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낙하하다]

여기 나오는 '낙하'라는 공간 개념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시간에 떠밀려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조건을 나타낸다고도 볼 수 있겠다. 이 단편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인간은 누구나 각자 낙하하고 있는 게 아닐까.


아무래도 나는 사라지고 있는 듯했다.
사라진다기보다는 너무 광범위하게 번지고 퍼져서, 끝내는 돌이킬 수 없이 묽고 무심한 상태의, 일부가 되는 듯했다. 나는 아직 나의 일부인 나를 추슬러 간신히 서랍에서 흘러나왔다.
(54)
대니 드비토

애초 빗방울이란 허공을 떨어져내리고 있을 뿐이니 사람들이 빗소리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빗소리라기보다는 빗방울에 얻어맞은 물질의 소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66)
낙하하다

멀리서 발사한 총성처럼 독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금방 다음 것이 들려왔다.
별빛보다도 눈부신 불빛들이 삐걱거리며 주저앉고 있었다.
(102)
옹기전

그는 이미 많은 얼굴을 잃어버린 뒤 그 집에 당도했다. 많은 얼굴을 제대로 떠올릴 수 없었고 그 자신의 얼굴 역시 그런 얼굴들 속에 있었다.
(183)
뼈 도둑

파씨는 학교에서 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연통에 매혹됩니다. 그건 번쩍거리는 은빛이고, 산뜻하게 주름져 있고, 청결해 보이는 김을 무럭무럭 내뿜고 있습니다. 내부가 얼마나 따뜻해야 연통이 김을 뿜을 수 있는 것일까, 파씨는 연통으로 빨려들어가서 연통의 바닥까지 내려가서 눌어붙어서 연통의 따뜻함의 일부가 되고 싶지만 그런 일은 아무래도 일어나지 않고 손과 발은 여전히 차갑습니다.
(214)
파씨의 입문

파씨의 입문
황정은
창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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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에 노르웨이어를 공부하려고 그랬다기보다는 만약에 공부한다면, 이라는 가정을 해놓고, 공부할 때 초급 수준에서 읽기 좋은 책이 무엇인지 검색하다가 이 작품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런데 문장이 간결하고 쉬워서 공부 삼아 읽기 좋을 뿐 아니라 작품도 너무 좋다고들 했다. 꽤 유명세를 떨친 작품이었다. 얼마나 인기가 좋았으면 미국에선 노르웨이어 단어 뜻을 주석으로 달아놓은 공부용 원서를 출간하기 위해 출판사를 세운 사람도 있다.

http://nelsbok.com/publications/naiv-super/ (미리보기 가능)


그래서 기대가 지나쳤나 보다. 나는 기본적으로 북유럽 문화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재미난 요소들을 찾아 즐겁게 읽었다. 그런데 읽으면서 공감하지 못하는 독자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은 스물다섯 살인데 대학생인 것 같다. 자퇴서를 제출하는 장면도 나오는데 대학생인지 대학원생인지 분명하지 않다('친구' 한 명은 대학원생. 하지만 동갑은 아닐 수도 있다.). 부모 형제와 별다른 갈등이 없다. 일하지 않아도 당장 생계를 걱정하지 않는다. 돈을 많이 버는 친형에게 의지할 수 있다.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장난감을 갖고 놀아서 옆집에서 집수리는 잘했냐고 물어보는데 갈등은 없다. 우연히 만난 여자애와 바로 사귄다. 형의 지원으로 뉴욕 여행을 다녀온다. (북유럽 사람들이 즐겨 먹는 물컹한 젤리 과자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농담))


갈등이 없어서 무조건 문제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배경과 구체적 상황을 초월하여 마음을 끄는 보편성이 조금 부족한 것 같다. 그것을 독자에게 제시하는 설득력도.


(책을 읽을 때마다 항상 리뷰를 찾아보는 것은 아니지만 위 사이트가 바로 떠오르지 않아 검색하다가 영어로 된 어느 리뷰에서 이 작품을 '히키코모리 소설'이라고 평한 것을 보았다.)


가지고 다니기 편하게 부피가 크지 않고
가격은 1백 크로네를 넘지 않고
여러 번 사용할 수 있고
실내는 물론 실외에서도 사용할 수 있고
혼자서도, 다른 사람과 함께도 쓸 수 있으며
나를 움직이게 하고
시간을 잊어버리게 해줄 수 있는 어떤 것.
(23)

팩스에 적힌 주소로 보건대, 형은 아프리카가 아니라 아메리카에 있었다. 내가 두 대륙을 혼동했나보다. 하긴 둘 다 A로 시작해 A로 끝나는 대륙이니까. 서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긴 하지만. 어쨌든 실망스럽다.
아메리카보다는 아프리카가 훨씬 이국적인데. 아메리카보다는 아프리카를 여행중인 형이 있다는 게 더 멋져 보이는데. 그건 마치 은행에 돈이 있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다. 언제 얼마나 많은 돈이 갑자기 필요하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있으면 든든한 것.
아메리카에 형이 있다는 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어느 집이든지 세대를 거슬러올라가거나 촌수를 넓게 따지고 들어가면, 아메리카에 친척 한 명 살고 있지 않는 집은 없다.
(107)

샴푸와 치약 광고의 그래픽도 내 눈길을 끈다. 교육적으로도 큰 효과가 있는 광고들이다. 어떻게 영양분이 머리카락이나 치아 속으로 침투해 손상된 부분을 치유하고 미백 작용을 하는지 광고 그래픽을 통해 잘 볼 수 있다. 제품 사용 후, 머리카락과 치아는 이전보다 훨씬 나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요점이다. 더 나아지는 것. 하지만 음식이나 과자가 춤을 추게 만든 애니메이션 광고를 보면 화가 난다. 크래커들이 상자 속에서 제 발로 튀어나와 부엌 싱크대 위에서 춤을 추다가 냉장고 속에 있는 허브 치즈를 불러내질 않나, 허브 치즈가 모습을 드러내면 춤을 추던 크래커들이 치즈 속으로 뛰어들어 몸 전체에 치즈를 바르질 않나. 봐줄 수가 없다.
(126)

공항버스가 도착했을 때, 리세의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그녀의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어? 내가 물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키스해주었다. 그리고 내게 엽서를 보내달라고 했다.
나는 만약 매일 한 장씩 엽서를 보낸다면 부담스럽겠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기왕이면 경치가 좋은 장소에서 썼으면 좋겠다고 했다. 예를 들어, 고층 빌딩 꼭대기 같은 곳에서.
나는 버스 맨 뒷좌석에 앉아 리세에게 손을 흔들었다. 버스가 멀어지면서 리세의 얼굴이 거의 안 보이게 되었을 즈음, 폴라로이드 사진 속에 그녀의 얼굴이 조금씩 조금씩 드러났다. 이제 그녀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인다.
(183)

아버지와는 좀더 긴 대화를 나누었다. 아버지는 내가 조금만 여유 있게 전화를 했더라면 전단지를 만들어줬을 텐데 하고 아쉬워했다. 내가 그 전단지를 들고 뉴욕 거리에서 뿌릴 수 있었으면 좋았을 거라면서. 전단지에는 미국의 모든 행동, 그들의 어리석음과 그들의 정신병자 같은 꿈과 그들의 외교 정책과 문화제국주의 등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히는 선언문이 담겼을 것이라고 했다. A4 용지 한 장 정도면 충분하다고. 아버지는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아버지 자신을 포함한, 의식 있는 많은 유럽인들이 미국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했다.
그들에게 뭔가 생각할 거리를 주고 싶다는 것이다. 일종의 교훈 같은 것 말이다.
나는 이제 십오 분 정도 후면 비행기가 뜰 것이라고 아버지께 말했다. 선언서는 다음 기회에 만들어도 충분할 것이라고.
(184-185)

누군가가 캘리포니아의 산 안드레아스 단층에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을 지어 올리기로 한 프로젝트이다. 일종의 조각품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길이 8미터에 폭 6미터, 그리고 높이 7미터로 지어 올릴 거라고 한다. 재질은 건축자재 중에서도 가장 튼튼하다고 알려져 있는 콘크리트가 될 거라고 한다. 총 무게는 6만 5천 톤이 될 거고, 조각품 밑에 건조될 받침대는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고, 콘크리트 구조물은 둘로 나누어 연간 6~9센티미터 정도의 속도로 분리되어 움직여나갈 거라고 한다. 그렇다면, 4천3백만 년 후에는 구조물의 왼쪽 부분은 오늘날의 알래스카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206)

어렸을 때는 온종일 나무를 탔다. 종종 나무 위에 낮아 조용히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몇 시간 동안이나. 여름이 되어 나뭇잎이 무성할 때면, 아래에서는 아무도 나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럴 때면 내가 그들과 아주 멀리 떨어진 외진 곳에 있는 것 같았다.
(293)

나이브? 수퍼! Naiv.Super.
Erlend Loe / 손화수
문학동네
1996(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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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건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생각하니까 견딜 만해서 말이야. 그게 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지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가끔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시간이 좀 지나고 보니 그게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맞는 것 같고 말이지. 그림자라는 건 일어서기도 하고 드러눕기도 하고, 그렇잖아? 물론 조금 아슬아슬하기는 하지. 아무것도 아니지만 어느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게 되어 버리면 그때는 끝장이랄까, 끝 간 데 없이 끌려가고 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46)

차라리, 라고 생각했다. 어두운 것이 되면 이미 어두우니까, 어두운 것을 어둡다고 생각하거나, 무섭다고 생각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 아예 그렇지 않을까, 어둡고 무심한 것이 되면 어떨까, 그렇게 되고 나면 그것은 뭘까,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
(90)

오무사 할아버지 이야기
(94-95)

백의 그림자
황정은
민음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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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시간을 보내도 시간은 얼마든지 되돌아와서 견디기 어려울 때도 있었지만 그런 시간도 결국은 흘러갔다.
(13)

망상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는데, 몸이 그걸 믿었어.
(69)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오른쪽 눈의 세계가 멀어져버렸어. 나는 거리감각을 잃어버렸어. 이쪽과 저쪽을 동시에 볼 수 없다는 건 그런 균형을 제대로 맞출 수가 없게 되었다는 의미야. 자기 내부의 잔혹한 광경들과 거리를 둘 수가 없게 된 거야.
(74)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체셔의 머릿속에는 세 개의 점이 있었다.
첫번째 점. 거품이 솟아올랐다.
두번째 점. 큰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확신이 있었다.
세번째 점.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하지 않았다.
체셔는 이렇게 세 개의 점을 찍어놓고 점과 점 사이를 잇는 작업을 되풀이했다. 그것은 거대한 삼각형이 되었다. 체셔는 언제까지나 중심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점점 두꺼워지는 삼각형의 변에 자꾸 두께를 보탰다.
(133)
모기씨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황정은
문학동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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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TURNER

MARCH 17, 2016

The Irish Novel That’s So Good People Were Scared to Translate It

BY WILLIAM BRENNAN

http://www.newyorker.com/books/page-turner/the-irish-novel-thats-so-good-people-were-scared-to-translate-it


잘 모르는 얘기라서 기사 내용을 옮겨적을 뿐이지만 번역에 얽힌 뒷이야기가 재미있다.


{Cré na Cille}(1949)('교회 묘지의 흙')은 아일랜드 작가 마틴 오카인(Máirtín Ó Cadhain)의 데뷔작이자 아일랜드 문학의 대표 작품으로 꼽힌다고 한다. 출간되자마자 많은 사랑을 받았고 작품의 문학적 가치를 알아본 출판사에서는 처음부터 영역본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대다수 아일랜드 국민은 주로 영어를 쓰고 아일랜드어(Irish Gaelic)를 모른다고 한다.). 한번은 출판사에서 번역 샘플을 공모해 당선된 젊은 여성에게 계약서를 보냈는데, 수녀원에 들어갔기에 번역할 수 없다는 답장이 왔다. 다음에는 유명한 시인에게 맡기려 했지만 너무 어려운 작업이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며 거절당했다. 마침내 저자의 지인이 완성한 원고가 도착했는데, 영어가 더블린 사투리로 되어 있어 출간이 취소되었다(작품 배경은 아일랜드 서부 연안의 시골이라 더블린 사투리로 옮길 이유가 없다.). 이후 30년간 작품의 저작권을 소유한 출판사 대표는 아주 완벽한 번역이 아니면 출간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 문제는 2009년 저작권이 새로운 출판사로 넘어가고 나서야 해결되었다.


조금 알아듣고 가끔 사용하는 사람까지 끌어모아도 약 1백만 명밖에 되지 않는 언어로만 66년 동안 존재했던 소설의 두 가지 영어 번역본이 예일 대학 출판부에서 작년과 올해 출간되었다. (두 개의 번역본이 비슷한 시기에 나온 것도 신기하고,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것도 신기하다.)


  


{The Dirty Dust}(2015)는 소설가이자 아일랜드 문학 연구자인 Alan Titley가 번역했다. 마치 원래 영어로 쓰인 소설처럼 자연스럽게 읽히는 번역본이다. 그런 만큼 역자의 독특한 문체와 목소리가 섞여들어갔다. 일반 독자가 쉽게 접근할 수 있다.

{Graveyard Clay}(2016)는 아일랜드어 사용자와 영어 사용자가 공동으로 번역했고, 원작의 언어에 더 충실했다. 아일랜드어의 문법적 특징이 강하게 드러나는 구문들을 간혹 사용하여 어색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주석도 달고 참고문헌도 수록했다. 학교 수업과 학계 인용의 목적으로 적합하다.


쓰인 연도로 보나 아일랜드와 영국의 악연으로 보나 '아일랜드 대표 소설'은 민족주의적 색채를 띨 것 같지만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소설은 묘지의 시체들이 하는 대화로 이루어졌다. 화자는 가난한 아일랜드 농민들이지만 보편적인 '사람 사는 이야기'로 승화된다.


번역의 질을 끌어올릴 수 없다면 아예 번역하지 않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번역이 조금 시원찮더라도 널리 읽히기를 바라며 펴내는 것이 나을까? 이 기사의 필자는 하나의 '완벽한' 번역본보다 다양한 역자의 해석을 거친 두 가지 이상의 번역본이 독자에게 더 유용하다고 말한다.


아래 기사에 따르면 영어 번역본이 나오기 전에 노르웨이어와 덴마크어 번역본이 먼저 나왔다고 한다.

http://www.irishtimes.com/news/it-s-time-for-cre-na-cille-in-english-1.299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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