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 ‘소’의 눈을 통해 바라본 우리네 삶
흰별소 | 이순원 글 | 단비
2015.04.01
두려움과 공포에 떨며 인류가 뗀석기를 휘두를 때, 그 맞은편에는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몸집과 큰 뿔을 자랑하는 그야말로 ‘소’들의 원조 조상격인 야생 들소가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일만 년 전, 그들은 인간의 손에 사육되기 시작했고 농사가 시작되면서 인류와 함께 땅을 일구며 생업의 우정을 함께 나누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우유와 고기만 내놓는 가축으로 남았다.
여기까지가 인간의 눈으로 바라본 간략한 ‘소’의 역사다. 그렇다면 그들의 눈으로 본 인간들의 세상은 과연 어떠했을까? 이 책 《흰별소》는 구한말 갑신정변을 시작으로 일제식민지와 산업화를 거치며 120년간의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의 세상을 ‘소’의 눈으로 바라본 이야기다.
병술년(1886년), 노비제가 폐지되는 그 역사적 순간 속에서도 강원도 깊은 시골, 우추리에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사건은 노름빚에 팔려 어미와 생이별을 한 송아지 그릿소가 차무집 외양간으로 들어 온 일이다. 가난한 집이 남의 집에서 빌려다 키우는 소인 그릿소는 2년 뒤 흰별소를 낳고 주인에게 돌아가고, 차무집 외양간의 주인이 된 흰별소는 미륵소를 낳고 미륵소는 버들소를 낳는다. 뒤를 이어 화둥불소, 흥걸소, 외뿔소, 콩죽소, 무명소, 검은눈소, 우라리소, 반제기소가 차례로 차무집 외양간을 지킨다. 이 과정에서 차무집과 마을 사람들도 일제 시대와 6·25전쟁 등 근현대사의 풍파를 맞으며 인간과 소의 관계에도 변화가 생긴다.
일본인 관리에게 모욕을 당한 새댁의 앙갚음이라도 해주듯 면사무소와 관리를 들이 받아 버린 화둥불소, 유난히 몸이 약했던 안주인의 목숨을 이어 받고 태어났다고 여겨지던 외뿔소, 삼팔선으로 인한 동족상잔의 비극은 무릇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남쪽으로 흘러 간 소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이산(離散)소가 되었으며 장성한 아들을 인민군으로 내놓지 못한 차무네는 가족 같던 외뿔소를 그 대가로 넘겨야 했다. 동네잔치가 열릴 때면, 자식들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서라면 외양간의 소들은 고기가 되기도 했고 급전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이 온전치 않게 태어났지만 누구보다 소를 잘 돌보았던 차무집 양아들 ‘세일’에게 소는 둘도 없는 우정을 함께한 친구였다.
소설 속,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소와 인간이 버무려내는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들의 삶과 우리네 삶이 그리 다르지 않다고 느껴진다. 굴곡진 삶 속에서 서로의 희로애락을 함께 느끼며 지나온 세월은 그래서 더 특별하다. 더불어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내주면서도 인간을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게 자신의 역할이고 끝까지 그 역할을 다하고 죽고 싶다던 그들의 이야기는 저절로 고개 숙이게 만든다. 그래서 이 소설은 ‘소’에게 올리는 헌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