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를 돌보며 - 딸의 기나긴 작별 인사
버지니아 스템 오언스 지음, 유자화 옮김 / 부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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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여든이 훌쩍 넘으신 시부모님과 작년부터 함께 살게 되었다.
두 분은 올라오시기 직전까지 남쪽 바닷가 작은 마을에서 고기 잡고, 농사지어 자식들과 손자들 뒷바라지로 한 평생을 살아 오셨다. 주위 분들이 한 두 분씩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아직은 크게 아프신 데는 없지만 이제는 누군가에게 의지해서 살아가야겠다는 마음이 드셨는지, 예전부터 함께 살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우리 집으로 올라오셨다. 지금도 새벽마다 약수터도 가시고, 집안일도 잘 도와주시고, 두 분이 장 구경도 가시지만 그 연세에는 삶과 죽음이 공존함을 그 분들도, 우리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함께 저녁밥을 먹고, TV를 보다 금세 소파에서 졸고 계시는 것을 보거나,
핸드폰이 망가졌다고 얼굴이 어두워져 가져오시는 모습을 보면 <벤자민 프랭클린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주인공이 점점 어려져 아기가 되어가는 모습이 생각난다.
저자는 손자 손녀를 둔 오십 후반의 나이에 어느 날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돌보게 된다. 총명하고, 자애롭고, 자신에게 엄격하며, 타인에게 관대하고 유머가 멋졌던 어머니는 어느 날 갑자기 정신줄을 놓더니 서서히 무너져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다. 저자는 그 모습을 어머니가 어느 날 갑자기 무너져 내린 폐허더미에 갇혀버려 도무지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으로 적고 있다. 폐허더미에 갇혀버린 것은 어머니의 육신이 아니라, 어머니의 정신, 사랑, 자아, 의지 등 어머니의 본질이다. 치매를 가진 부모를 돌보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지진이나 사고로 도무지 손 쓸 수 없는 폐허더미에 깔린 체 죽음을 맞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그런 사고는 기한이 언제까지 일지 어렴풋이 알 수 있지만, 영혼이 떠나가 버린 치매라는 병은 당사자도 가족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절망의 터널을 걸어가는 것이다.
7년이란 시간동안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어머니의 육신을 바라보는 아픔보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어머니의 본질을 쫓으면서 저자 또한 절망의 늪에서 함께 허우적거렸다. 그리고 끝내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무력한 사람’인 어머니를 홀로 죽어가게 내버려두지 않고 끝까지 그 가는 길을 지켜보며 함께 했다.
우린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누구나 저자처럼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길을 택하고 걷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저자는 유태인이 죽은 이를 위해 올리는 유대교의 전통적인 기도인 ‘카시디’를 소개한다. 1년 동안 단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에 유대교 예배당에서 열리는 예배에 참석해 성경 읽기와 기도와 끝난 후 카디시를 읊어야 한다고 한다. 생각으로 머리로 하는 기도가 아닌 몸으로 하는 기도의 의미를 생각하니 새삼 나를 돌아보게 된다.
어머니와의 그 시간들 이후 저자는 어머니와 함께 하는 시간들이 없었다면 결코 배우지 못할 인생의 중요한 부분을 배우게 되었음에 감사 드렸다.
‘어머니의 침댓가가 아니라면 내가 어디에서 시편 저자가 “우리에게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가르쳐 주셔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 주십시오.”하고 적었던 그 지혜를 배울 수 있었겠는가?’

내게 이런 일이 갑자기 닥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가끔 드는 요즘, 한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귀한 일을 지켜볼 수 있는 기회를 만나게 해 준 저자에게 참 고맙다. 이 책은 무거운 마음으로 읽어 가겠지만 우리의 삶 또한 항상 깨지기 쉬운 연약한 그릇임을 인정하는 일, 지금 살아가는 사소한 일에 깃든 행복을 발견하고 누리는 것 등 좋은 가치들이 더 빛나게 다가오는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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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가 좋아요 - 행복한 인생을 사는 지혜
쓰지 신이치 지음, 이문수 옮김 / 나무처럼(알펍)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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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문화인류학자이며, 환경운동가인 ‘쓰지 신이치’는 한국계 일본인으로 'SLOW LIFE'라는 말을 전 세계에 처음 퍼트린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남미 에콰도르의 환경운동에 참여하던 중 나무늘보라는 짐승에게 매료되어 ‘나무늘보 친구들’이라는 NGO를 결성하여 활동을 해 왔다. 이후 나무늘보처럼 천천히 사는 삶의 유익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며칠 전 인터넷 뉴스에서 34년 만에 재개관하는 명동예술극장의 극장장 구자흥씨의 기사를 보게 되었다. 인터뷰 담당자가 최근의 화려한 볼거리 많은 대형 뮤지컬이나 연극과 비교하여 명동예술극장이 관객동원이 제대로 될 것인지 걱정하자 그는 멕시코 어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 멕시코의 한적한 시골에서 어부가 낚시를 하고 있었다. 미국인이 다가와 좀 더 많이 잡는 방법이 있을 텐데..했다. 어부가 물었다. 많이 잡아 뭐하게? 많이 잡으면 배도 사고.. 배를 사서 뭐하게? 배를 사면 고기를 더 많이 잡고.. 고기를 더 많이 잡으면 뭐하게? 그러면 좋은 곳에 집사서 편하게 살 수 있잖아.. 이봐 내가 지금 그렇게 살고 있잖아.”
이 책의 시작 부분에 나오는 남미 에콰도르의 어부 이야기를 그에게서 들으니 돈이나 명예에 연연하지 않고 꾸준히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자신의 길을 즐기며 살고 있는 그가 좋아진다.
늘 시간이 없다고 동동거리며 살아가는 어떤 사람들은 사실 바쁜 시간 뒤에 숨은 돈이란 탐욕을 향해 맹렬히 질주하는 것이 아닐까? 경제적 안정을 위해,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서 , 그가 잠시 모모의 시간도둑에게 맡겨둔 시간들은 영원히 찾을 수 없는 시간일 것이다.
저자는 시간과 화해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시간의 나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천천히 설명한다. 나무늘보의 삶의 지혜와 먹을거리 속에 깃든 생명체의 고마움, 뺄셈의 철학 등, 우리의 이력에는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이런 지식의 귀함은 이런 삶의 행복을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시간과 사이가 좋은가? 잘 사귀고 있는가? ‘만약 대답이 예스라면 놀라운 일이다.’
바꾸어 질문하면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 이 말에 많은 돈과 상관없이 행복한 많은 경험과 노하우를 알고 있다면 당신은 꽤 괜찮은 영혼을 가진 괜찮은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최근에 비교적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늘 어떤 목표를 향해 분발 하던 것을 포기하고 생긴 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살게 된 후 여러 가지를 얻었다. 때론 가슴 저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목소리, 저자가 말하는 ‘이러고 있으면 안 돼’ 증후군이 살살 고개를 쳐들기도 하지만 느린 삶의 행복했던 경험은 그런 의혹에서 나를 구해준다. 덕분에 나의 생활은 훨씬 풍요로와 졌고, 건강해졌으며, 사람들과의 관계는 더 좋아졌다. 자연의 경이로움에 눈뜨고 감탄할 줄 알게 되었으며, 자연을 즐기는 법을 알게 되었고, 천천히 살아가는 일이 환경을 보존하고 지구촌의 미래를 밝게 하는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고마운 이 책을 오늘 저녁에 만나는 누군가에게 들려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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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기가 슬픈 이유 - BC 1700년부터 2007년까지, 5천 년 과학사의 명장면 190편
슈렌드라 버마 지음, 박명옥 옮김, 정갑수 감수 / 열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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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가 들리지 않는 봄이었다. 한때 수많은 새들이 지저귀는 새벽의 합창 소리로 고동치던 아침에 이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침묵만이 들판과 숲과 늪에 깔려 있었다.’ -<침묵의 봄> 중

‘모기가 슬픈 이유’가 뭘까? 인류 4천년 과학사에 큰 획을 그은 경이로운 사건들을 기록한 다소 서정적인 제목의 책장을 이리저리 넘겨보았다.
과학관련 저술 활동가인 수렌드라 버마는 BC 1700년부터 2007년까지 과학사의 명장면 190가지를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하였다. 이 책은 어떤 한 분야나 한 가지 사건을 자세히 기록한 학술서가 아닌 사전형식의 과학 교양서로 보인다.
수학, 지구과학, 생명공학, 생물학, 화학 등 다방면에 걸친 과학자들의 노력과 성과와 함께 특이하고 기발한 과학자들의 삶도 함께 살펴 볼 수 있다.

과학의 발달로 인한 화학 약품의 급격한 보급으로 말라리아를 유발하는 유해한 모기나 생물체를 죽이는 강력한 살충제인 DDT가 등장했다. 인체에 비교적 유해한 것으로 알려져 사람들에게 각광받던 DDT는 그 것의 남용으로 어느 순간부터 생물체와 인류를 위협하는 위험한 약품이 되어버렸다.
모기가 슬플 뿐만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과 생태계 전체가 슬퍼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화학 약품의 생산과 판매를 부추기는 다국적 화학 기업들의 행태를 영국의 해양 생물학자, 레이첼 카슨은 <침묵의 봄 Silent Spring>을 통해 고발한다. 매우 용감하고 예언적인 책이라 평가된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은 현대의 환경운동을 촉발시켰다. 사람들의 무분별한 화학 약품 사용이 자연환경을 훼손시켜 생태계에 심각한 불균형을 초래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점차 각성시킨 계기가 되었다.

1978년 ‘원자폭탄 이후 가장 큰 위협’이라고 대서특필된 이 사건은 무엇일까? 바로 시험관 아기를 탄생시킨 체외 수정에 관한 기사이다. 지금은 보편적인 일이지만 당시는 실험용 접시에 난자와 정자를 섞어 수정된 태아를 자궁에 착상시키는 것은 인류 과학사의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 책은 월요병, 컴퓨터 바이러스, 스티븐 호킹의 블랙 홀, 마지막으로 다룬 지구 온난화 문제까지 인류의 삶과 관련된 소소하고 큰 과학적 사건들을 어려운 학술적 용어를 사용하지 않아, 쉽게 읽을 수 있다. 후반기 찾아보기의 색인을 통해, 생소한 과학 용어가 궁금할 때 관련 쪽을 찾아 갈 수 있다. 과학이 낯설고 어려운 사람도 조금씩 읽다보면 ‘과학이란 생명에 대한 사랑을 세심하게 관찰한 것이다’라는 책날개의 멋진 문장에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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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선뎐
김점선 지음 / 시작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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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께 저녁 뉴스에서 서강대 영문학과 장영희 교수님의 타계 소식을 들었다. <문학의 숲을 거닐다>로 만난 그 분은 편안하고 따뜻하고 감동적인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뉴스에 비추어 주는 생전의 모습을 보니, 하얀 얼굴, 동그란 눈동자를 빛내며 , 환하게 웃고 있었다. 목발을 짚고 학생들과 눈을 교감하며 정다운 강의를 하던 그녀는 짧은 생이었지만 오래도록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스스로는 병마와 싸우는 고통의 시간을 살았지만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사랑과 희망을 몸소 보여준 스승으로 말이다.

지난 3월, 63세로 타계한 김점선 화백도 난소암 투병 끝에 세상과 이별을 했다. 몇십조원을 벌어 도심 한 복판에 황무지를 만들겠다던 엉뚱하지만 시원한 그녀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정해진 틀에 저항하던 그녀의 예술혼은 그녀의 그림과 깔깔 웃게 만드는 남겨진 이야기를 통해 이제 다른 사람들이 꾸게 될 것이다.

<점선뎐>은 고 김점선 화백의 유작 수필집이다. 이 한 권의 책으로 만난 김점선은 명민함과 타고난 끼와 열정을 평생의 독서로 가다듬고 닦아, 글과 그림으로 탄생시킨 예술가이다. 그녀의 그림은 존 버닝햄의 그림처럼 그녀만의 아름답고, 단순한 동심이 듬뿍 드러나 있다. 말, 거위, 소녀, 꽃, 누군가는 그녀의 그림에서 샤갈을 본다고 하지만 난 세상의 어린이들을 행복하게 하고 감싸 안는 이름난 그림책 동화작가의 그림들을 보는 것 같다.
아이들의 그림을 보면 항상 즐겁다. 아이들은 선이나 색, 형태나 크기 등 어떤 것도 절제하지 않고 마음껏 그린다. 형식이나, 규정, 점수의 눈치를 보지 않으며 자유로운 영혼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대부분 점점 자라면서 자유롭게 그리던 마음은 어느 새 위축되어 버린다.
다행히 점선의 아버지는 점선의 그림을 항상 칭찬하셨고 마음껏 그림 그리는 즐거움과 자유로움을 알게 해 주셨다. 점선은 어린 시절의 그 즐거움을 잊지 않았고, 주변에 위축되지 않았다. 조용하지만 냉정하고 뜨거운 사람이었던 어머니는 강한 성격의 그녀를 자신과 주변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으로 길렀다. 총명했던 그녀는 청소년기에 가 보지 못한 세상의 다양한 길과 시간상, 거리상 만나 볼 수 없는 수많은 천재들을 책을 통해 만나고 탐색하게 된다.
예술가로서의 김점선도 훌륭하지만 독서가로서의 김점선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범죄자와 예술가는 남다른 열정을 지닌 사람이다. 범죄자는 내재된 열정을 잘못된 방향으로 분출해 사회에 해를 입히지만 예술가는 잠재된 열정을 타인에게 해를 주지 않고 발산 하는 사람이다'라고 한 그녀의 말처럼 그녀는 자유롭고 열정적인 영혼으로 살았다.
그녀가 선택한 남자, 결혼 그리고 아이와의 생활은 또 다른 처절한 진짜 삶이고 진짜 예술이다. 세상에서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을 것 같은 그녀는 세상에서 자기가 낳은 자식을 대할 때 가장 어려웠다고 고백한다. 그 아이를 정상적인 인격을 가진 한 사람으로 키울 수 있을지, 그 아이의 인격에 자신이 어떤 영향을 주게 될지 아이에 대한 그녀의 진지함을 보며 마음이 뭉클해졌다.
갑자기 나 어릴 때 우리 엄마가 생각이 난다. 우린 4남매인데, 유독 엄마는 큰 오빠를 어려워했다. 당신이 낳은 자식이지만 당신이 함부로 대하지 못할 존귀한 사람을 대하듯, 엄마는 지금도 큰 오빠를 어려워하신다.

가난도, 명예도, 세상도 두렵지 않았지만 작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존귀히 여기고 두려워했던 그녀, 그녀는 지금 이 세상과 이별 했지만 그 아름다운 마음으로 빚어낸 그림과 글로 이 세상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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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적은 말한다 - 글씨로 본 항일과 친일
구본진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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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가 곧 사람이다.
글씨는 뇌의 흔적이다.
글씨쓰기에 영 자신이 없는 나는 무시무시한 이 말에 많이 주눅이 든다.
주위의 다른 사람들의 글씨를 보면 멋지고 그럭저럭 괜찮게 보이는데 왜 내가 쓴 글씨는 하나 같이 마음에 들지 않을까? 지나치게 휘갈겨 지고 단정하지 못하고, 반듯하지 않다. 휘갈겨 쓴 글씨라도 일정한 규칙이 있어 미관상 멋진 모양을 이루는 글씨가 있는 반면 내 글씨는 어떤 일정한 규칙도 없이 밋밋하다가 어떤 것은 심하게 모양이 일그러져 혼자 보면서도 참 민망하다. 어떨 때는 내가 쓴 글씨를 내가 못 알아볼 때도 있어 쓰면서도 후일을 걱정할 때도 있으니 아무리 자필이 서명할 때 외엔 별 필요 없는 세상이긴 해도 이건 좀 심각하다.

이 책은 20년 경력의 강력범죄 현직 전문 검사의 10여년의 글씨 수집과 노하우가 녹아있는 필적에 관한 책이다. 그는 ‘누구나 살면서 가슴에 꽂히는 일이 있다면, 나에겐 그것이 글씨였다.’ 고 한다. 살인, 마약, 강도 등 강력 범죄 사건과 범죄자와 관련된 그의 직업 특성 상 품게 된, 사람의 성격과 본성에 대한 의문은 글씨를 탐색하는 일로 나타났다. 여러 범죄자를 만나면서 그들의 글씨에서 그들의 성정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놀랐고, 글씨를 보면서 그 사람이 세상에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인지, 자신과 사회에 정직한 사람인지 어느 정도 파악이 되는 것을 경험하면서 글씨 수집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수집은 그냥 어느 특정 물건을 모으는 것, 또는 모아 놓으면 일정 시간이 흐른 다음 꽤 값비싼 것이 된다는 정도로 생각하던 내게 작가의 수집에 대한 철학은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수집도 그 매력을 아는 사람이 할 수 있겠구나 싶다. 그는 수집은 단순히 물건을 모으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가 모르는 가치를 밝히는 일종의 ‘창작 행위’, 즉 수집품에 생명을 불어 넣는 행위라고 한다. 작품을 평가할 식견, 예술을 보는 눈, 작품에 대한 감식안이 있지 않고는 수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렸을 때부터 수집을 좋아했던 그는 이미 고 미술 작품과 글씨에 대한 상당한 관심과 식견, 경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글씨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후로 그는 지난 10여 년간 구한말 항일 운동가와 친일파들의 글씨 천여 점을 수집하였다. 일반적으로 보통 김구선생님이나, 안중근 의사, 위대한 항일 운동가들의 글씨에 비해 친일파의 글씨는 별 가치가 없게 취급되며, 값도 별로 나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필적을 비교해서 분석하는 그의 컬렉션으로 볼 때는 둘 다 상당히 중요한 작품들이다.
글씨로 사람의 인품을 도식화하는 것이 여러 가지 요인이 연관 되어 있어 쉽지는 않지만 항일운동가와 친일파의 글씨는 뚜렷한 차이점이 몇 가지 있다고 한다. 항일운동가의 전형적인 글씨는 작고, 정사각형 형태로 반듯하며, 유연하지 못하고, 각지고 힘찬 것이 많고, 규칙성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친일파의 글씨는 크고, 좁고, 길며, 유연하고, 아래로 길게 뻗치는 경우가 많고 불안정하다고 한다.
항일운동가의 글씨는 바름의 글씨이며, 친일파의 글씨는 기이함의 글씨라고 요약한다. 항일운동가로 자결한 분들의 글씨는 더 반듯하고 더 규칙적이며 상당히 정돈되어 있고 속도가 항일운동가 보다 더 빠르다.
글씨에 나타나는 이런 전체적인 몇 가지 특징으로 보아 현실에 더 쉽게 순응하고 대처하며 살았느냐, 자신의 신념과 옳고 그름의 가치를 지키는 삶을 살고자 노력했느냐, 또 절대로 자신의 소신을 굽힐 의사가 전혀 없으며 현실이 변할 기미도 보이지 않자 그 울분을 세상에 항거하는 방법으로 자결을 택하지 않았을까란 추측도 해본다.
한 일 년 전부터 우연히 기회가 되어 한글 서예를 배우고 있다. 펜글씨와 붓글씨는 또 다르다는 말에 힘입어 나름대로 많은 시간을 들여 노력을 해 보니, 마음을 담아 정성을 기울인 만큼 글씨도 나름의 맛과 형태를 갖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문 서예는 한문도 잘 모를뿐더러 볼 줄 도 모르지만 작가가 이야기하는 글씨의 특징을 따라 찬찬히 살펴보니 글씨가 그냥 글씨로 보이지 않는다. 종이와 먹, 붓만으로 그 자체로 작품이 되는 서예 작품도 아름답지만 그 글을 쓴 사람의 삶과 그 글씨의 역사와 의미를 생각하니 더 귀하다.
글씨에 담긴 중요한 의미와 수집의 철학을 배울 수 있는 멋진 책을 썼을 뿐 아니라, 자신의 본업만큼 중요한 일을 지금도 병행하고 있는 작가의 활동에 진심어린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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