적당히 나열되어 있는 느낌. 그래서 반드시 그것이야만 했다는 필연성은 느낄 수 없다. 구실을 위한 구실이고 배치를 위한 배치다. 그래서 마지막에 주제의식도 드러나긴 하지만 인상적이진 않다.

수많은 레퍼런스들로 인해 톤앤매너가 휙휙 바꾸는 것도 문제다. 일본 만화에서 미국 소설로, 일본 공포 영화에서 헐리우드 공포 영화로.. 서로 다른 매체들은 리얼리티를 다루는 방식과 기준이 모두 다르다. 그런데 그걸 작가의 편의에 의해 한 작품 안에서 바꿔버린다면 그건 능숙함을 가장한 게으름에 다름 아니다. 필요에 의해서 이야기의 결이 교체되는 느낌이었다. 잡탕처럼 막 뒤섞여 있는데 이 이야기만이 가져야할 분위기는 정작 느끼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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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민음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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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느냐고요?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셰에라자드가 거짓말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녀 자신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할 겁니다. 사실 그녀가 한 이야기 자체가 진실과 거짓이라는 엄격한 잣대로 나눌 수 없는 것이지요. 전혀 다른 영역에 속하니까요. 아마 그레이스 막스도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말만 하고 있을 겁니다.”
“목적이라면……?”
“술탄을 재미있게 하는 것이죠.” p.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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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1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민음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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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사람들은 정신을 놓았다라고 하고, 가끔은 정신이 나갔다라고도 한다. 정신에 다리가 달려서 남의 집에 들어가거나 아예 다른 나라로 떠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사실 정신이 나간 사람은 아무 데도 가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다. 그러면 머리 속으로 다른 사람이 들어온다. p.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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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곡 - 지옥편 - 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0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박상진 옮김, 윌리엄 블레이크 그림 / 민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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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거짓의 여러 얼굴들을 지니는 법이다.
그 앞에서 사람은 되도록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런 진실을 말하면 자칫 거짓말쟁이가 될 수 있으니.

그러나 난 여기서 침묵할 수가 없다. 내 희극의
구절들을 두고 맹세하노니, 독자여!
그 구절들을 오래오래 사랑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p. 162-163, 16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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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입이 없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 - 잃어버린 몸 할란 엘리슨 걸작선 2
할란 엘리슨 지음, 신해경.이수현 옮김 / 아작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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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아무것도 지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쁨이 말라간다는 사실에 갈수록 낙담했다. 기쁨이 말라갔다. 가게마다, 거리마다, 사람마다….
그러다 누군가는 홀로 남는다.
텅 빈 평원에 서게 된다. 지평선에서 검은 바람이 불어온다. 춥고 공허한 어둠. 영원한 고독의 구덩이가 바로 저 지평선 너머에 있고, 그 구덩이에서 불어나오는 소름 끼치는 바람이 절대 그치지 않을 것도 안다. 사랑하는 이들은 별안간에 하나씩 지워지고, 그 누군가는 거기, 텅 빈 평원에 홀로 설 것이다. p.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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