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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ting for the Barbarians (Paperback, Deckle Edge)
Coetzee, J. M. / Penguin Group USA / 1999년 10월
평점 :
품절
물리적 폭력을 직접 겪어보지 못한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폭력만큼 흑백이 선명하게 구분되는 것은 없지 않을까? 적어도 폭력에도 모호한 면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저절로 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이 작품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주인공은 원주민들을 동정하고 돕고 싶지만, 식민 지배의 틀에 종속된 말단 관리일 뿐이다. 그는 파견된 상관이 원주민에게 가하는 무자비한 고문을 막지 못한다. 반대 의견을 용감하게 피력하고 나서 옥에 갇혔다가 쫓겨난다. 결국 그의 동정은 원주민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그들의 편에 온전히 선 것일까? 죽을 때까지 그는 백인이다. 결코 그들의 일원이 될 수 없고, 그 자신도 그럴 생각이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며 주인공은 자신 또한 궁극적으로는 식민 지배라는 폭력의 일부였다는 생각에 이른다.
이 작품은 인간의 식욕, 성욕, 수면욕을 전면에 내세운다. 식욕이 극심해진 상태에서는 정의를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전반부에서 주인공이 원주민 여인과 나누는 애정/우정(?)에서는 성욕을 수면욕의 형태로 변형시킨다. 여러 해석이 가능할텐데, 이런 수면욕은 정상적이지 못한 성욕일 수도 있고, 억압된 성욕의 대체물일 수도 있고, 성욕과 관계없는 다른 것일 수도 있음을 표현하는 듯하다. 오십을 넘긴 주인공은 상관의 고문 때문에 아버지를 잃고 눈이 거의 멀었으며 두 발을 심하게 다친 이십대의 여인에게 다가갔다. 그래서 원주민 여인에 대한 그의 감정은 굉장히 복합적이고 그 자신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3/4쯤 읽었을 때 나는 이 작품이 주인공의 죽음으로 향해가는 이야기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평화롭고 별 문제 없는 변방의 마을을 다스리는 관리로 잘 지내다가 퇴직하기 몇 년 전에 외부적 요인에 의해 점점 추락한다. 그래서 그 바닥은 처참한 죽음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작품이 끝날 때까지 주인공은 죽지 않는다. 그럼으로서 오히려 삶의 덧없음이 더 잘 표현되었다. 삶의 덧없음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아니지만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면 느낄 수밖에 없다. 어쩌면 주인공의 인생은 죽음보다 더 아래로 추락했고,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죽지 못했을 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작품의 줄거리상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야만인'의 정체가 끝까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동안 야만인은 원주민을 제압하기 위해 식민 지배자들이 만들어낸 구실이라고 주인공은 생각한다. 어디서도 증거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작품의 끄트머리에 야만인에게 습격당했다는 병사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들을 습격한 야만인이 진짜 야만인인지 궁지에 몰려 고양이를 무는 쥐처럼 힘을 모은 원주민인지는 알 수 없다. 사람들이 말하는 야만인의 정의가 무엇인지부터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도 엄청난 사건들이 야만인을 핑계로 일어났다. 마치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처럼, 보이지 않는 존재가 온 세상을 쥐고 흔든다. 이는 식민지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지금 현재 우리에게도 일어나고 있다. 가시적인 적(敵)이 비교적 많이 사라진 오늘날에는 보이지 않는 적이 더 무섭다. 그리고 그 점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일본의 한국 지배 역사 때문에 우리는 식민 지배와 피지배의 양상을 잘 안다. 이 작품의 설정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고, 이전에 그런 설정의 작품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자칫하면 진부해질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사회성이 강한 작품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익숙한 이야기 안에서 인간에 대한 진부하지 않은 성찰을 보여주고, 억압의 주체와 객체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철학적 문제를 파고든다. 무엇보다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많이 던지고, 여러 방향의 사유 가능성을 열어놓는다는 점이 매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