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트 특급살인 애거서 크리스티 추리문학 베스트 2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유명우 옮김 / 해문출판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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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읽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이후로 뵙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은 <오리엔트 특급살인>이다. 요즘 열차나 기차와 관련된 미스터리가 보고 싶어서 다른 작품은 제쳐두고 이것부터 보게 되었는데, 역시 미스터리하면 열차, 열차하면 미스터리다. <오리엔트 특급살인>은 에르큘 포와르라는 벨기에 인 명탐정이 등장하는 작품으로 증인들의 대화나 몸짓을 날카롭게 분석해 의심하고 추리하며 사건의 전말을 밝혀낸다. 본 작품은 오리엔트 특급 열차 안에서 래체트라는 좋지 않은 인상의 미국인이 살해 당하고 이를 둘러싼 12명(실제로는 훨씬 더 많다.)의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범인을 밝혀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피살자와의 연관성은 발견하기 힘들고, 모두들 서로가 서로를 입증하는 완벽한 알리바이를 가지고 있어 마치 범인은 외부 사람 같다. 읽으면서 범인을 추측해보려 했으나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고 결말 부분에 이르러서 범인과 사건의 진상을 알아차리고는 놀랐다. 그 사건의 진상에는 가슴 아픈 과거가 얽혀 있었던 것이다. 

 다른 것 없이 정말 사건에만 집중한 채 이야기가 흘러가 요즘의 소설과는 다르다. 아쉬운 점은 그렇게 사건에만 집중하다보니, 그 시대 특유의 배경 묘사가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여럿 익숙치 않은 단어에 각주가 달려 있지 않아 그런 부분도 아쉬웠다. 하지만 열차가 눈에 의해 운행이 멈춘 상태니, 이때부턴 사건에 집중 할 수 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배경 묘사나 많은 역사적 지식같은 것을 이용하지 않고서도 이렇게나 훌륭한 열차 미스터리가 나올 수 있다는 점이 무척이나 엄청나다. 다문화 사회인 미국에 대한 포와로의 생각과 관찰력 그리고 이 시즌에는 비어 있는 열차 차량이 꽉 차 있었다는 점은 사건에 있어서 중요한 힌트였다. 범행 현장에 남겨진 증거물들 역시 누구의 것인지, 어째서 거기에 떨어져 있는 것인지도 힌트가 된다. 무엇보다 각기 등장인물들이 하는 말들 하나하나가 단서 그 자체다. 이렇게 앞서 제시한 복선들이 끝에 가서 서로 맞물릴 때의 그 희열이란! 정말 짜임새있다. 이게 바로 미스터리고 추리며 본격이다라고 말하는 느낌이었다. 사건의 결말에 대해서 포와로는 두 가지 해결책을 제시했는데, 나 역시 전자를 택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에르큘 포와로라는 탐정은 처음에 그다지 호감은 아니었다. 하지만 영국 드라마로 머릿속에 그려보니 굉장히 재미있다. 열차 안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 탐정, 증인들이 한 명 한 명 식당차에서 알리바이를 증명한다. 기차를 돌아다니며 가방을 수색하고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연극으로 만들어져도 굉장히 재밌을 것 같아졌다. 하지만 머릿속에 그려진 영상은 다분 내 취향이 반영된 이미지이로 실제 포와로보다 많은 각색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지금도 포와로에 대해서는 별다른 호감은 없는데 그 이유는 이 탐정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다. 한마디로 탐정의 사적인 면을 알 수가 없으니 그냥 사건을 제대로 해결하는 명탐정이구나라는 감상밖에 나오질 않는다. 그건 내가 아마도 포와로가 등장하는 이야기를 처음부터 보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작중 인물들에 대해서 감정 이입하기 이전에 사건 진행에만 급급하다는 느낌이다. 즉 인물들 각각에 대한 사연이 거의 없다. 그저 사건 해결에 필요한 정도만이 제시된다. 이건 이것나름대로 사건의 진행에 있어서 좋다. 그래서 재밌게 읽었지만 읽고 나니 인물들 각각에 대한 인상이 흐릿하다. 심지어 탐정마저도. 그리하여 나는 이러한 느낌을 지우기 위해 포와로가 등장하는 다른 작품을 더 보고 싶어졌다. 첫작인 <스타일즈 저택의 죽음>,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푸른 열차의 죽음>, <엔드하우스의 비극>, <13인의 만찬> 그리고 포와로가 등장하는 마지막 작품인 <커튼>까지. 더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알고 있는 것은 이 정도다. 다른 작품에서는 포와로가 어떻게 그려지고 또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지 기대가 된다. 끝으로 옛날 문체에도 이렇게나 잘 읽히고 또 재밌게 읽었다는 것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스토리텔링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번에 <오리엔트 특급살인>은 해문출판사 책을 읽었는데, 들리는 말로는 황금가지의 번역은 좀 더 부드럽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읽어보지 않았으므로 현재는 알 수 없다. 문제는 옛날 문체인데도 이상하게 싫지 않다. 거북함도 없다. 이 시대는 이런 문체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다. 어딘가 이런 문체는 극스럽고 드라마틱해서 특유의 '풍'이 잘 살아나 감칠난다고 할까. 영상물은 이걸 어떻게 살려냈을지도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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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촌 기행
정진영 지음 / 문학수첩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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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영의 <도화촌 기행>은 책 표지에서 알 수 있듯이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한 남자가 술을 먹고 고양이를 따라 갔다가 '도화촌'이라는 마을에 이르러 거기서 인생을 배우고 나아가는 이야기이다. 불혹에 가까운 나이 39세. 사법고시를 준비한지 오래되었지만 계속 낙방에 헤걸이 연속이다. 나이는 먹어가지, 사법고시는 날이 갈수록 어려워져가지, 자신이 통과하지 못할 거라는 것을 매년 실감하며 살아가던 주인공 이범수였다. 그런 현실에 실망하고 좌절한 이범수는 술을 잔뜩 먹고 돌아가던 어느 날 밤, 길에서 고양이를 만나고 따라갔다가 '도화촌'이라는 곳에 들어가게 된다. 폭언에 폭력을 일삼는 몇살인지 어디서 왔는지 정체 모를 영감과 친절하고 다정한 '도화촌' 사람들의 숨겨진 사연들을 통해 이범수는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삶을 돌아보고 반성하며 사법고시를 계속 할 것인지, 이 도화촌에서 계속 살아갈 것인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공산주의처럼 모든 자재를 함께 쓰고 일을 하는 도화촌 사람들 속에서 매일 공부만 하던 이범수는 몸을 움직여 일하는 기쁨을 깨닫게 되기도 하고 사법고시에 대한 마음을 접고 도화촌에 살기로 하자 40억 짜리 복권에 당첨된 사실을 알고 아귀처럼 변하고 또 그 복권과 사랑하는 여인을 저울질하며 자기혐오에 빠지기도 한다. 비참하게 돌아가신 어머니와 태어나자마자 돈이 없어 죽어버린 형과 소식도 없는 철부지 동생, 어머니가 죽고 나서야 깨달았지만 간암으로 죽은 아버지 그리고 돈 때문에 뒤돌아선 여자친구 등 그는 과거의 비참함을 도화촌의 주민인 상덕에게 털어놓으며 신과 인간 그리고 과거, 현실,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상덕은 윤회설을 재기하며 우리의 영혼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기 때문에 현재의 삶이 힘든 것은 과거의 업 때문이며 이는 운명이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업과 운명에 져서 현재를 무의미하게 보낸다면 미래 역시 업의 반복일 뿐이라며,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윤회설을 믿는 것도 아니고 신의 존재를 믿지도 않지만 세계를 관장하는 거대한 존재가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라 내게 있어선 자연 그 자체가 신이고 절대자이기에 그저 당연하다. 왜 살아가야 하고, 또 열심히 살아야하느냐는 것에 대한 답으로 불교적 색채가 짙은 윤회설도 가능하겠지만 나로썬 그다지 썩 신선한 대답은 아니다. 그저 무난하고 누구든 그럴 가능성도 있지라며 쉽게 수긍 할 수 있는 그런 답. 솔직히 말하면 뻔하다는 것이다. 또한 윤회설은 이미 많은 작품에서 나온 바 있다. 물론 이 점이 한국판타지스럽다고 생각하게 만들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좀 더 재미있는 답변을 들려줬으면 했는데, 이 부분은 아쉽다.
 40억 복권이 휴지로 돌아간 이후 이범수는 현세와 도화촌을 비교하게 된다. 무릉도원이라 생각했던 도화촌은 40억 복권이 들어온 순간 빠져나갈 수 없는 끔찍한 미로가 되었고 그는 좌절에 빠진다. 하지만 상덕은 도화원기의 이야기를 들며 사람다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 갈 수 있는 곳이 이상향이라고 말한다. 즉 도화촌은 돈보다 사람이 중한, 사람다운 마음을 가진 채로 살아갈 수 있는 곳이라고 말하며 현실은 도덕 교과서처럼 도덕적으로 살아가면 오히려 미련하고 비정상이라는 인식이 당연하게 틀어박힌, 정상적인 것을 비정상이라고 말하는 세상이라고 한다. 그러고보면 정말 현실은 이와 같다. 다들 도덕적인 것을 추구하고 그것이 옳다고는 생각하며 책에서도 그것을 주구장창 떠들어 대지만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면 비난받고 욕 듣는 것은 도덕적인 사람이다. 사람들은 정상적인 것을 이상으로 만들어 놓아 현실 속에서 그 이상이 실현되면 이상하게 보며 비정상이라 한다. 언제부터 도덕적인 것이 정상의 범위에서 벗어나 이상이 되었는가. 어째서 비정상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현실에 수긍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 비정상을 정상으로 받아들이는 그 순간, 그것을 당연하게 되는 그 순간 우리 모두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다.
 도화촌에 머물 것인지, 사법고시를 치며 현실을 살아 갈 것인지 고민하던 이범수는 결국 후자를 택한다. 이는 당연하다. 만약 그가 도화촌에 머물며 끝이 날 경우, 이건 정말 현실도피에 지나지 않게 된다. 하지만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체념을 경험하기 위해 도화촌을 떠난다. 즉 그는 자신이 꿈꾼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 뒤, 그것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리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물론 결과는 성공 할 수도 실패 할 수도 있지만, 만일 실패 한다 하더라도 도화촌에 들어오기 전처럼 열심히 사법고시 공부를 하지도 않고 자기애에 빠져 나날을 보내며 끝내 손에서 놓지 못했던 미련을 이번만큼은 끊어내고 단념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이렇게 도화촌과 현실을 넘나들며 그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또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찾았다. 그에게 있어서 도화촌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숨 막히는 일상에서 벗어나 현실에서 미처 보지 못했던 사실들을 관조적으로 바라보게 만들고 생각해보게 만듬으로써 지나온 삶의 불합리성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으며 제자리 걸음만 하는 현실 속 자신을 일깨워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삶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환상문학의 냄새를 풍기지만 실제로 들여다보면 현실이 따로 없는 <도화촌 기행>은 도화촌이라는 이상적인 마을을 만들어 현실과 비교하며 이범수를 통해 두 세계의 교량 역할은 물론 직접적으로 현실의 불합리함을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생생한 고시촌 생활은 쓰디쓴 현실에 생생함을 불어 넣었으며 이상적인 것은 알지만 세속적인 것에 눈이 먼 현실적인 인간상과 심리를 잘 드러내보였다. 아쉬운 건 무릉도원이라 말하는 도화촌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 할 수 있는 이미지였다는 점이었다. 또한 도화촌 기행인데, 술과 편안함 그리고 현세에 대한 미련 등의 모습만 부각되어 이상향이라 불리는 도화촌의 모습이 제대로 제시되어 있지 않은 듯 하다. 그저 공산주의의 일면인 공동 노동만 보여주며 이에 대한 언급도 별다른 언급도 없었던 것 역시 아쉽다. 물론 도화촌 기행을 통해 현실을 되돌아보며 문제점을 지적한다는 것이겠지만, 단지 도화촌은 '이상향'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장소를 제공해주었을 뿐이며 현실과 도화촌의 제대로 된 비교는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범수 개인의 문제를 통해 사회의 문제와 인간상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나 불혹에 가까운 나이답지 않게 행동하는 주인공의 모습에 위화감이 종종 들었으며 주로 도화촌에 살며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직접적으로 이야기 했다는 점이 아쉬웠다. 소설이고 또 허구적인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만큼, 전체적인 이야기를 통해 은연중에 메세지를 전달했으면 그것도 참 좋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핵심적이면서 다음 내용을 어렴풋이 짐작도 할 수 있게 하는 소제목과 스토리텔링에 지루함없이 재미있고 흡인력 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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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가는 길 그림책은 내 친구 29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글.그림, 이지원 옮김 / 논장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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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의 <학교 가는 길>은 어린 아이의 시선을 통해 학교 가는 길에 보이는 것들을 발자국 모양과 상상력을 결합하여 재치있게 표현한 이야기이다. 내가 어릴 때 보던 풍경과는 사뭇 달라, 이 그림책은 현대판 어린이들을 위한 책이구나 싶었다. 지금 내가 보는 풍경은 그 높이가 다르지만 이와 별반 다르지 않으니까. 

 
 처음 책을 받아 들었을 때 놀란 것은 사진으로 보았을 때와는 다르게 책 표지에 발자국 모양으로 움푹 파여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절로 손이 가서 그 촉감을 느껴보았는데, 마치 정말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가는 듯한, 학교 가는 길을 걸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놀라운 건 표지에 그치지 않았다. 하드커버의 두꺼운 책장을 넘기자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의 상상력에 더 놀란 것이다. 오른쪽 한 면 한 면을 채우고 있는 그림들. 단순한 그림처럼 보일지라도 자세히보면 발자국이 숨어있다. 

  



 

 
 특히 학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연주회장을 지나 오게 되는데, 그것을 위와 같이 표현했다.

 첼로를(아마도 첼로가 아닐까.) 안고 있는 연주자의 모습에서 위화감이 없다. 그저 슬쩍 보고 지나가면 발자국은 어디 있는건지 알 수가 없다. 정말이지 첼로 그 자체다.  

 



 
 
 위에서 아이의 시선에서 학교 가는 길의 풍경을 보았다고 말하였는데 이는 위의 사진에서 잘 드러난다. 어른의 시선에서는 볼 수 없는, 아이의 시선에서만 볼 수 있는, 신문을 물고 가는 강아지. 학교 가는 길에 이웃집 아저씨를 만났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강아지 뒤쪽에 보이는 줄은 아마 아저씨가 붙잡고 있는 것이겠지?

  

 


 
 그 외에도 한눈팔지 말라!고 말한 어머니의 말과 함께 한눈팔고 있는 모습을 재미있게 표현했다. 

 



 

 한눈팔지 마라는 말에 이어서 위험은 어디에나 있다며 표현한 해골 그림. 어린 아이들이 보면 발자국 모양의 얼굴의 해골과 뼈로 이루어진 몸이 무서워 보일지 모르겠지만, 내게 있어선 사뭇 귀엽게 느껴진다. 하지만 확실한건 위험에 대한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는 효과적일 것이라는 것. 

 



 

 낯선 사람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말과 사탕을 건네주는 어떤 부인의 얼굴이 펼쳐진다. 부인의 능글맞은 표정에 웃었다. 
 



 

 그렇게 위험을 조심하라는 엄마의 말씀을 명심하며 횡단보도를 건너 이젠 집으로 향하는 아이의 시선이 잘 드러난다. 정차 해 있는 자동차 앞으로 늘어선 자동차의 그림자가 너무나 길어서 너무 늦은 시간에 집으로 돌아가는 건 아닌가라는 의문이 싹튼다. (농담이다. 이 그림도 자동차의 그림자로만 보면 발자국 무늬가 잘 보이지 않는다. 당연한 듯이 생활 속에 녹아있는 발자국 무늬!)

 

 학교 가는 길과 그리고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 펼쳐지는 이야기들. 한 발짝 한 발짝 걸을 때마다 재미있는 일들이 일어나지만 한눈팔지 마라는 엄마의 말씀을 기억하고 자신을 사랑해주는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온다. 모두들 자신이 집에 돌아온 것을 좋아하지만, 자신이 집으로 돌아와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누굴까? 그건 책의 마지막장을 펼쳐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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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면견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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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츠이치의 <평면견>은 치유계 소설이다. '이시노메'와 표제작인 '평면견', '하지메' 그리고 '블루'로 구성되어 있는 단편집으로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환상적인 이야기들이 당연하게 펼쳐져, 읽는 내내 책 속의 기이한 현실에 이상함이나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이시노메'는 돌의 눈이라는 의미로 (일본어로 돌은 '이시'이며 눈은 '메'다.), 어느 여인의 눈을 보면 그 사람은 돌로 변한다는 전설과 같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내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메두사를 연상시켰으며 해리포터와 비밀에 방에 나오는 뱀을 떠올리게 했다. 이야기는 산으로 들어가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어머니를 찾기 위해 한 남자가 자신의 동료와 산에 들어갔다가 이시노메를 만나게 된다는 것으로 시작하여, 깊은 산 속에서 지내며 벌어지는 기이한 생활을 그리고 있다. 같이 간 동료의 누를 수 없는 호기심에 벌어지는 사건과 맞물려 무릉도원 같은 곳에서의 생활은 평화로웠지만 점점 답답해지고 두려워져갔다. 마지막에 밝혀지는 주인공의 어머니의 진실과 이시노메에 관련된 이야기는 놀라웠다. 

 '평면견'은 제목 그대로 2차원적인 개를 말한다. 즉 종이 등의 어떤 표면에 그려진 개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한 소녀의 왼쪽 팔 윗 부분에 문신으로 새겨진 개를 평면견이라 부른다. 이 평면견은 아름답고 신비한 중국인에 의해 새겨졌는데, 소녀의 몸을 누비며 돌아다니는 것이다. 즉 문신으로 그려진 개가 움직이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피부에서 움직이며 살아가는 평면견의 기이한 행동을 소녀는 별스럽지 않게 받아들이는데, 이는 가족들 모두가 암에 걸려 반년 뒤에 죽는 다는 기이한 일상과 교차되어 이야기가 전개된다. 자신도 책임지지 못하는 그녀는 평면견의 존재가 짐이라 느꼈고 떼어내려 하지만, 이내 그 평면견은 짐이 아니라 그녀에게 혼자가 아니라며 힘을 주는 존재가 된다. 동생이 간간히 언급한 '유우'라는 존재는 마지막에 밝혀지는데, 이 또한 감동이었다.

 '하지메'는 자신도 모르게 닭장에서 병아리를 밟아죽인 코헤이가 자신의 잘못을 친구인 키조노와 함께 하지메라는 자신이 만든 소녀에게 뒤집어 씌우는 것이 발단이 된다. 그 이후 그들은 자신들의 놀이 공간인 하수도를 탐방하는 중에 하지메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 뒤 환청과 환각이 보이게 된다. 하지만 하지메는 그 둘에게만 보였고 그들은 그러한 기묘한 환각을 공유하게 된다. 시간이 흘러도 하지메는 계속 그들의 곁에 남아있었고 코헤이는 노비라는 네다섯살 된 어린아이와 어울리게 된다. 코헤이가 하수도에서 논다는 것을 알게 된 노비는 비가 많이 와 강물이 불어난 하수도에 그날도 놀러가게 되고 마을은 노비가 사라져 뒤집어진다. 코헤이와 키조노는 하수도의 존재를 들키고 싶지 않아 찾아 나서면서 사건을 급박하게 흘러간다. 하지메가 8년이나 사라지지 않고 코헤이와 키조노의 앞에 나타났던 이유는 의외였으며, 버스 사고로 한 아이를 살린 후 사라진 하지메의 이야기는 사람들이 도둑질이나 하는 아이로 아니곱게 보는 하지메의 진실된 면을 보여준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러한 면은 하지메라는 환상을 만들어 낸 코헤이와 키조노의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블루'는 케리라는 인형 작가에 의해 신비한 천으로 만들어진 다섯 인형 중, 얼굴이 파랗고 다리 길이도 다르며 예쁘게 생기지 않은 인형의 이야기이다. 인형이란 아이들에게 사랑받아야 할 존재이것만, 자신의 외형으로 외면당하고 버려지는 블루는 그에 굴하지 않고 사랑받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한 과정 중에 테드에 대한 애정이 싹트고 블루는 테드의 목숨은 물론, 자신을 버린 웬디의 인형들까지 불로부터 구해낸다. 바스라지며 테드의 손에서 흩날리던 블루의 최후에 조금 울적해졌다. 이야기가 끝나고도 이상한 건 테드를 향한 웬디와 부모의 태도다. 웬디가 자신의 물건을 엉망으로 만드는 테드를 미워할 수 있는 건 어린아이로써 당연하겠지만 동생을 계단에서 떨어지게 만들 정도로 위험한 행동을 했음에도 훈계조차 하지 않는 부모는 역시 이상하다. 아무리 인형이 움직여서 테드의 머리가 다치지 않게 감쌌다해도, 웬디의 잘못 된 행동은 짚지도 않고 인형이 살아 움직였다는 그러한 기이한 현상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이상하다. 하지만 인형이 살아 움직여서 기겁하는 어머니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영화 '처키'를 떠올리면 인형이 움직이는 건 그야말로 호러고 공포다. 하지만 그와 달리 오츠이치가 보여준 움직이는 인형은 따뜻하고 희생적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인형도 있지만 결국 버려지는 건 블루가 아니었다.

 4편의 이야기는 현실과 환상의 기묘한 공존 가운데서 주인공들은 그 세계에 많은 의문을 품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임으로써 과거,현재 그리고 미래로부터 위로를 받을 뿐만 아니라 그 세계의 인물들로부터 실직적인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은 물론, 마음의 구원까지 받는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 곳곳에 숨어 있는 미스터리는 이야기를 한층 더 즐겁게 만든다. 전하려는 메세지는 보일 수도 있고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으나 중요한 건 오츠이치가 만든 세계 속의 주인공들이 잘 헤쳐나가는 모습을 보며 그들과 함께 호흡하고 또 무언의 힘을 얻게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읽은 오츠이치 치유계 소설 중 뭔가 아쉬운 부분이 많다. 소재자체는 재미가 있고 이야기들도 하나같이 현실과 환상의 경계선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지만, 앞서 읽었던 장편 치유계 소설에 비해 그 영향력이 다소 흐리다. 뿐만 아니라 다크계 단편과 비교했을 때도, 개인적인 취향이 차이겠지만 나는 다크계 쪽이 더 인상깊었다. 그러나 각각 단편들이 주는 재미는 여전했으며 가독성, 스토리텔링 등에 푹 빠져서 금방 읽었다. 지금 느끼는 뭔가 부족한 이 2%는 아마 나중에서야 알게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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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츠이 야스타카 지음, 장점숙 옮김 / 북스토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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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츠츠이 야스타카라 하면 역시 SF계 작가다. <인구조절구역> 역시 SF소설로, 고령화로 인해 증가하는 노인들의 수를 줄이기 위해 '노인상호처형제도'라는 이름 하에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것을 암묵적으로 정부가 허용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허용한다지만 사실은 압력이자 권력남용이고 말이 '상호처형제도'지 사실은 '실버 배틀'이나 다름 없다. 이야기의 주된 초점은 이 '상호처형제도'를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묵묵히 받아들이며 배틀에 참가하는 노인들이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과정을 한 사람씩 돌아가며 장소에 따라 짧막하게 이야기를 진행해나간다. 이 '노인상호처형제도'라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이 제도에 따라 배틀을 벌이지 않으면 '구' 단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처형당하고, 설사 배틀을 한다 하여도 30일 이내에 1명 이상 살아남을 경우, 모두 처형을 당하게 된다. 즉 최후의 1인만이 한 구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은 혹시라도 이 배틀에서 자신이 살아남아 최후의 1인이 되면 처형당하지 않고 계속 살아갈 수 있다는 생존 본능과 결합 해, 제도에 순응하게 만드는 것이다. 역자 후기에서도 말했지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라는 단편집에 수록된 '황혼의 반란'에서도 심각한 고령화 문제를 놓고 정부가 노인을 안락사 시킨다는 그러한 내용인데, 여기서는 그러한 정부의 불합리한 제도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인구조절구역>은 이와 달리 끝에 가서 정부에 저항하지만 이도 흐지부지할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이 제도를 받아들이며 배틀에 임할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풍자와 블랙유머다. 정말 이 책을 읽으면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블랙유머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불편하고 황당한 소설이지만 그 속에 드러나는 드라마와 재미는 츠츠이 야스타카만이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흡인력 있고 재미있다. 장대한 서사 드라마도 아니고 그렇다고 추리나 미스터리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어째서 이렇게나 책장이 술술 잘 넘어가는지 모르겠다. 70년 먹은 노장의 스토리텔링이란 이러한 것인가. 작가의 출생년도를 보면 1934년이다. 지금은 70대인 츠츠이 야스타카는 <인구조절구역>에 나오는 노인들과 연령대가 같다. 그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70대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고한다. 그래서 이렇게나 인물들이 생생한걸까. 작가는 이 소설을 쓰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자신 역시 고령화 추세에 한몫 거들고 있는 입장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70대의 노인인 츠츠이 야스타카는 노인의 편을 들고 얘기를 할 수도 있었지만, 책에서는 그러한 부분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정도로 황당하고 당연했으며 살인은 게임과 같이 가벼웠다. 대사를 보면 웃으려다가도 멈칫하게 된다. 그저 미래에 농후한 가능성만을 보여준 것일까. 그렇게만 봐도 엄청나다. 도대체 이 제도는 책장을 덮은 지금 생각해도 기이하기 짝이 없다.그래서 그런지 역시 읽는 내내 불편했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이나 미치오 슈스케의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을 읽었을 때와는 또 다른 불편함이 존재했다. 

 원래 본 책의 제목은 <은령의말로(銀齡の果て)>라고 한다. 역자 후기 뿐만 아니라 책 본문 내에서도 '은령'이라는 단어가 나온 적이 있는데, 이는 '눈에 덮여 은빛으로 빛나는 산꼭대기'라는 뜻으로 '하얗게 센 머리털'을 빗대어 표현한 말이라고 한다. 즉 머리가 하얗게 센 사람, 노인의 끝 또는 최후를 의미하는 제목이다. 그야말로 살벌하다. 한국어판 제목인 <인구조절구역>보다 저쪽이 더 무섭다. 직접적이고 감상에 빠질 겨를을 주지 않는다. 서로를 죽이고 죽여야만 하는, 그렇게 해서라고 살아남아야 하는 고령화 사회가 노인의 끝이라면 정말이지 끔찍하다. 죽고 싶지 않은데 제도에 의해 살해당하는 약한 노인들과 그런 약한 노인들을 밟고 살아남는 강한 노인들. 왜 노인들의 사회에서마저 강자와 약자로 나누어져서 목숨을 놓고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가. 물론 고령화 문제가 심각하긴 하다. 성인 한명당 5명의 노인을 먹여 살려야한다고 친구로부터 들었는데, 5명이든 아니든 중요한 건 수치가 아니다. 앞으로 부양해야 할 노인들의 수는 더 증가하리라는 것. 그리고 그에 따라 정말 이런 제도가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는 것. 물론 이런 제도는 많이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틀림없이 사회풍토는 지금과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변해 갈 것이다. 우스운건 누구나 늙어가는 것을 피할 수 없고 자신도 노인이 된다는 것이다. 내게도 아직은 멀게만 느껴지는 이 단어도 순식간에 다가올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그런 '늙음'과 '노인'이라는 것 자체가 비난의 대상이 되고 처형당해야 마땅할 존재로 자리잡는다. 억울하다. 분통이 터진다. 하지만 한편으론 노인들은 자신이 '짐'이고 '폐'가 된다는 점을 알고 받아들이며 이를 죄스러워하기에 이런 제도 하에서 배틀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을 길러주고 사회의 토대를 닦아 놓은 노인들을 공경하고 부양해야 하는 것은 맞다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 '노인상호처형제도'의 윤리적인 문제도 묻어두고 이런 일을 겉으론 거부하는 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받아들이는지도 모른다. 책에 등장하는 성인남녀들의 행동도 그러했다. 생존을 위협하는 배틀 자체의 공포도 있었지만, 다른 집의 노인이 자기 집에 들어와 태연하게 아버지를 죽이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는 정말이지 충격의 연속이다. 이 책은 변화해가는 현대 사회에 발맞춰 충격적인 미래의 시나리오의 한 일면을 보여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심각하거나 진지하게 메세지를 전달하고자함 없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되는 일을 풍자와 유머 그리고 상상력으로 풀어낸 츠츠이 야스타카의 <인구조절구역>은 '노인상호처형제도'라는 이 기이한 제도 하나만으로도 읽어 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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