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들 펭귄클래식 109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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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둘러싸인 벽들 사이에서, 오로지 그들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사물들에 둘러싸여, 멋지고 단순하며 감미롭게 빛나는 사물들 사이에서, 삶이 언제까지나 조화롭게 흘러가리라 생각할 것이다. (-)그들의 소유와 욕망은 언제나 모든 지점에서 일치를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균형을 행복이라 부를 것이고, 얽매이지 않으면서 현명하고 고상하게 행복을 지키고, 그들이 나누는 삶의 매 순간 이를 발견할 줄 알 것이다." (p.20-21)

 

 

자본주의 사회에서 행복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물들, 즉 물질적인 것의 소유와 일치하는가?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은 제롬과 실비, 두 남녀가 학생 신분을 벗어나 사회에 진입하기까지 걸린 6년의 일상을 그린 소설이다.

 

"그들은 삶을 사랑하기게 앞서 부를 사랑했다." (p.28)

 

 

그들은 여유로운 삶, 자유로운 삶을 꿈꾸면서도 모든 사물들을 마음대로 취할 수 있는 거대한 부를 원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자유란 부에 구애받지 않고 풍요롭게 화려하게 살 수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부자이고 싶었다. 그들은 프티 브루주아였다. 하지만 그들은 자유를 이렇게 묘사하며 일과 자유의 관계에서 고민한다.

 

 

"(-)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보내는 날들, 게으름 피우며 눈뜨는 아침, 침대 한쪽에 추리소설과 공상과학 소설책을 쌓아놓고 뒹구는 아침나절, 한밤중에 센 강변을 따라 걷는 산책, 문득 가슴 벅차게 차오르는 자유의 느낌, 지방으로 설문조사를 나설 때마다 드는 휴가 기분을 사랑했다. 물론 그들도 이 모두가 거짓이라는 것, 그들이 갖는 자유의 기분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 일과 자유의 대립 관계를 엄격히 따지던 시기는 지난 지 오래라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그들에게는 그것이 무엇보다 직장을 선택하는 중요한 요소였다."(p.62-63)

 

 

취업난에 시달리는 요즘과 같은 시기에는 배부른 소리하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누군들 제롬과 실비와 같은 삶을 꿈꾸지 않겠는가. 많은 시간 일하는데 보내지 않고도 살아 갈 수 있는 편안한 삶. 일과 돈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 누군들 원하지 않을까. 문제는 이런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도 환상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고민한다. 제한된 사물과 부족한 부 속에서 자유를 갈망하는 것이다.

 

 

"그들의 세계에서 살 수 있는 수준보다 더 많이 갈망하는 것은 어떤 법칙에 가까웠다. 이렇게 만든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대 문명의 법칙이었고, 광고, 잡지, 진열장, 거리의 볼거리, 소위 문화 상품이라 불리는 총체가 그 법에 전적으로 순응하고 있었다."(p47)

 

 

그리고 그들은 사물들을 향한 자신들의 소유욕과 욕망을 자신들의 내부가 아닌 밖으로 돌렸다. 사물들에 대한 소유와 욕망은 분명 개인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인간의 심리를 교묘하게 조절하여 소비로 이끄는 광고부터 사회 전반적으로 소비지향적인 문화를 조장하는 흐름까지,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제롬과 실비를 소위 현대 문명의 '법칙'이라 불리는 그것에 순응하고 따르게 만들었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그 '법칙'에 순응하며 살아가는가?

 

 

그렇지 않다. 허례허식에 가득 차 보이는 것만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 특이나 만연하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의 모습이고 우리의 모습이다. 자신이 아닌 사회를 탓하며, 자신이 가진 물질욕과 소비를 합리화한다. 그런 합리화를 통해 스스로를 향한 죄책감을 덜고 끊임없이 '부'와 '사물들'을 추구하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사회는 사람들이 점점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게 되어가고 있다. 누구나 부를 꿈꾸고 부자가 될 수 있는 시대이다. 여기서 불행이 시작된다." (p.63)

"그들이 사는 세상은 낯설고 화려했다. 자본주의 문화로 번쩍이는 세계, 풍요로움이 감옥처럼 둘러싸고, 행복이라는 매력적인 덫이 놓인 세계였다."(p.79)

 

 

그럼에도 사회의 변화는 무시 할 수 없다. 큰 외부의 압력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흔들리더라도 중심을 잃지 않으면 된다. 여기서 <사물들>은 자본주의의 시류에 휩쓸려 자신의 주체성을 잃지 말라고 말한다. 본래적 자아로서 자신의 욕망을 읽어내며 살아가야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가. 자본주의 세계가 놓은 가짜 행복의 덫에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은 떠났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만원인 지하철, 짧기만 한 저녁, 치통처럼 따라붙는 통증과 불확실성의 지옥에서 빠져나온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불투명했다. 그들의 삶은 팽팽한 줄 위에서 끊임없이이 춤춰야 하는 꼴에 지나지 않았고, 미래는 꽉 막혀 있었다. 극심한 공허감, 기댈 곳도 없으면서 끝을 모르는 비참한 욕망에 시달렸다. 그들은 소진된 느낌이었다. 은둔하기 위해, 잊기 위해 자신들을 달래기 위해 떠났다." (p.106~107)

 

 

제롬과 실비는 파리에서 스팍스로 도망치듯 떠난다. 욕망에 젖어들어 비참해지는 자신들의 모습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만든 암울한 미래와 그러한 미래에도 계속되는 욕망에 벗어나기 위해 떠난다. 그리고 스팍스에서의 생활을 통해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가 놓은 가짜 행복의 덫을 알아차리고 자신들의 상태에 대해서도 인식한다.

 

 

"적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들 안에 있었다. 그들을 타락시키고, 부패시켰으며 황폐화시켰다. 그들은 속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조롱하는 세상의 충실하고 고분고분한 소시민이었다. 기껏해야 부스러기밖에 얻지 못할 과자에 완전히 빠져 있는 꼴이었다."(p.79)

 

 

그들은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던 자신의 모습을 반성한다. 그리고 파리와는 다른 시골같은 스팍스에서 이와 같은 사유를 계속한다.

 

 

"예전에 그들은 적어도 무언가를 소유하고 싶은 광기에 휩싸인 적이 있었다. 이런 강렬한 욕구가 그들의 삶을 지탱해 주기도 했다. 앞쪽으로 팽팽히 당겨진 듯한 조급하고 욕망에 사로잡힌 느낌으로 살았다. 그리고? 무엇을 했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무엇인가, 아주 천천히 파고드는 조용한 비극과 같은 것이 그들의 느려진 삶 한가운데 자리 잡았다. 아주 오래된 꿈의 파편 가운데, 형태를 잃은 잔해 가운데 그들은 방향성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들은 경주의 끝, 6년 동안 삶이 굴러온 모호한 궤도의 끝, 어느 곳으로도 인도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은 우유부단한 탐색의 끝에 서 있었다." (p.126-127)

 

 

하지만 그들이 다다른 곳은 망망대해의 한가운데였다. 방향성을 잃고 지향할 바를 망각했다. 유일하게 그들의 삶의 원동력이었던 소비 욕구를 채울 수 없는 스팍스에서의 생활은 그들에게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계기도 주었지만 소비 이외의 삶은 생각해본 적 없던 두 사람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들은 스팍스에서 이방인이었고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몽유병자였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도 이방인이었고 어디에가든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갈 뿐인 몽유병자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대다수의 인간들이 그렇지 않은가. 스스로에게 있어서 이방인이고 비슷하게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몽유병자가 아닌가. 우리는 달라야한다. 제롬과 실비처럼 자신에게마저 이방인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스스로의 일상을 몽유병자처럼 반복하고 있다고 느끼게끔 만들어선 안 될 것이다. 행동(deed)와 욕구(need) 사이에 자신이 서 있어야지, 그 둘을 멀리서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이방인의 모습을 하고 있어선 안 된다. 우리의 일상은 그렇게 허무하지도, 보잘 것 없지도 않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을 맺을수도 있고 에필로그에서 끝을 맺을 수도 있다. 여기서 이야기를 끝을 맺을 경우, 제롬과 실비는 방황 끝에 좌절하며 다시 탐색의 길을 다시 떠나는, 자기 인식을 통한 미래의 희망을 발견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에필로그에서 이야기의 끝을 맺는다면, 두 사람이 이러한 방황 끝에 발견 한 것은 상황의 인식후에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프티 브루주아는 끝내 벗어날 수 없다는 메세지와 함께 가치관의 변화가 중요하다라고도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치관의 변화는 좀처럼 힘드니, 에필로그의 결말은 다시 '사물들'의 품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제롬과 실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분명 후자가 더 현실적이며, 대다수의 사람들의 행동일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마지막을 메우는 카를 마르크스의 문장처럼 어떤 결말이든 진리의 일부일 것이다. 어떤 원인에 의해 어떤 결과가 나오고 그 결과에 도달하기 위해 어떤 수단을 쓰던지, 그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과 결과로 수렴된 수단이 진실되다면 그 모든 것은 어쨌거나 진리의 일부며 진실되다는 것이다. 제롬과 실비, 그들에게 있어서 '사물들'에서 찾는 행복 역시 진리이며 진실인 것이다. 사물이라는 수단이 행복이라는 결과로 그들을 이끌 수 있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진리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것이 옳지 않다, 그르다라고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대화도 하나 없이 오직 묘사로만 진행되는 이 이야기-묘사로만 진행된다하면 지루하고 재미없을 것 같으나 간결한 문체와 군더더기 없는 문장들은 굉장한 흡인력과 가독성을 지닌다.-는 실험적 글쓰기의 모습도 보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우리가 선택한 자유의 모습을 관조적으로 바라보게 하여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분명 우리를 '사물들'로 얽어매지만 선택의 자유 역시 주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있어선 진실된다. '사물들'은 우리네 삶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무엇이겠지만 그것을 어떻게 수용하는가는 우리의 몫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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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숙 옮김 / 비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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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어떤 책들은 느긋하게 읽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는 흡인력이 없다거나 재미가 없어서 안 읽히는 경우와는 다르다. 그저 나도 모르게 느긋하게 읽어버리는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문>도 이에 해당하는 책이었는데, 몇 주에 걸쳐 천천히 읽고 나서는 내가 꽤나 책 분위기에 젖어들어 있었구나, 라고 느꼈다. 책을 덮고 나서도 가슴에 와닿는 깊은 울림에 한 동안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문>은 지극히 평범하고 어두운 가운데 큰 사건 없이, 엄청난 절정이나 위기도 없이, 한 부부의 이야기를 고즈넉하게 풀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가 고즈넉하다하여 지루한 것은 아니다. 이야기는 과거의 짐을 내려놓지 못하고 불안에 떨면서 살아가는 소스케와 오요네, 두 사람의 모습과 일상의 행복이 교차하면서 앞에 깔아놓은 '문'과 관련된 복선과 암시, 상징은 서스펜스로 이어져 뒤로 향할 수록 긴박감을 더한다.

 

 

"그 당시 소스케의 눈은 항상 새로운 세계에만 집중돼 있었다. 그러므로 자연이 한 차례 사계절의 색을 보여버린 뒤에는 재차 전해의 기억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꽃이나 단풍을 맞이할 필요가 없어졌다. 강하고 강렬한 생명을 살았다고 하는 증명서를 어디까지나 움켜쥐고 싶었던 그에게는 살아 있는 현재와 지금부터 태어나려고 하는 미래가 눈앞의 문제였지, 사라져가는 과거는 꿈처럼 가치 없는 환영에 불과했다."

 

 

과거에 이렇게 생각했던 소스케는, 과거가 환영이 아님을, 현재를 끊임없이 파고드는 괴로움임을 깨닫게 된다. 과거가 현재를 압박해오고, 그 압박에 견디지 못한 소스케는 결국 직장에 휴가계를 내고 절로 향한다. 그는 종교에서 답을 구하려 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절을 떠나는 마지막 날, 선문 앞에 선다.

 

 

"나는 문을 열어달라고 왔다. 그렇지만 문지기는 문 안쪽에 있어서 아무리 두드려도 끝내 얼굴조차 내밀지 않았다. 단지 "두드려도 소용없다. 혼자 힘으로 열고 들어오너라" 라는 목소리만 들려왔을 뿐이다. (-) 그 자신은 오랫동안 문밖에 우두커니 서 있어야 할 운명으로 태어난 것 같았다. 거기에는 옳고 그름도 없었다. 그렇지만 어차피 통과하지 못할 문이라면, 일부러 여기까지 고생 끝에 닿는다는 건 모순이었다. 그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도저히 왔던 길로는 되돌아갈 용기가 없었다. 그는 앞을 바라다보았다. 앞에는 육중한 문짝이 언제까지나 전망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는 문을 통과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문을 통과하지 않고 끝날 사람도 아니었다. 결국 그 문 아래에 꼼짝달싹 못하고 서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야 하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p264~265)

 

 

거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이 장면에서 사람들은 큰 실망을 할지도 모른다. 현실을 피해 가마쿠라에 있는 절로까지 도망쳤는데, 결국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그대로 집으로 귀가하는 건 어딘가 절망스럽다. 과거로부터 벗어나려 했지만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과거는 지금에 와서 보면 사건다운 사건이 아닐지도 모르며 그렇게 보면 처음부터 해결될만한 사건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문>은 마치 한편의 작가 예술 영화를 보듯, 사건 다운 사건 조차 일어나지 않기에, 해결될 사건도 없이 그저 흘러갔다.

 

작품 해설에서는 선문 앞에 선 소스케가 종교를 통해 구원 받지 못한 이유는 "그의 마음이 화두가 의미하는 자기 존재에의 근원적인 물음을 향하지 않고 현재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수단"이라고 하였다. 그저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한 수단으로서는 분명 내면이 '문'은 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느낀 건 과거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종교에 귀의해 내면의 '문'을 열지 못한 소스케에 대한 실망감이 아니다. 나는 여기서 과거로부터도, 현실로부터도 꼼짝달싹 할 수 없는 한 인간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범인의 표상이었고, 우리의 모습이었다.

 

 

"그는 오늘까지의 경과로 미루어 모든 상처를 치유해주는 데는 세월이 약이라는 격언을 자기 자신의 경험으로 터득해서 가슴 깊이 새기고 있었다. 그 믿음이 그저께 밤에 완전히 무너져버린 것이다." (p.266)

 

 

나는 소스케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했다. 시간이 해결 해주리라 생각했던 과거의 상처는 전혀 해결되어 있지 않았다. 작은 풍파에도 상처는 마치 어제의 것처럼 아파왔고 소스케는 불안에 떨었다. 그리고 그는 선문 앞에서 알게 된다. 자신은 문을 열 수 없다고.

 

 

하지만 끝 문장을 자세히 보면 '여지'가 있음을 할 수 있다. 문을 통과할 사람은 아니지만, 문을 통과하지 않고 끝날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그는 내면의 문을 열기 위해 비록 그 삶이 문 앞에서 기다리며 불안에 떨어야하는 삶일지라도 앞으로 살아갈 것임을 암시한다. 만약 저 끝 문장이 없었더라면, 내가 소스케였더라면, 나는 과거의 상처에 못 이겨 끝내 삶을 이어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스케는 달랐다. 그는 내면의 문도 열지 못했고 과거의 일도 해결하지 못했지만 어쨌거나 앞으로 계속 살아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여기서 무척이나 희망적이고 역동적인 움직임을 느꼈다. 그리고 실의와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내면의 문을 열고 과거를 딛고 일어서는 데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는 메세지를 발견했다.

 

 

끝에 봄이 와서 기쁘다는 아내 오요네의 말에 소스케는 또 겨울이 올 거야, 라고 말한다. 나는 여기서 사건이 제기되지도, 해결되지도 않은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과 함께 또 한 번 삶에 대해서 느꼈다. 반복되는 계절 속에서 지울 수 없는 과거를 이고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두 부부에게서, 나는 또 다시 한 번 범인의 표상과 평범함을 느꼈다. 마치 영화와 같았다. 눈 앞에 그려지는 이 금슬 좋은 부부의 한적한 일상 가운데 일어나는 세속의 일들이 그들을 현실에 붙잡아 두고 있었다.

 

 

"소스케와 오요네는 금슬이 좋은 부부임에 틀림없었다. 같이 산 육 년이나 되는 오늘까지 단 하루도 서먹서먹하게 살아본 적이 없었다. 말다툼으로 얼굴을 붉힌 기억은 더더욱 없었다. (-) 그들에게 절대 필요한 것은 서로의 존재뿐이었고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충분했다." (p171)

 

 

분명 소스케와 오요네는 작가 나쓰메 소세키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부부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게는 이는 무척이나 이상으로 보였다. 다툼도 없이, 서로가 서로 뿐인 두 사람. 리얼리티가 떨어지는 이 부부의 삶에 리얼리티를 부여한 건 소스케 동생 고로쿠의 일과 친구 야스이와 관련된 과거 등이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이런 부부도 있구나, 라고.

 

하지만 이 <문>이라는 소설이 가지는 큰 매력중의 하나는 문체다. 담담하면서도 눈 앞에 그려지는 듯한 섬세한 묘사와 표현력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거리는 좌우에 비치는 상점 불빛으로 환하게 밝았다. 상점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자도 옷도 똑똑하게 구별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넓은 추위를 비추기에는 너무나 미약한 빛이었다. 밤은 문마다 달린 가스등과 전등을 저만큼 밀어넣고 여전히 어둡고 크게 보였다. 소스케는 그 세계와 조화를 이룰 만큼 검은 외투에 몸을 감싸고 걸었다. 그때 그는 자기가 숨쉬는 공기조차 회색으로 변해 폐 속 혈관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 부분은 과거의 상처가 현실을 다시 위협하여 마음이 어지러운 소스케가 거리를 방황하는 심정을 묘사하고 있다. 나는 친구에게 이 문장을 보여주었는데, 친구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기형도의 시를 읽을 때처럼, 문장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설레, 몇 번이고 이 문장을 읽고 어플에 적고, 독서노트에도 적었다. 게다가 이러한 문장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심오한 뜻이 없어도, 삶과 관련된 혜안을 가져다 주지 않아도, 내게는 무척이나 의미가 깊게 다가왔다.

 

 

이 소설의 매력을 또 하나 더 언급하자면, 당대 일본의 현실이 여기저기 섬세하게 뭍어난다는 점이다. 가옥의 구조, 관습, 놀이 등 이러한 당대 현실을 드러내는 지표들은 소설에 크나큰 리얼리티를 줌과 동시에, 일본 고유의 전통이 묻어나 즐거웠고 흥미를 느끼게 만들었다. 특히나 소설에 등장하는 주 장소인 일본 가옥은 그 구조가 색달라 실제로 한 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보통 책은 한 번 읽고 마는 편인데, 나쓰메 소세키의 <문>은 또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생각이 드는 것은 다시 읽으면 또 다른 감상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과 이번에 발견하지 못했던 또 다른 매력을 이 소설에서 느낄 수 있을거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작품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느낌이 자꾸만 든다. 그건 내가 놓친 부분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처 짚고 넘어가버린 부분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내면의 '문'과 마주하고 싶어질 때, 내면의 '문'을 열지 못해 좌절할 때, 나는 이 책을 또 펼쳐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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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의 뱀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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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함께 사는 사람은 한 핏줄도 아닌 오츠타로 씨와 나오다. 잘 생각해 보면 나는 이상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 가족이란 개념에 정해진 형태 같은 건 없으리라. p.170

 

<달과 게> 이후로 오랜만에 미치오 슈스케와 만났다. <용의 손은 붉게 물들고>, <달과 게> 그리고 <구체의 뱀>을 읽고 나서 미치오 슈스케라는 작가는 '가족'에 대해서 언제나 말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아니, 그의 모든 작품에서 크든 작든 '가족'에 대한 어떠한 형태들을 발견 할 수 있다. 이야기는 대게 '가족'과 관련된 일이 있고 그곳에 미스터리가 숨어있다. 가족이라서 말할 수 없었던 것들,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아서 감추고 있었던 비밀들, 그런 것들이 오해를 낳고 또 오해를 불러들여 가족은 바스락거린다.

 

이야기는 화자인 토모히코, 수험을 앞둔 남학생의 담담한 어투로 시작되었다. 현실 속에서 불현듯 비추는 과거의 흔적을 떠올리며 토모히코는 조금씩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현실 속에선 과거의 일이 끊임없이 간섭을 하고, 묻혀 있던 과거의 비밀은 현실 속으로 등장하면서 각자가 기억하고 있던 것과는 다른 양상을 띄기 시작한다. 하지만 마지막에 이르러서도 과거의 진실은 알 수 없게 된다. 누구 하나 제대로 된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있을까? 진실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걸까?

 

사람은 똑같은 것을 봐도 각기 다르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렇게 받아들인 것을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그런 과정이 계속 되다보면 타인과는 다른 관점으로, 서로 각기 다른 진실을 품은 채 세상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오해가 쌓이고, 쌓여서 관계는 틀어진다. 그 관계가 남남이라면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호의나 적의를 품은 관계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리고 그것이 만약 가족이라면 더욱 더 복잡해진다.

 

가족이란 과연 무엇일까.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 낳은 결과란 어떤가. 가슴 아픈 이야기라고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생각했다. 누구 탓도 아니었다. 누가 진정한 살인자인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가족이니까, 시시비비를 가릴 수 없었다. 어째서 진실을 말하지 않느냐고 더 이상 추궁 할 수도 없었다. 토모히코도, 나오도 자신의 몫만큼 짊어지고 평생 살아갈 뿐이다. 이런 부분이 굉장하다. 지금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구체의 뱀>에서 미치오 슈스케가 그려낸 가족의 그 미묘함을 표현 해 낼 수가 없다. 그건 가족을 어떠한 말로도 정의내리기 힘든 것과 닮았다.

 

"모든 인간은 그저 이 세상에 태어나기만 해서는 안 되는 거야.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안 돼.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살기 위해 다시 태어나야만 하지. 난 항상 그렇게 생각해. 꼭 그렇게 생각한다고." (p.269)

 

사람은 처음부터 가족으로 태어나는 건 아니라고 했다. 그러기에 가족이 되려면 어쨌거나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무엇하나 저절로 이뤄지는 것은 없는 것이다. 가족을 위해 죽고, 가족을 위해 다시 태어나고, 슬프고 적막한, 미치오 슈스케의 또 하나의 가족 이야기였다.

 

<구체의 뱀>이란 제목은 읽다 보면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 될 수 있음을 알아차렸다. 크게 어린왕자와 스노돔으로 나눠지는데, 어느 쪽으로 보나 전하고자 하는 말은 똑같다. '어딘가에 갇혀 고통스러운 눈물을 머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것이 <구체의 뱀>이였다. 그러니까 뱀 몸 안에 갇힌 코끼리든, 구체의 안에 갇힌 눈사람(뱀)이든 어떠한 굴레에 갇혀, 또는 어딘가에 얽매여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의 감정을 잘 그려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의 가장 큰 테두리는 '가족'이다. 미치오 슈스케가 그려내는 '가족'은 피난처와 안식처라기보단 위태롭고 불안한 모습을 띈다. 그래서 그런걸까, 유난히도 불륜이나 이혼 등의 현대 가정윤리 문제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런 점이 사회파 소설같다는 느낌도 주지만, 어딘가 여전히 환상적인 느낌이 남아있어서 미야베 미유키님처럼 읽자마자 사회파 소설이다,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리얼리티가 있는 환상 소설을 보는 느낌도 없잖아 있다. 물론 미치오 슈스케의 최근 글을 보면 그런 현상이 옅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까지 나는 읽으면서 그렇게 느낀다. 잘 쓴 소설이지만, 묘하게 환상적인 느낌이 든다고. 어딘가 모르게 리얼리티가 있으면서도 없는 듯한 것이 다른 세계로 건너갔다가 온 기분이 든다. 저쪽 이야기는 분명 이쪽 이야기이기도 한데 말이다.

 

몇 장을 안 남겨두고 다시 재기 된 문제는 해결된 줄로만 알았던 과거의 진실이였다. 이것도 하나의 반전이라고 하면 반전이라 볼 수 있겠지만, 그것보다도 그렇게 진실을 왜곡 할 수 밖에 없는 상황들이 무척이나 와 닿았다. 수험생이던 토모히코가 대학생이 되고 어른이 되어 결혼하기까지의 일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이혼한 부모님과 떨어져 생판 남의 집에서 살게 되고, 정사 현상을 엿듣고 여자를 알게 되고, 시간이 흘러 결혼하기까지 죽음이 끊임없이 쫒아다닌다. 하지만 오츠타로씨의 죽음을 빼면, 사요의 죽음도, 토모코의 죽음도 여전히 베일에 휩싸여있다. 토모코는 생사조차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이전에 읽은 책들보다 전체적으로 뚜렷하게 느껴진다. 여지를 남겨둔 것 같은 결말도 왠지 모르게 닫혀 있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로.

 

나는 그 보아뱀을 생각했다. (-) 과연 그 그림에 눈은 그려져 있었던가. (-) 하지만 만약 눈이 그려져 있었다면, 그 눈은 분명 괴로운 듯이 일그러진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으리라. 그래도 삼킴 것을 토해 내려 하지 않고 가만히 참고 있었으리라. 저마다 거짓말을 품은 사람들이, 어젠가 구체에 비칠 저녁 해가 유리 속의 차가운 눈을 녹여 주기를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p324)

마지막에 가서 미치오 슈스케는 그냥 다 말해줘버린 느낌이었다. 이 책은 이런 것입니다,라고 작가가 직접 말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이건 좋을 수도 있지만, 나는 차라리 잘 몰라도 이런 식으로 다 말해주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어린왕자의 보아뱀을 새로운 관점으로 본 점과 그것을 이야기와 연결 시킨 점은 신선했고 이야기는 따뜻했다. 표지와 잘 어울리는, 겨울과 참 잘 어울리는 소설이라고 느꼈다. 만약 <구체의 뱀>을 읽어보실 거라면 겨울에 읽으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가족'이란 정말 무엇일까. 미치오 슈스케가 그리는 가족은 아름다운데 어딘가 처연하다. 그 점이 매력이라면 매력이다. 확실히 깔끔해진 이야기라고 생각되는 <구체의 뱀>. 제목과 표지가 개인적으로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서 꼭 보고 싶었던 책이었다. 지금까지와의 인상과 비슷하면서도 전체적인 이야기에서 다른 느낌을 받았던 <구체의 뱀>. 다음 책을 한 권 더 읽어보면 이 느낌이 확실해지지 않을까 한다. 노스탤지어적인, 가족과 관련된 미스터리 성장소설을 보고 싶으신 분들께 한 번쯤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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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이이치로의 낭패 아 아이이치로 시리즈
아와사카 쓰마오 지음, 권영주 옮김 / 시공사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이 책이 출간된 것이 2010년 7월 1일이다. 벌써 해가 두 번이나 바뀌었다.

 

 처음 이 책이 출간 되었을 당시 무척이나 끌리는 제목과 표지에 사보려고 했으나 어째 들쑥날쑥한 평점과 리뷰 덕에 고민하고는 다른 책 사느라 정신이 팔려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우연히 올 초에 읽게 되었는데, 역시 리뷰란 건 자기가 읽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이구나, 라고 새삼 느꼈다.

 

 <아 아이이치로의 낭패>는 연작 단편소설로 아 아이이치로라는 미남이지만 어딘가 덜렁대는 부분이 있는, 구름이나 곤충등을 찍는 사진가가 탐정으로 활약해버리게 되는 상황에 처해지곤 하는 이야기들이 주를 이룬다. 그러니까 이 사진가는 본의 아니게 매번 사건에 휘말려서 사건을 풀어버리는 것이다. 이야기는 사건과 관련된 화자의 시점으로 진행되며 아 아이이치로는 중간에 등장해 사건의 전말을 듣고 끝에 가서 어떻게 되었는지 알려준다. 그러니까 '몽크(Monk)'라는 미드의 주인공 몽크처럼 사건이 일어나면 사건의 현장이나 인물들의 말을 쭈욱 살핀 다음 마지막에 사람들을 다 불러놓고 사건의 전말을 밝히는 것이다. 하지만 '멘탈리스트(The Mentalist)'라는 미드의 주인공 제인Jane처럼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람의 행동이나 마음을 읽어내는 모습도 보이기도 한다. 특히 'DL 2호기 사건', 이 편이 특히나 제인을 떠오르게 했다.

 

 번역가도 그렇고 '요즘 이야기' 같지 않다고 말하는데, 나 같은 경우는 요코미조 세이시의 이야기 정도라면 확실히 요즘 이야기 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는다. 팔묘촌이나 이누가미가의 일가 같은 이야기는 인물들의 가치관자체가 현대와 많이 다른 부분이 있어, 그 점에서 오래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그 오래됨은 단점이 아니라 장점으로, 실제로 그 오래된 부분에서 오는 재미가 상당하지 않은가. 하지만 아 아이이치로의 이야기는 요코미조 세이시의 이야기처럼 오래되었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출간년도를 의식하지 않고 읽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역으로 의식하고 읽은 사람도), 이야기자체는 특유의 낡음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미야베 미유키와 같은 요즘스러움은 또 없지만, 그건 이야기 내용 자체가 사회파가 아닌 탓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살인미수나 살인이 나와도 '무겁지 않으며', 트릭을 푸는 과정에서 '재기가 넘친다'. 게다가 곳곳에 묻어나는 은근한 유머스러움(때로는 대놓고 우습기도 하다)은 주인공탓도 있겠지만 이야기자체를 부드럽게 만들어준다.

 

 개인적으로(물론 항상 개인적이게 될 수 밖에 없지만) 굉장히 재밌게 읽었고 후속편으로 <아 아이이치로의 전도>와 <아 아이이이치로의 도망>이 남았다고 하니, 꼭 보고 싶다. 시공사에서 이렇게 또 예쁘게 책을 만들어서 출간해주면 좋겠다. 물론 나도 후속권이 나올 수 있도록 책의 판매량에도 영향을 주도록 해야겠지만.

 

 여하튼 너무 무겁지 않고 마지막에 가서 사건의 트릭과 전말을 밝혀주는 재기넘치는 연작 단편 탐정 소설을 보고 싶으신 분들께 추천하고 싶다. 하지만 아 아이이치로라는 탐정의 개인적인 무언가에 대해서 기대하시는 분들이라면 실망하실지도. 철저히 사건 위주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 점 유의하기 바란다. (아마 탐정의 사적인 내용은 후속편에서 조금씩 드러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데 어떨지 모르겠다.)

 

 

 평점 : 4.8

 느낌 : 후속작을 보고 싶다. 이 책 소장용으로 하나 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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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시마 디자인 여행 안그라픽스 디자인 여행 6
정희정 지음 / 안그라픽스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오랜만에 방문한 도서관에서 우연히 집어 들었다. 그렇게 디자인 책을 3권 정도 집어 들었는데, 결국 빌린 책은 <나오시마 디자인 여행>, 이 책이었다. 알라딘에 DB되어 있는 책 표지 중 노란 바탕에 도트 모양은 (아마도) 띠지로, 띠지를 벗긴 표지는 파란색과 흰색, 검정색, 그리고 주황색이 두께를 달리하며 장식하고 있다. 깊은 파란 색의 깔끔한 표지가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이어서 책의 컨텐츠는 '나오시마'라는 처음 들어보는 일본의 한 섬에 빠지게 만들었다.

 

 

프롤로그, 창조마을 나오시마를 만나며, 라는 짧은 서문을 지나면 나오시마의 풍경을 담은 사진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산과 바다로 둘러싸인, 호박 무늬의 건축 예술물이 인상적인 섬, 나오시마로의 여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읽기 편하다는 것이다. 마치 나오시마라는 섬의 분위기를 책을 읽는 독자에게 알려주기 위해, 책에서의 빈 공간도 하나의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처럼 많은 글을 담지 않았다. 필요한 것만 담아 사진과 글을 효과적으로 배치해 나오시마 섬을 감상하도록 만든 책이었다. 글은 나오시마 섬의 안내문이자 건축 예술물들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고 뒤이어 사진들이 나오는데, 마치 박물관에서 큐레이터가 설명해주는 것과 같이 친절하고 어렵지 않아서 잘 읽힌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술작품들을 몇점 뽑아 이름과 간략한 소개를 하고 있다. 에세이류를 지독하게도 읽지 못하는 나로썬 이렇게 책 한권을 재미있게 끝까지 읽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 건 책의 편집 방식도, 글쓴이의 말투도 아니다. 나오시마라는 섬이 가진 매력에 책에서, 글에서, 사진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 섬 전체가 예술, 그 자체다. 이건 혹시 지상낙원이 아닐까?


01 디자인과 예술의 섬, 나오시마,
생략과 채움의 베네세하우스
- 제2, 제3의 나오시마를 꿈꾸는 후쿠다케 소이치로
- 나오시마의 확산, 세토우치국제예술제
겸손과 순응의 지추미술관
- 동과 정의 세계를 나오시마에 구현한 안도 다다오
사색과 소통의 이우환미술관
- 미니멀리즘의 한계를 극복한 이우환

02 바다의 역, 미야노우라 항구
배려가 깃든 마린스테이션
- 나오시마의 관문을 만든 세지마 가즈요?니시자와 류에
공중목욕탕에서 예술 만나기
- 폐기물을 작품화한 오타케 신로
나오시마의 랜드마크 빨간 호박
- 호박과 항구를 조합한 구사마 야요이

03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예술마을
작은 목소리의 손짓
친절과 배려가 만든 굴절
추억을 선물하는 지역 상품
폐가의 재생, 집 프로젝트
나오시마 주민 여러분

에필로그
친환경 생태마을을 꿈꾸며

 

 

 차례의 제목들이 굉장히 함축적이여서, 사실 따로 설명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예술작품들로 가득한 호텔과 미술관이 어우러진 베네세하우스, 전 세계에서 유일한 땅속 미술관 지추 미술관, 미니멀리즘의 대가로 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이우환 작가의 작품으로만 구성된 이우환미술관,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작품 등 일본 섬이라고 일본 예술가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의 예술가들을 모두 만나 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베네세 하우스에는 띠지에서도 볼 수 있는 노랑 바탕의 도트가 찍힌, 일명 노란 호박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나오시마의 명물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나 역시 앞으로 나오시마하면 구사마 야요이가 처음 만든 이 노란 호박이 먼저는 아니더라도 제법 빠르게 떠오르지 않을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나오시마의 전경이랄까, 풍경 같은 것이 먼저 떠오른다. 형태는 자세하지 않지만 나오시마 특유의 느낌과 이미지가 먼저 형성된달까.) 개인적으로 꼭 가보고 싶은 곳은 땅속 미술관인 지추 미술관! 월터 드 마리아(Walter de Maria)라는 예술가의 '시간/영원/시간 없음(Time/Timeless/No Time)'이라는 작품을 보고 싶다. 빛에 따라 반짝임과 비치는 모습이 다르게 보인다는 이 건축물은 빛을 이용해 구현할 수 있는 최고의 건축 예술물이 아닐까라고 생각되어서였다. 무엇보다도 추게에 비치는 관람자의 모습까지 작품이 된다는 것 자체가 예술품은 멀찍히 떨어져서 나와는 별개의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술품과 내가 하나가 되어 그 순간 자체가 작품이 되어 내 안에 남겨진다는 사실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야말로 참여예술인 것이다. 전시실 벽면에 위치한 스물일곱 개의 황금빛 나무 오브제, 빛의 계단, 거대한 구체, 그리고 구체에 비친 나의 모습. 이 순간이 작품이고 예술이 되는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무척이나 떨린다.

 

 하지만 이런 모든 예술이 가능한 것은 나오시마 아트 프로젝트를 구상한 베네세그룹의 후쿠다케 소이치로 회장의 노력이 크다. 폐기물로 오염된 섬을 예술의 섬으로 탈바꿈 시키는데에는 자금과 같은 단순한 노력 이상의 무엇이 필요했을 것이다. '나오시마 아트 프로젝트'는 그런 의미에서 대기업이 진정한 의미로 사회에 환원한 예가 아닐까. 예술의 섬으로 전환되면서 전통과 현대건축의 조화를 이루고(보통 전통은 다들 기피하기 마련이다) 주민들의 예술 의식은 향상되었으며 섬 자체가 관광지가 되어 주민들의 경제 활동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대기업이 해야 할 바람직한 모습의 한 형태가 아닐까 생각된다.

 

 개인적으로 뒤로 갈수록 점점 더 재밌었다. 1장에서는 생활 속에 녹아있는 예술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미술관의 느낌에 가까웠다면 뒤로 갈수록 나오시마 섬 자체가 미술관이고 주민들의 생활 자체에 예술이 녹아 있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오시마의 디자인 예술은 단순히 예술로 존재하지 않고 효용성과 기능성을 간직한 채 주민들의 일상 속에 녹아 있었다. 괜히 예술의 섬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다. 전통과 예술이 공존하는 아름다운 섬이라는 것 정도는 사진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주민들이 만들어가는 간판과 같은 생활 곳곳의 예술은 정말 놀라웠고 들뜨게 만들었다. 이런 곳에서 살아보고 싶다, 라고 책을 보며 은연중에 그런 생각을 했다. 돈을 모아 가게를 차려볼까. (웃음) 개인적으로 전통적인 건축물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나로써는 사진만봐도 가보고 싶다, 실제로 한 번 보고 싶다, 이 주변을 걸어보고 싶다, 라고 계속 생각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사진기도 없이 그냥 눈으로 마음으로 마음껏 보고 오고 싶은 기분이 드는 곳이 나오시마 섬이였다. 특히 집 프로젝트는 인상적이어서, 지추 미술관과 함께 이 집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곳들은 꼭 방문해보고 싶다. 특히 '미나미데라(제임스 터렐 작)'와 '고오진자(히로시 스키모토, 기무라 마사루, 시타라 도시오 작)'는 지추 미술관의 '시간/영원/시간 없음'의 작품처럼 빛이 인상적인 건축 예술물로 꼭 가서 직접 체험해보고 싶다. 실제로 보면 또 어떤 느낌일지, 상상으로 메워지지 않은 그 부분들을 메우고 싶다.

 

 글쓴이의 예리한 눈길로 잡아낸 나오시마의 공공시설물은 건축에 대한 가치관의 확립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시설물은 보기에도 물론 아름다워야하지만 무엇보다도 생활하는 데 불편함은 물론 용이함도 제공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오시마의 시설물들은 주민들을 위해 시설물들이 설치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휘어진 전봇대와 안전거울은 보행자를 위한 안전과 배려가 느껴지고 일정하게 돌에 박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축대의 배수구도 자세히보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나있어 물길을 분산시키고 있다. 실로 엄청난 시설물이라고 밖에 생각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친절하고 상냥한 건축물이라니!

 

 마지막은 에필로그로 주민들의 인터뷰를 담고 있다. 나오시마 아트 프로젝트가 주민들에게 여러방면으로 좋은 영향을 끼쳤다는 점은 분명 앞으로도 나오시마를 예술의 섬으로 계속 가꿔나갈 원동력이 될 것이다. 부디 내가 방문 했을때에도 나오시마가 고즈넉하고 느긋하며 여유로움이 가득찬 전통이 깃든 예술의 섬으로 남아있기를 바란다.

 

 

 평점 : 4.8

 느낌 : 이 책은 사보고 싶다. 선물도 하고 싶다. 나오시마에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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