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1. 11. 금

1. 백범 김구 선생 암살 사건

우리나라의 독립 운동을 이끌었던 김구 선생님을 암살한 안두희에 대한 이야기이다. 1949년 6월 26일, 그는 김구에게 4발의 총을 쐈다. 그 이후로 안두희는 47년간 집요하게 추적을 당했다. 그는 암살 후에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지만 본인이 밝힌 수감생활에 따르면 특별대우를 받았고, 슬쩍 감형을 받고 1950년 6.25 전쟁 때는 소위 계급장을 달고 군인으로 복귀까지 했다. 실제 복역 기간은 1년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며 이승만 정권이 무너졌고 이로 인해 갖가기 의혹사건의 진상규명요구가 봇물처럼 터지기 시작했다. 백범 암살 진상규명 위원회도 조직됐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백범 암살과 관련이 있다고 의심 받는 이들이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이미 죽었거나 해외로 망명해 법으로 심판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안두희를 찾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적했다. 몇년간의 추적 끝에 1992년 9월 23일 안두희를 찾는데에 성공했다. 그는 백범 선생 암살사건 배후에 이승만 대통령과 미국이 있다는 발언을 했지만 정작 기자회견과 재판에서는 그 발언을 번복하거나 부정, 제대로 된 증언을 하지 않아 진실을 밝힐 수는 없었다. 결국 안두희는 2년 뒤인 1996년에 버스 기사 박 씨가 휘두른 몽둥이 ‘정의봉‘에 맞아 7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이 챕터는 김구 선생님의 암살 사건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크게 보면 우리나라의 진실 은폐와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대우를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다. 김구 선생님이 머물던 경교장은 원래는 친일 기업인의 별장이었는데 해방이 되자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 요원들에게 이 별장을 무상으로 빌려줬다. 그가 친일행적에 대해 반성하는가 싶었지만 김구 선생이 돌아가시자마자 안면몰수하고 당장 방을 빼라며 독촉하고 그동안 사용한 임대료까지 청구했다. 이 경교장은 철거될 뻔한 위기에 처했지만 2001년에 겨우 유형문화재로 지정돼 내부만 복원됐다. 그러나 병원 한쪽에 세든 듯 옹색하게 끼어 있어서 찾기가 쉽지 않을 정도이다.
게다가 우리는 종종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어려운 상황을 들어보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씁쓸한 건 사실이다. 오히려 친일파들은 본인들의 재산소유권을 주장하며 싸우고 있는데 정작 우리나라를 위해
힘썼던 많은 분들은 평범한 사람만도 못한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 이상하고 안타깝다.
김구 선생님은 또한 해방 이후 남한만의 정부 수립을 가장 반대하여 어쩌면 암살 사건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의심까지 받았다. 이것이 사실이라고 얘기하기는 어렵지만 지금 상황을 미루어 보았을 때
그때의 김구 선생님의 생각은 틀린 것 같지 않다. 한민족이 되어 나라가 반으로 갈라져 서로 적대적인 현실을 본다면 김구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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