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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적은 말한다 - 글씨로 본 항일과 친일
구본진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글씨가 곧 사람이다.
글씨는 뇌의 흔적이다.
글씨쓰기에 영 자신이 없는 나는 무시무시한 이 말에 많이 주눅이 든다.
주위의 다른 사람들의 글씨를 보면 멋지고 그럭저럭 괜찮게 보이는데 왜 내가 쓴 글씨는 하나 같이 마음에 들지 않을까? 지나치게 휘갈겨 지고 단정하지 못하고, 반듯하지 않다. 휘갈겨 쓴 글씨라도 일정한 규칙이 있어 미관상 멋진 모양을 이루는 글씨가 있는 반면 내 글씨는 어떤 일정한 규칙도 없이 밋밋하다가 어떤 것은 심하게 모양이 일그러져 혼자 보면서도 참 민망하다. 어떨 때는 내가 쓴 글씨를 내가 못 알아볼 때도 있어 쓰면서도 후일을 걱정할 때도 있으니 아무리 자필이 서명할 때 외엔 별 필요 없는 세상이긴 해도 이건 좀 심각하다.
이 책은 20년 경력의 강력범죄 현직 전문 검사의 10여년의 글씨 수집과 노하우가 녹아있는 필적에 관한 책이다. 그는 ‘누구나 살면서 가슴에 꽂히는 일이 있다면, 나에겐 그것이 글씨였다.’ 고 한다. 살인, 마약, 강도 등 강력 범죄 사건과 범죄자와 관련된 그의 직업 특성 상 품게 된, 사람의 성격과 본성에 대한 의문은 글씨를 탐색하는 일로 나타났다. 여러 범죄자를 만나면서 그들의 글씨에서 그들의 성정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놀랐고, 글씨를 보면서 그 사람이 세상에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인지, 자신과 사회에 정직한 사람인지 어느 정도 파악이 되는 것을 경험하면서 글씨 수집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수집은 그냥 어느 특정 물건을 모으는 것, 또는 모아 놓으면 일정 시간이 흐른 다음 꽤 값비싼 것이 된다는 정도로 생각하던 내게 작가의 수집에 대한 철학은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수집도 그 매력을 아는 사람이 할 수 있겠구나 싶다. 그는 수집은 단순히 물건을 모으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가 모르는 가치를 밝히는 일종의 ‘창작 행위’, 즉 수집품에 생명을 불어 넣는 행위라고 한다. 작품을 평가할 식견, 예술을 보는 눈, 작품에 대한 감식안이 있지 않고는 수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렸을 때부터 수집을 좋아했던 그는 이미 고 미술 작품과 글씨에 대한 상당한 관심과 식견, 경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글씨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후로 그는 지난 10여 년간 구한말 항일 운동가와 친일파들의 글씨 천여 점을 수집하였다. 일반적으로 보통 김구선생님이나, 안중근 의사, 위대한 항일 운동가들의 글씨에 비해 친일파의 글씨는 별 가치가 없게 취급되며, 값도 별로 나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필적을 비교해서 분석하는 그의 컬렉션으로 볼 때는 둘 다 상당히 중요한 작품들이다.
글씨로 사람의 인품을 도식화하는 것이 여러 가지 요인이 연관 되어 있어 쉽지는 않지만 항일운동가와 친일파의 글씨는 뚜렷한 차이점이 몇 가지 있다고 한다. 항일운동가의 전형적인 글씨는 작고, 정사각형 형태로 반듯하며, 유연하지 못하고, 각지고 힘찬 것이 많고, 규칙성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친일파의 글씨는 크고, 좁고, 길며, 유연하고, 아래로 길게 뻗치는 경우가 많고 불안정하다고 한다.
항일운동가의 글씨는 바름의 글씨이며, 친일파의 글씨는 기이함의 글씨라고 요약한다. 항일운동가로 자결한 분들의 글씨는 더 반듯하고 더 규칙적이며 상당히 정돈되어 있고 속도가 항일운동가 보다 더 빠르다.
글씨에 나타나는 이런 전체적인 몇 가지 특징으로 보아 현실에 더 쉽게 순응하고 대처하며 살았느냐, 자신의 신념과 옳고 그름의 가치를 지키는 삶을 살고자 노력했느냐, 또 절대로 자신의 소신을 굽힐 의사가 전혀 없으며 현실이 변할 기미도 보이지 않자 그 울분을 세상에 항거하는 방법으로 자결을 택하지 않았을까란 추측도 해본다.
한 일 년 전부터 우연히 기회가 되어 한글 서예를 배우고 있다. 펜글씨와 붓글씨는 또 다르다는 말에 힘입어 나름대로 많은 시간을 들여 노력을 해 보니, 마음을 담아 정성을 기울인 만큼 글씨도 나름의 맛과 형태를 갖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문 서예는 한문도 잘 모를뿐더러 볼 줄 도 모르지만 작가가 이야기하는 글씨의 특징을 따라 찬찬히 살펴보니 글씨가 그냥 글씨로 보이지 않는다. 종이와 먹, 붓만으로 그 자체로 작품이 되는 서예 작품도 아름답지만 그 글을 쓴 사람의 삶과 그 글씨의 역사와 의미를 생각하니 더 귀하다.
글씨에 담긴 중요한 의미와 수집의 철학을 배울 수 있는 멋진 책을 썼을 뿐 아니라, 자신의 본업만큼 중요한 일을 지금도 병행하고 있는 작가의 활동에 진심어린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