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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가 돌아왔다
김범 지음 / 다산책방 / 2019년 10월
평점 :
p.132. 순간이란 참으로 강렬한 것이다.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놓쳐버리게 되는 어느 한순간. 그러나 스 순간을 놓치면 어떤 경우엔 전체의 의미를 다 오해하게 될 수도 있다.
p.178. 그러나 인생이란 원래 정의롭지도 않고 인자하지도 않아서 가장 중요한 순간엔 늘 이렇게 밑바닥을 보여주었다.
<할매가 돌아왔다>의 표지에서 느껴지는 첫 느낌은 재미나고 유쾌한 코미디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화려한 복장의 할머니가 선글라스를 낀 모습이 왠지 모르게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벌어질 듯해서 가볍게 첫 문장을 읽었다.
p.9. 2012년 한여름 날이었다. 할머니가 돌아왔다.
주인공 동석은 할머니가 광복을 앞두고 죽었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정끝순 할머니가 무려 67년 만에 돌아온 것이다. 얼마나 반가웠을까? 거기에 할머니는 60억이라는 유산도 있다고 한다. 그러니 더욱 반가웠을 것이다. 하지만 동석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고모는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인다. 물론 60억이라는 유산을 알기 전까지.
60억이라는 거액의 유산을 가지고 돌아온 할머니의 사연은 정말 기가 막히다 못해 할 말을 잃게 만든다. 가슴이 먹먹하다는 표현이 딱 맞는 상황이 펼쳐지고 그로 인해 표지에서 받았던 첫 느낌은 사라지고 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야기를 읽을수록 웃음이 나고 재미나다. 할머니의 세월은 너무나 가슴 아픈데 집식구들이 보이는 반응과 주인공 동석의 행동들이 정말 재미나다. 이 책은 슬픈 코미디다.
이 집안의 여자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있다. 그런데 이 집안 남자들은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무언가 살짝 모자란 이들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 소설이 더 슬픈 코미디 같다. 사실을 확인 하지도 않고 사랑하는 여인을 몰아붙이는 할아버지, 자신의 위치를 알지 못한 체 딸에게 부담을 주는 아버지, 거기에 자신의 오랜 연인과 결혼한 친구를 만나 술을 얻어먹는 주인공(동석)까지 정말 구차한 남자들이 등장한다. 그런 남자들에게 상처받은 여자들이 이 소설의 주인공인 것 같다. 물론 이야기의 전개는 ‘나’ 동석이 이끌어가지만.
특수한 시대적인 상황에서 그리고 개인적인 상황에서 오는 아픔이나 고통을 자신이 참고 이겨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 등장하는 남자들은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디에 화풀이를 할까? 여기서 이야기는 코미디가 아닌 슬프고 아픈 이야기가 된다. 다시 한번 가족의 진정한 의미를, 사랑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주는 따뜻함이 담긴 감동적인 소설이다.
이야기가 너무나 촘촘하게 이어져서 책을 중간에 덮기란 불가능하다. 정끝순 할머니의 삶을 보상해줄 수 있는 진실은 밝혀질까? 취준생 동석은 직장을 구할 수 있을까? 그리고 60억 유산은 누구에게 돌아갈까? 아니 정끝순 할머니에게 그 돈이 있기는 한 걸까? 극적인 상황이 계속해서 이어져 숨이 차오를 때쯤 이야기는 결말을 맞는다.
왜 이 소설이 영화, 드라마, 연극, 뮤지컬 판권까지 모두 계약되었는지는 끝까지 읽지 않아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말을 보지 않고는 책을 놓지 못할 테니 긴 겨울밤을 함께할 이야기를 찾고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당찬 동주와 허접한 동석 남매를 꼭 만나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