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구의 사랑 오늘의 젊은 작가 21
김세희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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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기획이 돋보인다. 이 기획이 출판사에서 시작된 것인지 작가 개인에게서 시작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시도는 양쪽 모두에게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출판사는 『82년생 김지영』 이후 더욱 확장된 페미니즘/여성 서사를 이어나갈 수 있었고, 작가 개인으로서는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됐으니 말이다. 『김지영』에서 봤던 좋은 기획력이 이 작품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물론 읽는 사람에 따라서는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전까지 하찮게 여겨지던 소재를 진지하게 재조명하고,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의미를 부여하는 시도만큼은 새롭지 않을까.


『김지영』 때만 해도 일반적인 페미니즘 이야기(그것도 지극히 온건한 성향의) 만으로 충분했지만, 이제는 이런 ‘틈새’ 이야기까지 나오는구나 싶어서 반가웠다. 역사 속에 묻혀야만 했던 여성들의 이야기가 더 많이 발굴되어 나왔으면 좋겠다.



∥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어. 그렇지 않니?’ 이것은 나의 이야기, 나의 작은 시도이다. 앞으로 더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를. ∥ p. 171, 작가의 말



(이하 스포일러)




그녀들은 어쩌다 ‘이반’이 되었을까. 나는 그들이 갇혀 지내야 했던 환경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책 속에서 여학생들은 초등학교 때 이후로 철저하게 남학생들과 분리되어 그저 입시만을 향해 달려가야만 한다. 여자학교라는 장소는─남학생들과의 접촉이 마치 어떤 감염이나 오염이라도 된다는 듯이─무균실처럼 기능한다.



하지만 여학생들을 격리시킨 이들이 이해하지도 예상하지도 못한 중요한 사실은, 여학생들의 마음에 사랑하고자 하는 본능이 넘쳐흐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당연하게도) 한 사람의 인격체로서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기본적인 욕망이었다.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은 욕망. 게다가 그들은 청소년기를 통과하고 있었다. 누가 그들을 막을 수 있을까.



∥ 6년간 본 것들을 완전히 잊을 수는 없었다. 그 엄청났던, 소녀들의 사랑하려는 욕구. ∥ p. 153



철저하게 이성으로부터 격리된 여학생들은 그들만의 사랑을 발견했다. 어른들이 박멸했다고 믿었던 그녀들의 욕망은 엉뚱한 방향으로 해소되었다. 그들은 자신들 곁에 있는 동성들을 발견한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이반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마치 마거릿 애트우드가 쓴 디스토피아 SF처럼 들리지만 그것은 분명히 존재했던(혹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일부다. 동성애 외에도 그들은 TV 속 가수들에 열광하고, 그들을 가지고 팬픽을 쓰기도 한다. 모두 그녀들이 억압 속에서 욕망을 표출해내는 또 다른 방식들이다. 그들은 사랑할 대상이 필요했다. 그 대상이 또래의 남자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상관은 없었다.



∥ 남자든 여자든 무슨 상관인가. 가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게 특별한 관심을 주고, 설렘을 느끼게 해 준다면. 다른 아이들과 구별해 줄 모종의 사연, 로맨스를 선사해 주기만 한다면. ∥ p. 46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동성애는 금기였다. 하지만 그 금기는 어른들에게만 심각하게 여겨졌다. 오히려 여학생들에게 그것은 하나의 가능성이었다. 여러 가지 선택지 중에 하나의 항목에 불과했다.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환경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을 파격으로 이끌었다. 선생님들은 그 사태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것을 동성애라고 부르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 학교마다 동성애를 단속하는 대대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차마 그 단어를 쓸 수는 없었다. 그 단어를 쓰는 순간 그것의 존재를, 그것이 우리 집단 안에 정말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어서였을까? 아니면 단지 그 단어 자체에 강렬한 거부감을 느껴서였을까? ∥ p. 26-27



동성애 성향이 아니었던 화자는 앞선 이유들로 인해 동성애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있었다. 물론 그녀는 당시에 그렇게까지 판단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비슷한 선택을 했던 여학생들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그 추억은 철저하게 폐기되어야만 했다.



∥ “우리 고등학교 때 말이야. 그건 다 뭐였을까?”

나는 인희의 시선을 피한 채 단호하게 말했다.

“그땐 다 미쳤었어.” 

p. 150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청소년기의 추억이나 첫사랑의 기억을 강탈당했다고 볼 수 있다. 어른들의 세계에서 그것은 한때의 유행이자 ‘미친 짓’으로 치부된다. 하지만 그 당시 그들의 마음은 진짜였을 것이다. 그 사랑의 대상만을 동성이 아닌 이성으로 바꿔 생각해보면, 그것은 극히 평범한 청소년기의 풋사랑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그것은 미친 짓으로 치부된다. 그것이 그녀들의 잘못이었을까? 스스로 선택한 탈선이었을까?



∥ 그런데 내가 그것을 선택했을까? 오랫동안 나는 내가 그녀를 사랑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젠 더 이상 그 감정을 내가 선택한 거라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내가 감정을 소유했던 게 아니라 감정이 나를 소유했던 것만 같다. ∥ p. 103



차라리 실제로 동성애자였다면 덜 억울했을까? 억울하기는 그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들은 짧은 낙원을 맛본 셈이다. 자유롭게 소수 성향을 드러낼 수 있는 환경, 동성애가 오히려 쿨하고 멋진 일이라고 여겨지던 시절을 한국 사회에서 경험해본 것이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 마법은 사라진다. 바깥세상은(다시 말해 남자들의 세상은) 동성애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것은 혐오를 넘어 공포스러운 일로 여겨진다.



∥ 만약 여자를 사랑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면 내 친구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아마도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뭔 소리야. 무서워. ∥ p. 152



결국 그녀들을 둘러싸고 있던 울타리는 누구 하나 보호하지 못하고 상처만 남겼다. 애당초 왜 그녀들은 보호‘당해야만’ 했던가. 왜 이반은 남학교보다 여학교에서 범람했던 걸까. 남학생들은 보호받아야 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진 건 아닐까. 여학생들에 비해 남학생들의 성적 호기심은 상대적으로 방임되고 묵인되는 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남학생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남성다움을 강요당하고, 남성 성기를 마구 들먹이는 문화는 마찬가지로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동성애 성향이든 이성애 성향이든 어느 쪽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대학에 진학한 화자는 아직도 고등학교 시절 이반에 머물고 있는 인희를 비웃는다. 그것이 진짜 그녀의 성향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어떤 역할극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결국 역할극을 벌이는 건 화자 본인도 마찬가지다. 성인 여성, 그것도 서울에 거주하는 성인 여성의 옷차림과 말투, 태도를 익히기에 바쁘다. 그것이 자기 욕망과 일치하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저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이고 싶지 않을 뿐이다. 알고 보면 그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벌어지는 일반적인 사회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우리보다 먼저 사회화된 사람을 보면서 그들의 역할을 흉내 내고, 그 흉내를 통해 사회화된다.



인희의 모습이 중고등학교 때는 괜찮았고, 성인이 된 이후에는 이상해진 이유는 뭘까. 그때는 그런 것이 용인되는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그 환경에서 그 모습은 조금 유난스러울지언정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성인이 된 이후에는 환경이 바뀌면서 그것이 기이해 보인다. 환경이 바뀌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다시 뒤집어서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대학에 진학한 이후 화자가 습득하는 ‘여성스러운’ 사회화는, 다시 또 다른 환경으로 옮겨진다면 얼마든지 이상해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정상적’이라고 여기던 사회화의 모습이 다시 바뀌고 있는 중이다. 단순히 관습화된 여성스러움을 강조하는 게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지 깨달아 가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사회화 과정에 있어서 애초에 화자가 롤 모델로 삼은 것은 힐러리 클린턴이었다. 사랑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 당당한 그녀를 목표로 삼고 열심히 공부하던 화자는, 자신도 사랑 때문에 모든 걸 버리고 마는 평범한 여자가 됐음을 인정하고 자신에게 실망한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가치에 쏟고자 했던 열정은 평범한 한 사람에게로 향한다. 하지만 그것이 실망할 일이던가. 그녀는 자신에게 실망하고만 자신의 사고 과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그녀가 본능적으로 알아챈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한국 사회에서 사랑에 목매는 여자는 별 볼일 없는 삶을 살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걸 말이다. 사랑하는 상대에게 종속되는 삶은 가부장적 시스템 아래로 여자를 옭아맨다. 광주 항쟁 때 이야기를 하며 화자는 좀 더 대단한 대의(大義)를 위해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 고민한다. 사소한 것에 머물면 여자는 그냥 여자로 남기 때문이다. 철저히 격리된 여자학교에서 화자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힐러리 클린턴은 유일한 탈출구, 희망이었다.



∥ 언젠가 시골 외할머니를 보며 사람이 산골짜기 사이에서 태어나 밭에서 일하다가 그냥 그곳에서 삶을 마감할 수도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러면 누가 그 사람을 기억해 주나? ∥ p. 97



물론 화자가 100퍼센트 자의적으로 동성애를 선택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가 은연중에 여성 동성애의 장점들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 재밌다.



∥ 또한 당시 우리의 조건에서는 남자보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여자 애인이 이 모든 요구를 더 잘 충족시켜 줄 수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듣고 싶은지, 무엇이 필요한지, 다가오는 생일에 무슨 선물을 원하는지도 굳이 내색하고 가르칠 필요가 없었다. ∥ p. 46-47



화자가 좋아했던 가수는 조성모이고, 친구 민지가 좋아했던 가수는 god의 손호영이었다. 모두 여성스러운 이미지를 내세웠던 남자 가수들이다. 성인이 된 화자는 남성적인 모습을 추구했던 인희를 무시하고 창피해 하는데, 인희가 하는 언행들은 가부장적인 남자들의 모습을 꼭 닮아있다. 학창시절 인희에게서 느끼는 혐오감은 마치 정신연령이 낮은 같은 또래 남자에게 느끼는 감정처럼 느껴진다. 화자의 남자친구들은 인희의 행동에 더 가까워 보이고, 여자인 화자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 한 남자 선배는 화자가 조성모를 만나러 구리까지 다녀온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혐오한다.



∥ “나는 미리 알고 대비를 하고 싶어.”

수화기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친구를 만나는데 무슨 대비를 해. 알았어, 다음 데이트 때는 하루 전에 일정표를 제출할게.” ∥ p. 141-142



청소년기, 남자와 여자를 철저하게 분리시킨 덕분에 성인이 된 이후 만난 남녀는 서로를 이해하기에 더 힘이 드는 것은 아닐까. 부자연스럽게 격리된 생활 속에서 여학생들은 남자를 흉내 내는 동성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그것은 원본이 아니라 여러 겹의 여과지를 거친 탈색된 사본이다. 브라운관을 통해 바라보는 남자 연예인도 마찬가지다. 여학생들이 그런 이미지에 빠져있는 동안 남자학교의 남학생들은 철저하게 마초적인 남성상을 강요받는다. 이런 상태라면 서로를 이해하는데 문제가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여학생들을 남학생들로부터 격리시켰던 선생님들의 의도가 성공한 건지도 모르겠다. 남녀공학 학교가 늘어난다고 쉽게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이미 사회화 과정이 학교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남녀 사이의 벽은 더 공고해지고 있다.



많은 여성들이 탈(脫) 연예, 탈(脫) 코르셋을 표방하고 있다. 남자들은 여자가 아니면 선택지가 없는 것 같지만 여자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여자들 사이에 또 다른 사회화 과정이 일어나고 있다. 여자들은 더 이상 항구가 아니다. 그런 시절은 진작에 사라졌다. 사회화 과정 전체를 다시 검토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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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합격, 계급 - 장강명 르포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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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문제 진단이 확실하다. 그리고 문제 지적에 머무르지 않고 명쾌한 해결 방법까지 제시한다는 점이 훌륭하다. 글도 상당히 재밌게 썼고 잘 읽힌다. 설문 자료가 약간 부실한 면이 있지만 저자의 주장을 해칠 정도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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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VS 80의 사회 - 상위 20퍼센트는 어떻게 불평등을 유지하는가
리처드 리브스 지음, 김승진 옮김 / 민음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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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사회적 격차는 상위 1%와 나머지 99%가 아닌,

중상류층 20%와 그 외 80% 사이에 존재한다는 주장.


익숙한 듯하면서도 미묘하게 초점이 다른 주장이다.



∥ 지금쯤 당신은 어디서 다 들어 본 소리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부유하고 학력이 높은 사람들이 사회 계층적으로 뚜렷이 분리되는 현상을 다룬 책이 이미 많은데 계급과 불평등에 대한 책을 또 한 권 내놓는 것은 쓸데없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이 주제를 다룬 몇몇 주요 저서가 현재 벌어지고 있는 계급 분화를 부정확하게 진단했다고 생각한다. 어떤 학자들은 슈퍼 리치나 상위 1퍼센트에만 초점을 두어 중상류층의 (그러니까 나나 당신의) 책임을 쏙 빼놓는다.  p. 39



최상위층의 책임에만 집중하다 보면, 중상류층의 책임을 간과하게 된다는 말.

사실 가장 큰 격차는 20%와 그 아래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에 문제는 더 심각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거기까지만 새로울 뿐 기본적인 원리는 1:99나 20:80이나 마찬가지다.



- 사회적 계급은 점점 더 고정되는 경향을 보인다.


- 그러다 보면 태어나면서부터 불평등한 위치에서 출발하게 되고,


- 타고난 것과 환경적인 부분 모두에서 격차가 벌어지게 된다.


- 시간이 지날수록 개인적인 능력만으로 그것을 극복하거나, 책임을 지기에는 불가능해진다.



사실 이 정도는 한국 사람이라면 이미 알고 있는 상식적인 문제들이다.

단지 우리에게 익숙한 문제를 미국의 사례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는 것 같아서 묘한 기시감이 들긴 한다.



저자 자신이 중상류층인 상위 20%를 자처하고 있고,

자신과 같은 20%의 사람들을 독자로 상정하고 조목조목 설득한다.


문제의 핵심인 중상류층이 스스로 반성하고, 변화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하위 80%에서도 한참 아래쪽에 위치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남의 얘기일 뿐)



문제 해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가진 자들의 자발적인 선의에 기댄다는 것도 이미 익숙한 논리.


어쩌면 그것이 민주주의-자본주의의 최대 맹점인지도 모르겠다.

못 가진 자가 가진 자들의 선의를 구하며 기다려야 한다.

거지도 그렇게 하다간 굶어죽고 말 거다.

법적인 제도의 중요성이 절실한 부분이다. 

하지만 법적 강제력을 강조하다 보면 다시 자유와 개인의 성취를 침범한다는 우려가 생긴다. 그래서 해결은 쉽지 않다.


저자는 골고루 해결책을 시도해야 한자고 제안하는 이유도 그런 이유다.


 이 유서 깊은 불공정 관행을 어떻게 없앨 것인가? 우리에게는 세 가지 무기가 있다. 법, 돈, 염치. 나는 이 세 가지를 모두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p. 210



이 책은 익숙한 논리들을 새로운 프레임(20:80)에 대입하고 있다.

거기다 첫 번째 장에 저자의 주장 전부를 압축해서 소개하고 있다.

나머지 뒷부분은 구체적인 수치와 사례들로 구체적인 뒷받침을 하는 모양새.


그래서 엄청나게 놀라운 새로운 이야기로만 채워진 건 아니다.

미국의 사례이지만 우리나라에 그대로 대입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위화감이 없다.

짧은 분량으로 저자의 새로운 시각을 습득하고 문제를 다시 보게 되는 것이 장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간이 새롭게 다가왔던 부분들이 몇 가지 있었다.



우선 최상위층과 중상류층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상위 1퍼센트는 고정된 집단이 아니라 구성원이 계속 달라지는 집단이다. 세인트루이스 워싱턴 대학의 마크 랭크에 따르면 최상류층은 별도의 집단이라기보다 상위 20퍼센트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는 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랭크는 연 소득 25만 달러 이상인 가구를 조사했는데 매년 이 집단은 인구의 2퍼센트에 못 미치는 정도를 차지했다. 그런데 평생 중에 적어도 1년 이상 여기에 속하는 사람은 인구의 20퍼센트나 되며, 이러한 ‘일시적인 최상류층’의 대다수는 생애 대부분의 기간을 상위 20퍼센트 속에서 살아간다. 다른 말로 하면 상위 1퍼센트는 ‘그들’이 아니라 ‘우리들’ 중 잘나가는 시기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p. 46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런 애매한 위치는 중상류층에게 자유로운 포지션을 선사한다.

그들은 원하기만 한다면, 익숙한 1:99 프레임 뒤에 숨을 수 있다.


2011년 월스트리트에서 발생했던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 3분의 1 이상이 연 소득 10만 달러 이상인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p. 21)


최상류층의 독식에 분노하지만, 그들 스스로도 어느 정도 독식의 혐의가 있고, 심지어는 빈번히 최상위층으로 올라가기도 하는 계급이라니. 필요에 따라 상류층 행세를 할 수도, 서민 코스프레를 할 수도 있으면서 독식에 대한 비난은 받지 않는 좋은 포지션을 가진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자발적인 각성과 선의를 바란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걱정이 앞선다.



두 번째로 재밌었던 부분은 계급 문제는 결국 제로섬 싸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계급 간의 이동성을 더 높인다는 말은 불평등한 기회를 평등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지만, 위 계급으로 올라가는 사람만큼 아래 계급으로 몰락한 사람이 반드시 나와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누가 지금보다 더 낮은 계급으로 내려가고 싶어 하겠는가. 때문에 중상류층 부모들은 자녀의 교육에 목을 맨다. 도태는 곧 죽음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자녀를 위해 한 일도 그런 위기감 때문에 벌인 일일 것이다)


때문에 저자의 주장은, 계급이라는 계단의 높이를 줄이자는 것이다(특히 20%와 80%의 경계에 있는 격차를). 아래 계급으로 떨어졌을 때의 타격이 심하지 않도록,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해 놓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 낮은 계급으로의 이동이 그렇게까지 공포를 주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주장이 단순히 계급 자체를 부정하고 중상류층을 일방적으로 몰아세우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계급에 대한 이런 인식은 저자가 영국인으로 오래 살다가 미국인으로 귀화한 사람이기 때문에 얻어지는 예민한 감각이다. (그는 영국의 계급 사회가 싫어서 미국으로 귀화했다)


유럽인들은 미국에 계급이 없다고 생각한다. 미국인들 스스로도 마찬가지다.


아무래도 민주주의의 역사가 길고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며 평등과 자유에 대한 이미지가 강렬하게 남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인종차별에 대해서는 예민하지만 계급에는 둔감하다. 오히려 그들은 부자들을 존경한다. 개인적인 성취는 신성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재미있게 여겨졌던 세 번째 부분이다.


 셰릴 키신이 저서 『인종이 아니라 장소』에서 지적했듯이, “민권 운동가가 인종적 불평등을 논하거나 진보적인 학자가 ‘백인 특권’을 이야기할 때 그들이 실제로 비교하고 있는 것은 평범한 유색 인종 대 부유한 백인이다. (다양성에 대한) 논쟁에서 노동자 계급 백인은 별도로 이야기되는 일이 거의 없다. 하지만 노동자 계급 백인은 자신이 특권층이라고 느끼지 않으며 전 지구화된 경제에서 그들은 실제로 특권층이 아니다.”  p. 178



물론 문제의 모든 부분을 설명해주지 못하겠지만, 미국 백인 보수층이 불만을 품게 된 배경도, 미국이란 나라가 지나치게 계급 문제를 감안하지 않고 인종 문제에 매몰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한국은 봉건국가도 아니고 입헌군주제도 아니다.

일찌감치 왕조는 끝이 났고 물밀듯 밀려오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지탱되고 있는 나라다. 아마 어느 나라보다도 계급에 대한 경계심이 강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엄연히 사회적 계급은 존재한다. 그리고 중상류층의 위상은 공고하다.


우리는 저자가 영국과 미국을 비교하며 느꼈던 것과 같은 착각을 경계해야 한다.

단순한 예로 우리는 이웃나라 일본에 비교해 더 평등하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입헌군주제로 일왕이 존재하는 나라와 비교했을 때 말이다.


 미국이 내게 언제나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개방성과 평등에 대한 약속이었다. 나는 영국에 팽배한 상류 계급의 우월 의식과 계급 구분을 늘 싫어했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 나의 새 조국을 더 잘 알게 될수록 여기에서도 계급이 고착되고 있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났다. 특히 계급 사다리의 위쪽은 영국보다도 경직성이 심했다. 오늘날 영국과 미국의 주된 차이는 미국인들이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다.  p. 230



책의 말미에 실린 저자가 제시하는 해답들은 보통 그전에 미국에 존재하는 시스템을 더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었다. 이미 해답의 실마리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우리에게도 그런 실마리들이 있는지 면밀히 검토해 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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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양들 1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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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네 번의 살인사건을 파헤치는 이야기.


예수님 시대의 예루살렘에 대한 이미지들이 철저하게 배신당한다.

작가는 그곳을 완전히 추악한 범죄의 소굴로 만들어 놓았다.

작품 속에서 예루살렘은 더 이상 경건한 종교의 도시가 아니다.

온갖 범죄로 얼룩진, 폭력적이고 지저분한 하드보일드 세계 그 자체다.


∥ 인간이 다스리는 로마가 그토록 정연하고 이성적인데 신이 다스리는 땅은 어찌 이토록 시끄럽고 혼란하단 말인가? ∥ - 1권 p. 115



익숙한 스릴러 장르를 1세기 예루살렘으로 옮겨온 것인데, 그것이 왜 꼭 예루살렘이어야만 했는지 호기심을 자극했다. 이정명 작가의 전작들이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것에 비해 상당히 새로운 시도를 한 것 같다.


확실히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연쇄살인 스릴러 한복판에 서 있는 건 묘한 광경이다.

어울리지도 않은 조합일뿐더러, 죄와 죗값이라는 닳고 닳은 하드보일드/스릴러 소설의 근본 논제부터 뒤집어버리기 때문이다.


스릴러 소설 속에서는, 이 더러운 세상에 희망이 있건 없건 간에, 누군가는 죗값을 치르고 사건은 해결된다. 영웅은 추악한 진실 앞에서 회의감을 느끼겠지만, 적어도 최소한의 정의는 실현된다.


하지만 예수님은 죄 없는 자만이 죄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같은 인간을 심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주인공 마티아스가 여기에 반발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는 하드보일드 세계 한복판에 있는 스릴러 소설의 주인공이자, 그 세계 자체기 때문이다.


∥ 세상에 죄 없는 자가 없을진대 누가 악인을 정죄하고 죄인을 벌하며 흉포한 자들과 대적할 것인가? 그자는 죄를 심판하지도 못하고 창궐하는 악을 막지도 못한 채 죄인만 득실거리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인가? ∥ - 1권 p. 126



하드보일드 세계가 예수님을 만났으니 충돌은 불가피하다.

작품 내내 그 둘은 끊임없이 충돌하고 갈등한다.


∥ “(…) 죽고 죽이고, 뺏고 빼앗기는 투쟁만 있을 뿐 신은 애초에 인간의 일에 관심도 없고 있다 해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서로 욕하고 싸우고 굶고 병들고 죽어가며 발버둥 치는 인간들이오. 무언가가 바뀐다면 그것은 신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 개개인의 욕망 때문이지. 그렇게 본다면 신의 말이라는 토라도 모호하기 짝이 없고 해석자의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지는 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에 위안을 줄 수 있는 건 믿음이 아닐까요? 인간이 선하며 세상이 더 나아진다는 믿음 말입니다. 유일신 여호와는 그런 인간의 의지가 집대성된 인식체계죠.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믿음 속에 실재하며 그들의 행위와 삶을 주관하고 있습니다.” ∥ - 1권 p. 193


∥ “전쟁에는 두 가지가 있어. 눈에 보이는 전쟁과 보이지 않는 전쟁이지. 로마군이 이 땅을 말발굽으로 짓밟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은 끝나지 않았어. 영토가 아닌 믿음을 두고 싸우는 전쟁, 공간 위의 전쟁이 아닌 시간 속의 전쟁은 지금부터 시작인지 모르지. (…)" ∥ - 2권 p. 71-72


이 작품은 예수님이 개입하는 순간, 이전 스릴러 소설과는 다른 결말을 예고한다.

단순히 작은 정의에 머물 수가 없는 것이다. 모두가 죄인인 상황에서 인간들은 스스로의 정의를 실현할 수가 없다. 예수님은 그 모든 인간의 죄를 용서해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다. 인간의 죄는 그 죗값을 치르는 대신 예수님을 통해 ‘공짜로’ 탕감 받는다. 

따라서 주인공 마티아스의 최종 목표는 연쇄살인범을 잡는 것에서 끝날 수가 없다. 그는 그 자신의 죄를 탕감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니, 작가가 예루살렘을 택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하드보일드/스릴러 세계와 대척점에 서 있을 것 같던 예수님은, 사실 그 세계의 핵심적 문제인 죄와 죗값에 대해 논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캐릭터인 것이다. 어쩌면, 그만이 유일하게 그 문제를 논할 수 있는 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풀어나가기 쉽지 않다. 

예수님을 하나의 캐릭터로 활용하면서도, 그의 인간 구원에 대한 목표를 훼손시키지 않고, 스릴러 소설로의 클리셰와 재미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굉장히 힘든 외줄 타기다. 예수님을 스릴러 소설의 캐릭터로 등장시키는 경우가 드문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이 작품도 그 외줄타기를 완벽하게 해내지는 못했다.


우선 마티아스라는 이야기의 주인공과 이교도라는 최고의 적이 등장하면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예수님 이야기가 어느 정도 강렬함을 잃는다. 왜냐하면 원래 이 이야기의 영웅은 예수님이고, 악당은 가롯 유다이기 때문이다. 영웅의 역할도, 악당의 역할도 나눠 갖게 되면서 유다는 상당히 비중이 사라져버렸고, 예수님은 때때로 현실 회피적인 얄미운 캐릭터로 보인다. 원래의 영웅과 악당보다 새로운 이들이 더 강렬해 보인다. 장점이자 단점이겠다.


이야기 속 악당인 피슈카르는 제 역할을 하긴 하지만 약간은 뻔하게 느껴지는데, 그 이유는 그가 또 다른 종교인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진짜 재미있는 갈등 축은 현실적인 하드보일드 세계관과 이상적인 기독교 세계관 사이에 있는데, 또 다른 종교가 악당으로 등장해버리면서 그 재미가 조금 반감됐다.

(마티아스도 종교인이긴 하지만, 그가 믿는 유대교의 교리는 묘하게 하드보일드 세계와 동일시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 누구나 지은 죄가 있으면 자기가 갚아야 한다는 것, 사람을 죽인 자는 죽어야 되고 남의 눈에 눈물 흘리게 한 놈은 제 눈에서 피눈물 흘려야 한다는 것, 그 사실을 피하려 해서도 안 되고 피할 수도 없다는 것. 그것이 그가 아는 율법이었다. 사람을 죽였으니 죽임 당하는 것이 공평한 처사였다. ∥ - 2권 p. 215-216


물론 작가는 후반부에 악당을 빠르게 제거하고, 마티아스의 심경 변화에 집중한다.

앞서 얘기했듯이 이 이야기는 주인공이 용서를 받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심하는(정확히는 회개하는) 캐릭터만큼 독자에게 납득시키기 힘든 것도 없다.


악당의 악행에 분노하고, 잘못된 문제를 바로잡는 주인공에 우리는 쉽게 공감하지만,

자신의 악행에 분노하고, 죗값을 치르려는 주인공에는 공감하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너무 고귀한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죄책감이라는 기독교적 감정에 호소해야 하는데, 죄책감을 느끼려고 스릴러 소설을 읽는 독자는 드물다. 기독교적 전통이 짧은 우리나라에서는 더더욱 그럴 것이다.


십자형까지 기꺼이 받아들이는 마티아스가 쉽게 납득되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때문에 작가는 마티아스가 애당초 그런 희생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라고 설정해 놓긴 했다. 하지만 그렇게 원래 가지고 있는 성격에 기댄다면, 다시 반대로 회심의 극적 효과는 반감되어 버린다. 쉽지 않은 해결이기에 이해를 하면서도,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주인공은 이야기 내내 잘못된 수사를 하다가 막판에 제대로 감을 잡는다.

보통 스릴러 소설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패턴이다.

그런데 주인공의 잘못된 추리는 그것대로 일리가 있고 그럴듯한 느낌을 줘야 하는데, 언제나 독자의 추리보다 뒤처진 느낌이어서 아쉬웠다.


더군다나 중간에 범인의 정체가 드러난 이후에도 계속 그러고 있다면 더더욱 문제가 될 수밖에. 누가 봐도 예수님과 제자들이 범인이 아닌데 자꾸 범인으로 모는 것이 약간 코미디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주인공이 종교적인 선입견에 휩싸여 그랬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신뢰하기 어려운 주인공을 내세운다면, 독자는 누굴 믿고 사건을 쫓아간단 말인가.


영화 《포레스트 검프》처럼 실제 역사 속에 가상의 캐릭터들이 자연스럽게 끼어들어가는 콘셉트인데, 그것이 매끄럽지 못할 때가 많았다. 

특히 예수님이 말을 할 때마다 거의 성경 속 구절을 그대로 옮겨놓고 있는데, 혼자서만 이질적인 말투로 말하고 있어서 어색했다. 아마도 예수님의 의도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불필요한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였으리라. 반대로 작품 속 예수님이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말을 할 때마다 어색하기도 했다. 그만큼 예수님은 다루기 조심스러운 캐릭터다.


작품 속 인물들이 드러내는 역사관, 세계관, 종교관이 상당히 후대 사람의 시야에 가깝다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당대의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려는 일을 제대로 이해했을까?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자신들이 서 있는 위치가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무지한 상태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빌라도나 테오필로스가 로마라는 제국과 자신들이 역사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지도 정확하게 알고 있는 듯했다. 등장인물 각자가 품고 있는 음모나 계획이 지나치게 전체를 조망하는 느낌이다. 시대를 초월하는 통찰력은 극히 드문 법이다.


장르 자체를 다시 성찰하는 대단히 흥미로운 작업을 시도했으나 그 원대한 의도의 채 절반도 충족시키지 못한 것 같아서 많이 아쉽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 것에 만족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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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갚아주는 법 - 핵사이다 <삼우실> 인생 호신술
김효은 지음, 강인경 그림 / 청림출판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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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자는 말했다. 

‘현실에서 용히처럼 행동하다간 찍히기 십상’이라고. 

그런데 나는 되레 찍히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쟤는 왜 저래?’라는 생각이 ‘쟤들이 왜 저러지?’라는 질문으로 확장하는 순간 갑의 잘못이 드러나고 을의 주장이 힘을 얻게 될 거라고 확신한다. ∥ p. 8-9, 프롤로그



현실에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상상조차 하지 않으면 바뀔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변화는 ‘만약에 이랬다면?’하는 상상에서 시작된다.

소위 말하는 ‘발칙한 상상’ 말이다.



회사 생활을 다룬 비슷한 생활툰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삼우실’은 독보적이다.

공감과 위로를 지향점으로 하고 있는 다른 웹툰들은 현실에 안주한다.

그저 문제점을 묘사하고 뒤에서 투덜대는 걸로 끝이다.

‘오늘도 참는다… 부들부들…’ 하는 마무리.



하지만 진정한 공감은 거기서 멈춰 선 안 된다는 걸 삼우실이 알려주었다.

진짜로 공감하고 위로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으로 갈 수밖에 없다.

“나도 그래.”라는 말은 “다들 똑같이 살아. 너만 힘든 거 아니야.”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공감이나 위로가 아니라 체념이다.


삼우실은 언제나 “나도 그래.”에서 끝나지 않는다.

비현실적일지라도, 시원하게 복수를 하며 끝을 맺는다. 

부당함을 지적하고, 웃는 얼굴로 되갚아 준다.


물론 그 정도로 성에 안 찰 수도 있다.

어찌 보면 대단히 소심하고 여전히 답답한 대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독자의 추천사처럼 이것은 실화다.


삼: 삼자가 봤을 때 웃긴 글이지만

우: 우리가 겪고 있는 일

실: 실화들 

p. 252


먹고사는 문제에 감정대로 질러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신자유주의가 불어넣은 ‘굶어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우리를 거기서 멈추게 만든다.

직장을 잃지 않고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그 아슬아슬한 선,

삼우실은 그 정도 선을 계속해서 유지한다.

(그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무책임하게 쾌감을 주는 걸로 끝나서도 안 되고, 답답한 현실에 변화를 주지 못해서도 안 되니까)


그래도 그건 대단한 변화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변화를 위해서는 딱 한 걸음, 그것으로 충분하다.


∥ 누구나 직장에서 용히가 되기를 꿈꾼다. 물론 쉽지 않다. 나 역시 직장에서 항상 용히일 수만은 없다. 때로는 꽃잎이었고, 때로는 일만이었다. 하지만 겹겹의 시간 속에서 깨달았다. 용기 내어 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걸. ∥ p. 243-244


고소한 복수에서 머물지 않고 노동부나 인권위, 공공단체에 호소하는 방법을 제안한다든지, 근로기준법 등의 관련 법규를 알려준다든지, 

다른 관련 서적의 내용들을 인용하기도 한다.

그리 대단한 대처법이 아닐지라도, 저자가 진지하게 직장 내 문제점들을 고민하고 있음을 느끼게 했다. 어쩌면 그것이 가장 큰 위로와 공감이 되어주는 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건 내 직장이, 내 일이 나를 갉아먹지 않게 하는 것이다.

∥ 직업이나 직장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나답게, 너답게, 우리답게 즐겁게 살았으면 좋겠다. 

자신을 사랑하면서…. 자신을 사랑하면 용기가 솟는다. 

그런데 이것만큼 좋은 직장생활 호신술이 없다. 

직장에서 벌어지는 온갖 무례하고 부당하고 불편하고 불쾌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최고의 직장생활 호신술은 바로 나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용기다.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에 당당히 맞설 수 있다. ∥ p. 236-237



그것은 80년대 생으로 대표되는 밀레니얼 세대가 이제 막 터득한 것이기도 하고,

90년대 이후 생으로 대표되는 Z세대가 기본적으로 장착하고 있는 생각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발칙한 상상’이었던 삼우실의 태도가 앞으로는 상식이 될 거라는 말이다.



얼마 전에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직원들에게 『90년생이 온다』라는 책을 선물했다고 한다.

꼰대들은 좋건 싫건 새로운 시대에 적응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본문 중에 한 구절로 대신한다.



∥ 그렇다고 해서 상사는 자기 자신이 해야 할 잡무까지 막내 업무에 은근슬쩍 끼워 넣지 마시라. 자칫 잘못하다가는 당신이 영원히 막내로 남는 수가 있다. ∥ p.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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