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리뷰 소설집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에 실린 리디아 데이비스의 단편을 몇 년 전 처음 읽었을 때 별로 끌리지 않았다. 소문을 들은 것처럼 알게 된 데이비스의 명성을 고려하면 실망스러울 정도로. 내용과 형식 중 뭐가 내 구미에 맞지 않았는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데 둘 중 어느 하나가 아니라 둘 다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재독하려다가 그냥 덮었고 오늘 오랜만에 다시 읽으니 괜찮네. 나중에 또 읽고픈 훅 치고 들어온 부분도 여럿 있다. 부디 내가 잊지 않기를. 독서란 궁극적으로 독자 자신의 문제라는 점을 새삼 실감한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르다.

Composition with Gray and Light Brown, 1918 - Piet Mondrian - WikiArt.org


올해 번역출간된 리디아 데이비스의 책 '우리의 이방인들'을 담아놓는다.






우리 작가들은 어쩌면 너무 많은 이야기를 지어내는지도 모르지. 그런데 언제나 현실이 훨씬 더 나빠!

당신, 이 이야기의 진정한 깊이를 이해할 수 있겠어?
정말 이상하지, 인간의 두뇌란! - 플로베르가 보낸 열 가지 이야기 | 리디아 데이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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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아 데이비스의 글을 읽기 전 이름부터 먼저 들었고 그 후 데이비스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를 읽었다. 그때는 리디아 데이비스의 단독 저서가 번역되지 않았을 때였다.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는 미국 문예지 파리 리뷰 발표작 중 여러 작가들이 선정한 모음집으로서 앨리 스미스가 리디아 데이비스의 '플로베르가 보낸 열 가지 이야기'란 작품을 고르고 추천의 변을 썼다. 앨리 스미스가 쓴 '문장 몇 줄로 우주를 전달한다'로부터 아래 옮긴다. 역시 읽고 싶어지게 만드는 서평이라 할 수 있겠다. 앨리 스미스 - 리디아 데이비스 - 플로베르로 이어지는 연쇄의 매력.

Composition with Grid IX, 1919 - Piet Mondrian - WikiArt.org


cf. 앨리 스미스는 순위가 높진 않지만 현재 알라딘에서 투표가 진행 중인 2025 노벨 문학상 예상 후보 중 한 사람인 영국 작가이다. https://www.aladin.co.kr/events/wevent.aspx?EventId=294540&idx=3#dw




<플로베르가 보낸 열 가지 이야기>는 (번역가이기도 한) 데이비스가 《보바리 부인》을 새로 번역하다가 작가인 플로베르가 친구이자 연인이었던 루이즈 콜레에게 보낸 편지를 읽고 썼다.

<플로베르가 보낸 열 가지 이야기>는 어디서 플로베르의 이야기가 끝나고 어디서 데이비스의 글이 시작되는지, 각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또렷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어떻게 연결되고자 하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순환은 가깝고도 멀다.

"생각이 움직일 수 있는지,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아래로 흐르는지 궁금해." 다른 누군가가 들려주는 이 이야기 안에서는 어떤 것도 홀로 떠나는 여행이 아니다. 이야기 자체가 공동의 형식이자 행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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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스트 2024년 5.6월호 리뷰 중 리디아 데이비스 소설집 '불안의 변이' 소개 글이 흥미롭다. 읽고 싶어지게 만드는 서평이다.




나는 리디아 데이비스의 이야기가 가진 실험적인 형태나 특징적인 문체가 다음과 같은 인식으로부터 비롯했다고 생각한다: 삶의 어떤 지점에든 닻을 내리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내가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는 삶의 중요한 문제들이 실은 ‘나’를 배제한 채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글이 ‘삶의 핵심’이라는 이름의 강 속으로 가라앉지 않게 하는 데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거의 지독하다고 할 만하다.

‘삶의 핵심’이라는 이름의 강 속으로 문장이 가라앉기 시작한다고 해서 그것이 핵심의 핵심, 그러니까 ‘삶의 핵심’이라는 강의 핵심에 다다르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우연일 뿐. 이것이 리디아 데이비스의 글이 시종일관 보여주는 냉소적인 유머를 설명해준다. 강은 흐르고 있고, ‘삶의 핵심’도 흐르고 있다.

이 강의 어느 지점에 문장을 가라앉혀야 원하던 목표 지점에 안착하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며, 설령 그 지점을 알아낸다고 해도 문장을 원하는 지점에 안착시키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 김유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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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 희곡 '갈매기'(박현섭 역)가 아래 글의 출처이다.

Colette Dumas Lippmann, Geneviève Straus et Guy de Maupassant(1889) Par Giuseppe Primoli







니나 그건 무슨 책이에요?

아르카디나 모파상의 『물 위에서』예요. (혼자 입속으로 몇 줄을 읽는다.) 이 뒤로는 재미도 없고 사실 같지도 않아. (책을 덮는다.) 왜 이렇게 마음이 안정이 안 될까. 그런데 우리 콘스탄틴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왜 그렇게 따분하고 시무룩한 얼굴로 있지? 그 애는 하루 종일 호수에서만 지내고 있으니 통 얼굴을 볼 수가 없네요.

마샤 그 사람은 지금 마음이 편치 않아요. (수줍어하며 니나에게) 부탁인데, 그 사람 희곡을 낭독해 주세요!

니나(어깨를 움찔하며) 듣고 싶으세요? 그 희곡은 너무 재미없어요! - 제2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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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세계문학전집 '체호프 희곡선' 중 '갈매기'로부터 옮긴다.


사진: UnsplashMarcel Strauß





속물스러운 장면과 대사들 속에서 가정의 일상사에 써먹을 좀스럽고 뻔한 도덕이나마 건져 내려고 애쓰는 걸 보노라면, 그리고 천편일률적인 연극들 속에서 하나같이 똑같고 똑같으며 똑같은 짓거리를 반복하는 걸 보노라면 저는 모파상이 자신의 머릿속을 짓누르던 속물스러운 에펠탑으로부터 도망쳤듯이 멀리멀리 도망치고 싶습니다. - 제1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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