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여름을 이 하루에 레이 브래드버리 소설집 2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이주혜 옮김 / 아작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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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로 되돌아갈 수는 없을까요?”
“뭐가? 문명 말이냐? 그건 아무도 원하지 않아. 나도 원하지 않고!”
“나는 조금은 참을 수 있을 것 같아.” 뒤쪽에 서 있던 또 다른 남자가 말했다. “문명에도 아름다운 면이 조금은 있었다고.”
“바보 같은 소리 집어치워.” 그릭스비가 소리쳤다. “그럴 여유가 어딨어.”
“아아.” 그 남자 뒤의 또 다른 남자가 말했다. “언젠가는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 나타나 다시 문명을 완성할 거야. 틀림없어. 따뜻한 마음을 가진 어떤 사람이 나타날 거라고.”
“아니야.” 그릭스비가 말했다.
“맞아. 예쁜 것들을 볼 수 있는 영혼을 가진 자가 나타날 거야. 어느 정도는 우리에게 되돌려줄 거야.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그런 문명 말이지.”
“무엇보다 문명에는 전쟁이 있다는 걸 알아둬!”
“하지만 다음 문명은 다를지도 몰라.” p. 259-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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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맛 7작 - 제1.2회 테이스티 문학상 작품집
박지혜 외 지음 / 황금가지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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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테마로한 장르소설 공모전 ‘테이스티 문학상’ 1, 2회 수상작들과 브릿G에서 선정된 1편의 단편이 수록된 소설집이다.
황금가지에서 운영하는 사이트 브릿G에서 선보이는 두 번째 작품집이다. 정말 열일 하는 황금가지다. 다양한 성격의 공모전과 창작사이트, 종이책 출판이 유기적으로 맞물려서 활발히 소설을 세상에 내놓고 있다. 열악한 출판시장, 그 중에서도 더 열악한 장르소설계에서 보기드문 선순환 시스템을 보여주고 있다. 역시 업계 대표 브랜드다운 행보다.

음식을 테마로 한 소설은 어떤 것이 있을까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나로서는 아주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책의 띠지에 적힌 ‘허기질 때 읽지 마시오’라는 주의문은 허풍이 아니었다. 작가들의 음식 묘사는 음식에 대한 내 기억과 만나 가공할 위력의 ‘급허기짐’을 선사한다. 하지만 먹고 싶은 걸 먹고 싶을 때 다 먹고 살 수는 없는 법. 먹방 보는 마음으로 입맛만 다시며 읽어나갔다.


1. 박지혜 <해피 버스데이, 3D 미역국!>
3D ‘음식’ 프린터 등의 sf적 발상과 생일 미역국이라는 일상적 소재는 사실 서로 꼭 들어맞지 않고 덜그럭거리는 느낌이 있다. 이야기 구성이 작위적인 느낌도 있어서 마치 재료들이 조화를 이루며 하나의 맛을 이루지 못하는 음식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음식에 대한, 그리고 그 음식을 먹는 과정에 대한 정성스러운 묘사는 읽는 재미와 생동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또 이야기 말미의 소박한 메시지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마저 느끼게 했다.

“(...) 어쩔 수 없이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는 하지만, 기술이라는 게 우리에게 뭔가를 주는 존재인지, 아니면 빼앗아 가는 존재인지 정말 모르겠단 말이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지. 진짜 팔 대신 기계 팔을 달았다 해서 뭔가를 잃거나 새로 얻은 건 아니지 않느냐고. -1과 +1이 더해지면 0이 되듯이 우리는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라고.......” p. 42


2. 장아미 <비님이여 오시어>
사극 특유의 어휘 사용(제주도 방언을 포함한)이 효과적으로 이뤄지며 분위기 조성을 돕는다. 반면에 이야기 자체는 서양풍의 판타지를 닮아 있어 독특하게 느껴졌다.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래곤 퀘스트>랄까. 물론 공주를 구해오는 게 아니라 용의 심장을 구해오는 거지만.

짐승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모량이란 캐릭터에게서는 개통령 강형욱 조련사가 느껴졌고, (“그렇지 않소. 개들은 충직한 존재지요. 그들의 본성은 선하오.” p. 65)
일행이 민가를 지나다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하는 장면에서는 엉뚱하게도 ‘한끼줍쇼’라는 프로그램이 떠올랐다. (“무산 일로 여까지 왔수까. 안트레 들어옵서, 혼저, 들어옵서. 마침 잘 됐수다. 저녁이나 먹엉 갑서.” p. 86)

인물들의 동기가 약간 불분명 하다는 점이 걸린다.
동기가 불분명 하니 인물들간의 성격이 다소 섞이는 느낌 마저 든다.
남자 주인공(이담)은 왕의 뜻을 거스른 과거가 있지만 이번의 명은 따른다. 과거에는 동물을 위해 희생을 치르지만 현재는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특히 여자 캐릭터(모량)가 심한데, 용을 잡는 걸 반대하다가 갑자기 동조하고, 기도의 대상이 바뀌는 부분이 석연치 않다.
마지막에 제주도에 남겠다는 이유도 선뜻 이해되지는 않았다. 비장하고 아름다운 희생을 해줄 존재가 필요해서 여자 캐릭터가 그 역할을 떠맡은 느낌이다. 용이 여자의 몸을 빌려 말하는 것도 그렇고 대단히 기능적으로 소모되고 있다. 모든 모순을 봉합시키는 기능을 맡고 있달까.
분위기 조성에 비해 내구성이 약한 작품이었다.

앞서 드래곤 퀘스트를 언급했었는데, 용의 성격 또한 전통적인 한국형 용이라기 보다는 일본 대중문화에서 볼 법한 존재같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원령공주에 등장하는 동물신들이었다. 인간의 탐욕을 벌하려는 분노한 동물신. 신령하지만 물리적으로 해할 수 있고 심장을 꺼낼 수 있는 존재.

어찌보면 이 이야기는 마치 인간구원을 거부하는 예수님(구원자)의 이야기 같기도 하다. 인간은 눈앞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저주를 자초했고, 그 피값은 훗날 반드시 치뤄지고 말 것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요구하던 이스라엘 군중들이 그 책임에 대해 묻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자신들이 그 책임을 물겠다고 한 것처럼.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찌어다 하거늘”
‭‭마태복음‬ ‭27:25‬)
“들어라, 어리석은 자들이여. 내 힘을 앗아 가 당장의 기갈을 면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대들, 결국은 점점 더 가난해질지어니 내 자식은 살아남아 염통을 꺼내 먹은 자들, 그 자손의 자손들까지 대대손손 저주하리라.” (p. 93)

이야기 속 용은 죽음을 맞게 되지만 언젠가 그의 복수가 이뤄질 거라는 것을 독자는 안다. 그리고 나는 그 복수가 일본에 의한 침략이 아닐까 짐작했다가 금방 그만 두었다. 그렇게 본다면 역사를 지나친 인과응보의 과정으로 보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잘못을 했기에 일본에게 당해도 싼 건 아니지 않은가. 그건 일부 대형교회 목사들이 주장하는 역사 해석과 다를 바가 없다. 제국주의 열강들이 선을 많이 쌓아서 복을 받은 것일리 없다. 단순히 후속편을 암시하는 장치로 보는 게 옳을 것이다. 그리고 시리즈로 나와도 될 좋은 캐릭터 조합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3. 한켠 <스파게티의 이름으로, 라멘>
현실 풍자를 표방한 코미디인데, 창의성이 많이 부족해 보인다. 작품 속 대사를 빌려 말하자면 <네, 네, 창의성이라곤 정말 하나도 없네요.>(p. 122)
물론 탐정 가족이나 생활고로 인한 계약결혼 등 독특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뒷받침 하는 설정들은 어디선가 본 듯한 요소들 뿐이다.(파스타리안이라는 신흥 종교마저도!) 현실을 그대로 가져온다고 현실 풍자는 아니지 않은가. 좀 더 재치를 부려 새로운 요소를 넣어본다면 좋은 시리즈물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4. 조동신 <류엽면옥>
소박한 성취를 겨냥한 추리물. 깔끔하다.
사건이 제시되는 부분까지는 문제가 없어보이는데, 그 이후의 결말이 좀 느닷없게 느껴진다. 독립군에 대한 주인공의 태도가 이야기 내내 선명하지 못하다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나타난다. 처음에는 동조하지 않는 소심한 인물이다가 마지막에 과감하게 행동했다면 좀 더 선명한 캐릭터가 되지 않았을까. 욕망이 분명하지 못하다 보니 인물을 추동하는 것이 억울함, 살인에 대한 혐오등으로 옮겨간다. 아쉬운 부분이다.
‘본정통’을 ‘오늘날의 종로’로 설명한 각주(p. 144)는 의아했다. 본정은 혼마치, 즉 조선인의 종로와 구별되는 일본인 거리로 지금의 충무로나 명동 일대를 칭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정확한 확인이 필요해 보인다.


5. 유사본 <하던 가락>
브릿G의 앞선 책 <단편들, 한국 공포문학의 밤>에서 봤던 이름이라 반가웠다. 공포 잘 쓰시는 분이 음식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궁금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무시무시한 결과물을 내놓았다.
이 지점에서 맛있는 맛이 아니라 더부룩하고 버거운 음식 맛이 느껴진다.
잘 짜여진 대사와 맛깔나는 묘사들 속에서 기묘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서스펜스가 훌륭한 영화 장면을 보는 기분이었다. 황인호 감독의 영화 <몬스터>에서 족발집 장면이 떠올랐다.


6. 손장훈 <군대 귀신과 라면 제삿밥>
군대생활의 부조리를 낭만과 농담으로 포장하는 흔한 군대이야기다. 소소한 에피소드로 채워져있는데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다. 양으로 승부하는 작품이라 맛없는 음식을 억지로 꾸역꾸역 먹은 느낌이다. 군대 안 갔다온 사람도 알 수 있을 정도의 익숙한 에피소드들에 귀신이라는 소재가 붙은 건데, 그 귀신도 편의적으로 쓰일 뿐이라 아쉬움을 준다. ‘군대 귀신’과 ‘제삿밥’을 연결지어 봉합한 결말은 더 이상 먹을 수 없는 더부룩한 상태에서 쉽게 소화 안 되는 마지막 음식을 입속으로 밀어넣는 느낌이었다.


7. 김영주 <커리우먼>
얼핏 코웃음이 나오는 실없는 설정이라고 생각했는데, 다 읽고 나서는 현실에 판타지를 입힌 따뜻한 이야기라고 느껴졌다. 온기가 스물스물 올라온다. 설정이나 톤이 붕 떠있다고 느끼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다 수긍하고 말았다.
무엇보다 문체가 안정적이어서 신뢰감을 가지고 몰입할 수 있었다.
넓은 의미에서의 페미니즘 소설로 볼 수 있을 것 같고, 아작 출판사에서 나온 <혁명하는 여자들>이라는 페미니즘 단편집이 떠올랐다. 그 단편들 사이에 껴있는 모습을 생각하니 하나도 어색하지가 않다.




아직 특화된 하위장르가 아니어서 그런지 상당히 재밌고 신선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또 같은 이유로 아직은 덜 여문 작품 수준이 아쉽기도 했다. 그래도 새로운 시도들은 언제나 즐겁다. 여물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 작품들을 소개해 주기를 황금가지에 바라본다. 응원합니다 황금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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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헌의 한국대중문화사 1 -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강헌의 한국대중문화사 1
강헌 지음 / 이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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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은 추악한 속물성과 전 인류적인 정의에 대한 공감을 동시에 실현하는, 예측 불가능한 개념이다. 대중문화는 바로 이 대중의 표현이자 이들이 생존하는 참호이기도 하다. 이것은 그동안 인류가 구현해왔던 그 어떤 문화보다도 역동적이고 강력하며 그 파급력이 크다. 이 대중문화에서 대중을 분리해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p.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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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밤 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밤 1
배명은 외 지음 / 황금가지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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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가지가 운영하는 ‘브릿G‘라는 소설 투고 사이트에 올라온 소설들 중 우수한 단편 공포 소설을 엄선한 단편집이다.

장르소설 대표 출판사인 황금가지가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신인을 발굴하는 셈이다.

원래 문학출판사가 할 일이 신인 발굴 아닌가?

공모전이라는 경로도 있지만,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바늘구멍에 가깝다. 그에 비해 훨씬 접근도가 높고 발표의 부담도 없는 브릿G라는 사이트를 잘 활용하고 있는 것 같다.

아주 새로운 형식으로 본래의 기본으로 돌아간 것 같달까. 암튼 관심 있게 지켜보던 중 이렇게 단편집을 볼 기회까지 생겼다.



처음 책을 펴서 책 날개에 실린 작가들의 소개를 보면 이미 여기에서부터 책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것 같다.

첫 순서로 이름이 실린 배명은 작가의 소개를 보자

‘2008년 『한국공포문학단편선』을 보고 매료되어 공포문학에 입문. 일상과 자연의 틈에 토속신앙을 입힌 공포를 쓰는 걸 좋아함‘


이게 다다. 커뮤니티 프로필 소개 같은 느낌.
실제 등단 경력이 있는 작가는 4명에 불과하다.

책이라기 보다는 잡지같은 느낌도 있는데,
무게감 있게 수준 높은 작품들을 엄선했다기 보다는(물론 수준 높은 작품들이긴 하지만) 현시대의 젊은 작가들이 어떤 이야기들을 쓰는지를 보여주기에 더 적합한 책 같기 때문이다.

책은 열 명의 작가들의 단편 열 편이 실려 있고, 마지막에는 저자 추천과 리뷰어의 동의를 얻은 리뷰들이 실려 있는 모양새다.

이 리뷰들 역시 브릿G에서 실제로 독자가 쓴 것들인데, 인터넷 사이트의 생생함과 책의 무게감 두 가지 장점을 모두 취하려는 책의 포지션이 다시금 드러난다.

리뷰들의 수준은 그렇게 높지는 않았기에 따로 코멘트를 달지는 않겠지만, (리뷰에 대한 리뷰를 달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이런 시도 자체가 참 재밌다고 느껴진다.

그리고 수준이 높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남이 쓴 글을 그렇게 꼼꼼하게 읽고 분석하고, 해석한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최소한 작가만큼의 품은 들여야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책에 대한 총평을 내려보자면, 브릿G가 지향하는 출판사와 웹사이트의 시너지 효과에 대한 의도 자체는 성공적이었다고 본다. 이런 시도 자체가 장르문학을 넘어서 문학 전체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장르 문학 중에서도 더욱 마이너한 ‘공포‘ 장르에 대해서도 힘을 실어주는 것 같아서 반가웠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이렇게 호러 장르에 관심이 없을까.



각 작품별로 코멘트를 달아본다.



배명은 「허수아비」

: 일단 ‘허수아비‘라는 소재를 발견하고 그 소재를 다루는 면에서 뛰어난 재능이 느껴졌다.
마치 이토 준지가 소재로 잡고 그려냈을 법한 악몽을(진짜 ‘허수아비‘라는 이토 준지 작품이 없단 말인가? 그게 더 놀라운데..) 훌륭하게 그려냈다.
실제로 도입부는 이토 준지의 느낌도 난다. 하지만 허수아비를 만드는 소름끼치는 장면이라던지, 줄지어 서 있는 허수아비의 비주얼이나 절정부의 영화적인 몽타주(‘올라온다.올라온다!‘)는 이 소설만의 위대한 성취다.
첫 작품으로 선정될만한 뛰어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산화 「증명된 사실」

: 이 작품은 워낙에 웹상에서도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브릿G에서 먼저 이 작품을 봤었다.
굉장히 SF적인 접근을 했는데, 연출이나 분위기 보다는 논리적인 반전으로 스산함을 주는 독특한 작품이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간다면 프랑켄슈타인이나 러브 크래프트같은 매드 사이언티스트물도 가능한 작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왼손 「이화령」

: 긴장감이 대단하다. 제한된 시간, 제한된 체력,
제한된 구간... 잘 통제된 설정 때문에 긴장감이 극대화 된다.
남을 이기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이겨내야 한다는 면에서 스포츠가 가진 잔혹한 면을 그린 짓궂은 작품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유사본 「위탁관리」

: 신체강탈 이야기가 원래 지독하게 불쾌했다는 사실을 오랜만에 상기시켜줬다. 명백히 데이트 폭력, 그 중에서도 데이트 약물? 혹은 물뽕에 대한 은유처럼 느껴졌다.
막판의 하혈 장면은 약자로서의 여성이라는 사회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사마란 「그네」

: 읽는 내내 계속해서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게 만든다.
누가 더 괴로울까. 누가 더 심한 행동일까.
생각은 그네처럼 양쪽을 오간다.
그 계산의 끝에서 마침내 알 수 없는 미궁으로 빠진다. 모든 계산은 무의미해지고, 인생은 공포와 고통만이 남는다. 참혹하다.



장은호 「천장세」

: 월세와 월월세, 월월월세인 천장세까지. 현실상을 담은 이 이야기는 공포라기 보다는 우화에 가까웠다. 거의 벌레나 쥐 수준으로 낮아진 인간의 생활 수준을 다루기에 이보다 좋은 메타포는 없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공포 보다는 코미디에 적합한 아이디어였다고 생각한다. 공포로 마무리 지으려는 고뇌가 느껴졌고, 끝내 그 마무리는 아쉽기만 하다.(코미디였으면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지현상 「완벽한 죽음을 팝니다」

: 모든 게 너무 노골적이고 직접적이어서 상당히 아마추어 같은 느낌의 작품이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소재와 전개가 아쉽다. 공포로서의 기본적인 틀만 잘 유지하고 있다.



해도연 「이른 새벽의 울음소리」

: 남녀역할의 반전된 재미를 주고, 다시 그 역할이 바뀌면서 작가가 의도한 재미가 드러나는 작품이다. 육아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힘들다는 진리를 보여주기에 적합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걸 가상 상태에서 체험하는 게 여자 쪽이라는 점이 조금은 불편했다. 아마 실제 현실과의 괴리가 있는 특별한 경우이기 때문일 것이다.



엄성용 「고속버스」

: 서스펜스를 주기 좋은 재밌는 설정이었지만 충분히 살리진 못한 것 같다.
잘못은 남자가 했는데, 죽어나는 건 여자들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남자들끼리의 거래로 두 여자의 죽음이 처리된다는 점도 그렇다.



우명희 「더 도어The Door」

: ‘일본인‘이라는 설정이 아니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 같은 이야기라는 점에서 재밌었다. 영리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닫힌 문은 언제나 공포의 대상이다. 안이 제대로 보이지 않은 살짝 열린 문도 마찬가지.
엔딩이 약하긴 했지만 여러가지 상상을 하게 만드는 점에서 미덕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런 책이 더 많이 나와서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자극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브릿G에서 팬이 된 작가들이 있다. 벌써 그 작가들의 작품을 책으로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황금가지님들 빨리빨리 부탁드립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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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우리에겐 시간이 있으니까
듀나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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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볼 수 있는 의식은 단 하나 자신의 의식뿐이야. 타인의 의식은 단지 추측할 수 있을 뿐이야. 실상 인간이 타인에게 자아가 있다고 추측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 ‘자신과 얼마나 닮았는가’.”
이진서는 입을 다문 채 눈을 깜박였다.
“인간과 벌레의 유전정보는 99% 일치해. 하지만 인간은 벌레에게 자아가 있다고 믿지 않지. 이 배의 선원들은 다 제 각각으로 생겼지만 너는 네 선원들에게 자아가 있나 없나 의심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결국, 인간이 누구에게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는가는 단순한 습관일 뿐이야. ‘인간이 아닌’ 인간은 역사상 얼마든지 있었어. 노예라든가, 식민지 주민이라든가, 다른 인종이라든가. 하지만 볼 수 있는 게 자신의 자아뿐이라면 그게 정말 자아인지도 증명할 도리는 없어.” p. 209, 김보영 <얼마나 닮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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