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2.01
며칠 전 딸아이와 분리수거를 마치고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거울을 보며 하는 말이 “이 얼굴 맘에 안 들어!”였다. 나는 놀라 황급히 “왜?”라고 물었지만 딸아이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너무도 쿨 하게 “그냥”이었다. 헐. 양쪽 집안의 첫 손녀이자 아빠 나이 사십에 힘들게 얻은 터라 물고 빠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는데. 더구나 요즘 유행(?)한다는 ‘아이의 자존감 키우기’에 뒤처질세라 연애 때도 안한 오글거림을 가까스로 참아가며 존중과 사랑 표현에 최선을 다했건만! 공들여 쌓은 4년의 육아탑은 그 한마디로 처참히 무너졌다.
무너진 가슴을 쓸어내리며 곰곰이 범인이 누굴까 생각해보았다. 혐의자들의 얼굴이 금새 떠올랐다. 그렇다면 혐의자들을 아이에게서 떼어놓으면 될 터, 그런데 문제는 한두 명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우리 부부는 돌 전 아이 책을 준비할 때 부러 공주에 관한 책은 일절 고르지 않았다. 하지만 어디서 물려받았는지도 모르게 섞여 들어간, 어른 손바닥만한 백설공주 책이 한 권 있었는데, 딸아이는 귀신같이 그 책을 찾아내 한동안 잘 때도 꼭 끼고 자곤 했다. ‘그러다 말겠지, 백설공주 한 명 정도는 알아야 또래랑 말도 좀 통하고….’ 이렇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겼는데, 딸에게는 어느 덧 동네에서 사귄 친구보다 공주의 친구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있었다. 거기에 겨울왕국 자매공주의 출현은 그야말로 화룡점정이었다.
화려한 금발과 갈색의 풍성한 긴 머리카락, 조막만한 얼굴의 반을 차지하는 커다란 눈과 오똑한 콧날이 쌍꺼풀 없고 쭉 찢어진 눈과 아직도 올라올 기미가 없는 콧대를 가진 딸아이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은 게 틀림없었다. 오늘도 라푼젤 티셔츠를 입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어린이 집에 들어간 아이를 보며, 기왕 공주여야 한다면 씩씩한 여장부 ‘메리다’를 소개해줄까, 오늘밤엔 《종이 봉지 공주》를 읽어줘야 하나. 육아의 고민은 끝이 없다.
외모에 대한 지적은 시작에 불과하다. 공주에 필이 꽂힌 딸아이와 옷이라도 사러 가면 이건 정말 전쟁이 따로 없다. 딸아이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세계적인 캐릭터들이 대환영을 한다. 압도적이다 못해 위압적이다, 적어도 내겐.
시각적 충격에서 벗어났을 때쯤, 이미 딸은 어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 실로 왕국에 온 듯한 행복감에 빠져있다. 그럴 때면 그런 엄마들을 싸잡아 욕했던 싱글 날의 실수를 잠시 반성해본다.
기어이 오늘 밤도, 딸아이는 비치타월로는 부족했던지, 이 겨울(?)에도 한여름 잠옷치마를 꺼내 입는다. 그리고 커다란 암홀 사이에 이불을 구겨 넣어 달라고 시녀(?)에게 주문한 뒤, 긴 치마를 늘어뜨린 채 거실바닥의 먼지를 유유히 쓸고 다닌다. 진정 육아의 해답은 기다림 또 기다림이라고 하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