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의 뱀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함께 사는 사람은 한 핏줄도 아닌 오츠타로 씨와 나오다. 잘 생각해 보면 나는 이상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 가족이란 개념에 정해진 형태 같은 건 없으리라. p.170

 

<달과 게> 이후로 오랜만에 미치오 슈스케와 만났다. <용의 손은 붉게 물들고>, <달과 게> 그리고 <구체의 뱀>을 읽고 나서 미치오 슈스케라는 작가는 '가족'에 대해서 언제나 말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아니, 그의 모든 작품에서 크든 작든 '가족'에 대한 어떠한 형태들을 발견 할 수 있다. 이야기는 대게 '가족'과 관련된 일이 있고 그곳에 미스터리가 숨어있다. 가족이라서 말할 수 없었던 것들,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아서 감추고 있었던 비밀들, 그런 것들이 오해를 낳고 또 오해를 불러들여 가족은 바스락거린다.

 

이야기는 화자인 토모히코, 수험을 앞둔 남학생의 담담한 어투로 시작되었다. 현실 속에서 불현듯 비추는 과거의 흔적을 떠올리며 토모히코는 조금씩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현실 속에선 과거의 일이 끊임없이 간섭을 하고, 묻혀 있던 과거의 비밀은 현실 속으로 등장하면서 각자가 기억하고 있던 것과는 다른 양상을 띄기 시작한다. 하지만 마지막에 이르러서도 과거의 진실은 알 수 없게 된다. 누구 하나 제대로 된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있을까? 진실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걸까?

 

사람은 똑같은 것을 봐도 각기 다르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렇게 받아들인 것을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그런 과정이 계속 되다보면 타인과는 다른 관점으로, 서로 각기 다른 진실을 품은 채 세상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오해가 쌓이고, 쌓여서 관계는 틀어진다. 그 관계가 남남이라면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호의나 적의를 품은 관계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리고 그것이 만약 가족이라면 더욱 더 복잡해진다.

 

가족이란 과연 무엇일까.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 낳은 결과란 어떤가. 가슴 아픈 이야기라고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생각했다. 누구 탓도 아니었다. 누가 진정한 살인자인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가족이니까, 시시비비를 가릴 수 없었다. 어째서 진실을 말하지 않느냐고 더 이상 추궁 할 수도 없었다. 토모히코도, 나오도 자신의 몫만큼 짊어지고 평생 살아갈 뿐이다. 이런 부분이 굉장하다. 지금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구체의 뱀>에서 미치오 슈스케가 그려낸 가족의 그 미묘함을 표현 해 낼 수가 없다. 그건 가족을 어떠한 말로도 정의내리기 힘든 것과 닮았다.

 

"모든 인간은 그저 이 세상에 태어나기만 해서는 안 되는 거야.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안 돼.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살기 위해 다시 태어나야만 하지. 난 항상 그렇게 생각해. 꼭 그렇게 생각한다고." (p.269)

 

사람은 처음부터 가족으로 태어나는 건 아니라고 했다. 그러기에 가족이 되려면 어쨌거나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무엇하나 저절로 이뤄지는 것은 없는 것이다. 가족을 위해 죽고, 가족을 위해 다시 태어나고, 슬프고 적막한, 미치오 슈스케의 또 하나의 가족 이야기였다.

 

<구체의 뱀>이란 제목은 읽다 보면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 될 수 있음을 알아차렸다. 크게 어린왕자와 스노돔으로 나눠지는데, 어느 쪽으로 보나 전하고자 하는 말은 똑같다. '어딘가에 갇혀 고통스러운 눈물을 머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것이 <구체의 뱀>이였다. 그러니까 뱀 몸 안에 갇힌 코끼리든, 구체의 안에 갇힌 눈사람(뱀)이든 어떠한 굴레에 갇혀, 또는 어딘가에 얽매여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의 감정을 잘 그려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의 가장 큰 테두리는 '가족'이다. 미치오 슈스케가 그려내는 '가족'은 피난처와 안식처라기보단 위태롭고 불안한 모습을 띈다. 그래서 그런걸까, 유난히도 불륜이나 이혼 등의 현대 가정윤리 문제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런 점이 사회파 소설같다는 느낌도 주지만, 어딘가 여전히 환상적인 느낌이 남아있어서 미야베 미유키님처럼 읽자마자 사회파 소설이다,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리얼리티가 있는 환상 소설을 보는 느낌도 없잖아 있다. 물론 미치오 슈스케의 최근 글을 보면 그런 현상이 옅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까지 나는 읽으면서 그렇게 느낀다. 잘 쓴 소설이지만, 묘하게 환상적인 느낌이 든다고. 어딘가 모르게 리얼리티가 있으면서도 없는 듯한 것이 다른 세계로 건너갔다가 온 기분이 든다. 저쪽 이야기는 분명 이쪽 이야기이기도 한데 말이다.

 

몇 장을 안 남겨두고 다시 재기 된 문제는 해결된 줄로만 알았던 과거의 진실이였다. 이것도 하나의 반전이라고 하면 반전이라 볼 수 있겠지만, 그것보다도 그렇게 진실을 왜곡 할 수 밖에 없는 상황들이 무척이나 와 닿았다. 수험생이던 토모히코가 대학생이 되고 어른이 되어 결혼하기까지의 일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이혼한 부모님과 떨어져 생판 남의 집에서 살게 되고, 정사 현상을 엿듣고 여자를 알게 되고, 시간이 흘러 결혼하기까지 죽음이 끊임없이 쫒아다닌다. 하지만 오츠타로씨의 죽음을 빼면, 사요의 죽음도, 토모코의 죽음도 여전히 베일에 휩싸여있다. 토모코는 생사조차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이전에 읽은 책들보다 전체적으로 뚜렷하게 느껴진다. 여지를 남겨둔 것 같은 결말도 왠지 모르게 닫혀 있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로.

 

나는 그 보아뱀을 생각했다. (-) 과연 그 그림에 눈은 그려져 있었던가. (-) 하지만 만약 눈이 그려져 있었다면, 그 눈은 분명 괴로운 듯이 일그러진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으리라. 그래도 삼킴 것을 토해 내려 하지 않고 가만히 참고 있었으리라. 저마다 거짓말을 품은 사람들이, 어젠가 구체에 비칠 저녁 해가 유리 속의 차가운 눈을 녹여 주기를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p324)

마지막에 가서 미치오 슈스케는 그냥 다 말해줘버린 느낌이었다. 이 책은 이런 것입니다,라고 작가가 직접 말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이건 좋을 수도 있지만, 나는 차라리 잘 몰라도 이런 식으로 다 말해주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어린왕자의 보아뱀을 새로운 관점으로 본 점과 그것을 이야기와 연결 시킨 점은 신선했고 이야기는 따뜻했다. 표지와 잘 어울리는, 겨울과 참 잘 어울리는 소설이라고 느꼈다. 만약 <구체의 뱀>을 읽어보실 거라면 겨울에 읽으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가족'이란 정말 무엇일까. 미치오 슈스케가 그리는 가족은 아름다운데 어딘가 처연하다. 그 점이 매력이라면 매력이다. 확실히 깔끔해진 이야기라고 생각되는 <구체의 뱀>. 제목과 표지가 개인적으로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서 꼭 보고 싶었던 책이었다. 지금까지와의 인상과 비슷하면서도 전체적인 이야기에서 다른 느낌을 받았던 <구체의 뱀>. 다음 책을 한 권 더 읽어보면 이 느낌이 확실해지지 않을까 한다. 노스탤지어적인, 가족과 관련된 미스터리 성장소설을 보고 싶으신 분들께 한 번쯤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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