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들 펭귄클래식 109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책으로 둘러싸인 벽들 사이에서, 오로지 그들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사물들에 둘러싸여, 멋지고 단순하며 감미롭게 빛나는 사물들 사이에서, 삶이 언제까지나 조화롭게 흘러가리라 생각할 것이다. (-)그들의 소유와 욕망은 언제나 모든 지점에서 일치를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균형을 행복이라 부를 것이고, 얽매이지 않으면서 현명하고 고상하게 행복을 지키고, 그들이 나누는 삶의 매 순간 이를 발견할 줄 알 것이다." (p.20-21)

 

 

자본주의 사회에서 행복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물들, 즉 물질적인 것의 소유와 일치하는가?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은 제롬과 실비, 두 남녀가 학생 신분을 벗어나 사회에 진입하기까지 걸린 6년의 일상을 그린 소설이다.

 

"그들은 삶을 사랑하기게 앞서 부를 사랑했다." (p.28)

 

 

그들은 여유로운 삶, 자유로운 삶을 꿈꾸면서도 모든 사물들을 마음대로 취할 수 있는 거대한 부를 원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자유란 부에 구애받지 않고 풍요롭게 화려하게 살 수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부자이고 싶었다. 그들은 프티 브루주아였다. 하지만 그들은 자유를 이렇게 묘사하며 일과 자유의 관계에서 고민한다.

 

 

"(-)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보내는 날들, 게으름 피우며 눈뜨는 아침, 침대 한쪽에 추리소설과 공상과학 소설책을 쌓아놓고 뒹구는 아침나절, 한밤중에 센 강변을 따라 걷는 산책, 문득 가슴 벅차게 차오르는 자유의 느낌, 지방으로 설문조사를 나설 때마다 드는 휴가 기분을 사랑했다. 물론 그들도 이 모두가 거짓이라는 것, 그들이 갖는 자유의 기분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 일과 자유의 대립 관계를 엄격히 따지던 시기는 지난 지 오래라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그들에게는 그것이 무엇보다 직장을 선택하는 중요한 요소였다."(p.62-63)

 

 

취업난에 시달리는 요즘과 같은 시기에는 배부른 소리하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누군들 제롬과 실비와 같은 삶을 꿈꾸지 않겠는가. 많은 시간 일하는데 보내지 않고도 살아 갈 수 있는 편안한 삶. 일과 돈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 누군들 원하지 않을까. 문제는 이런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도 환상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고민한다. 제한된 사물과 부족한 부 속에서 자유를 갈망하는 것이다.

 

 

"그들의 세계에서 살 수 있는 수준보다 더 많이 갈망하는 것은 어떤 법칙에 가까웠다. 이렇게 만든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대 문명의 법칙이었고, 광고, 잡지, 진열장, 거리의 볼거리, 소위 문화 상품이라 불리는 총체가 그 법에 전적으로 순응하고 있었다."(p47)

 

 

그리고 그들은 사물들을 향한 자신들의 소유욕과 욕망을 자신들의 내부가 아닌 밖으로 돌렸다. 사물들에 대한 소유와 욕망은 분명 개인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인간의 심리를 교묘하게 조절하여 소비로 이끄는 광고부터 사회 전반적으로 소비지향적인 문화를 조장하는 흐름까지,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제롬과 실비를 소위 현대 문명의 '법칙'이라 불리는 그것에 순응하고 따르게 만들었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그 '법칙'에 순응하며 살아가는가?

 

 

그렇지 않다. 허례허식에 가득 차 보이는 것만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 특이나 만연하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의 모습이고 우리의 모습이다. 자신이 아닌 사회를 탓하며, 자신이 가진 물질욕과 소비를 합리화한다. 그런 합리화를 통해 스스로를 향한 죄책감을 덜고 끊임없이 '부'와 '사물들'을 추구하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사회는 사람들이 점점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게 되어가고 있다. 누구나 부를 꿈꾸고 부자가 될 수 있는 시대이다. 여기서 불행이 시작된다." (p.63)

"그들이 사는 세상은 낯설고 화려했다. 자본주의 문화로 번쩍이는 세계, 풍요로움이 감옥처럼 둘러싸고, 행복이라는 매력적인 덫이 놓인 세계였다."(p.79)

 

 

그럼에도 사회의 변화는 무시 할 수 없다. 큰 외부의 압력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흔들리더라도 중심을 잃지 않으면 된다. 여기서 <사물들>은 자본주의의 시류에 휩쓸려 자신의 주체성을 잃지 말라고 말한다. 본래적 자아로서 자신의 욕망을 읽어내며 살아가야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가. 자본주의 세계가 놓은 가짜 행복의 덫에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은 떠났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만원인 지하철, 짧기만 한 저녁, 치통처럼 따라붙는 통증과 불확실성의 지옥에서 빠져나온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불투명했다. 그들의 삶은 팽팽한 줄 위에서 끊임없이이 춤춰야 하는 꼴에 지나지 않았고, 미래는 꽉 막혀 있었다. 극심한 공허감, 기댈 곳도 없으면서 끝을 모르는 비참한 욕망에 시달렸다. 그들은 소진된 느낌이었다. 은둔하기 위해, 잊기 위해 자신들을 달래기 위해 떠났다." (p.106~107)

 

 

제롬과 실비는 파리에서 스팍스로 도망치듯 떠난다. 욕망에 젖어들어 비참해지는 자신들의 모습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만든 암울한 미래와 그러한 미래에도 계속되는 욕망에 벗어나기 위해 떠난다. 그리고 스팍스에서의 생활을 통해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가 놓은 가짜 행복의 덫을 알아차리고 자신들의 상태에 대해서도 인식한다.

 

 

"적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들 안에 있었다. 그들을 타락시키고, 부패시켰으며 황폐화시켰다. 그들은 속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조롱하는 세상의 충실하고 고분고분한 소시민이었다. 기껏해야 부스러기밖에 얻지 못할 과자에 완전히 빠져 있는 꼴이었다."(p.79)

 

 

그들은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던 자신의 모습을 반성한다. 그리고 파리와는 다른 시골같은 스팍스에서 이와 같은 사유를 계속한다.

 

 

"예전에 그들은 적어도 무언가를 소유하고 싶은 광기에 휩싸인 적이 있었다. 이런 강렬한 욕구가 그들의 삶을 지탱해 주기도 했다. 앞쪽으로 팽팽히 당겨진 듯한 조급하고 욕망에 사로잡힌 느낌으로 살았다. 그리고? 무엇을 했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무엇인가, 아주 천천히 파고드는 조용한 비극과 같은 것이 그들의 느려진 삶 한가운데 자리 잡았다. 아주 오래된 꿈의 파편 가운데, 형태를 잃은 잔해 가운데 그들은 방향성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들은 경주의 끝, 6년 동안 삶이 굴러온 모호한 궤도의 끝, 어느 곳으로도 인도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은 우유부단한 탐색의 끝에 서 있었다." (p.126-127)

 

 

하지만 그들이 다다른 곳은 망망대해의 한가운데였다. 방향성을 잃고 지향할 바를 망각했다. 유일하게 그들의 삶의 원동력이었던 소비 욕구를 채울 수 없는 스팍스에서의 생활은 그들에게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계기도 주었지만 소비 이외의 삶은 생각해본 적 없던 두 사람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들은 스팍스에서 이방인이었고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몽유병자였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도 이방인이었고 어디에가든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갈 뿐인 몽유병자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대다수의 인간들이 그렇지 않은가. 스스로에게 있어서 이방인이고 비슷하게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몽유병자가 아닌가. 우리는 달라야한다. 제롬과 실비처럼 자신에게마저 이방인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스스로의 일상을 몽유병자처럼 반복하고 있다고 느끼게끔 만들어선 안 될 것이다. 행동(deed)와 욕구(need) 사이에 자신이 서 있어야지, 그 둘을 멀리서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이방인의 모습을 하고 있어선 안 된다. 우리의 일상은 그렇게 허무하지도, 보잘 것 없지도 않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을 맺을수도 있고 에필로그에서 끝을 맺을 수도 있다. 여기서 이야기를 끝을 맺을 경우, 제롬과 실비는 방황 끝에 좌절하며 다시 탐색의 길을 다시 떠나는, 자기 인식을 통한 미래의 희망을 발견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에필로그에서 이야기의 끝을 맺는다면, 두 사람이 이러한 방황 끝에 발견 한 것은 상황의 인식후에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프티 브루주아는 끝내 벗어날 수 없다는 메세지와 함께 가치관의 변화가 중요하다라고도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치관의 변화는 좀처럼 힘드니, 에필로그의 결말은 다시 '사물들'의 품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제롬과 실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분명 후자가 더 현실적이며, 대다수의 사람들의 행동일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마지막을 메우는 카를 마르크스의 문장처럼 어떤 결말이든 진리의 일부일 것이다. 어떤 원인에 의해 어떤 결과가 나오고 그 결과에 도달하기 위해 어떤 수단을 쓰던지, 그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과 결과로 수렴된 수단이 진실되다면 그 모든 것은 어쨌거나 진리의 일부며 진실되다는 것이다. 제롬과 실비, 그들에게 있어서 '사물들'에서 찾는 행복 역시 진리이며 진실인 것이다. 사물이라는 수단이 행복이라는 결과로 그들을 이끌 수 있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진리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것이 옳지 않다, 그르다라고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대화도 하나 없이 오직 묘사로만 진행되는 이 이야기-묘사로만 진행된다하면 지루하고 재미없을 것 같으나 간결한 문체와 군더더기 없는 문장들은 굉장한 흡인력과 가독성을 지닌다.-는 실험적 글쓰기의 모습도 보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우리가 선택한 자유의 모습을 관조적으로 바라보게 하여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분명 우리를 '사물들'로 얽어매지만 선택의 자유 역시 주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있어선 진실된다. '사물들'은 우리네 삶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무엇이겠지만 그것을 어떻게 수용하는가는 우리의 몫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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