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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ㅣ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나쓰메 소세키 지음, 김정숙 옮김 / 비채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간혹 어떤 책들은 느긋하게 읽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는 흡인력이 없다거나 재미가 없어서 안 읽히는 경우와는 다르다. 그저 나도 모르게 느긋하게 읽어버리는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문>도 이에 해당하는 책이었는데, 몇 주에 걸쳐 천천히 읽고 나서는 내가 꽤나 책 분위기에 젖어들어 있었구나, 라고 느꼈다. 책을 덮고 나서도 가슴에 와닿는 깊은 울림에 한 동안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문>은 지극히 평범하고 어두운 가운데 큰 사건 없이, 엄청난 절정이나 위기도 없이, 한 부부의 이야기를 고즈넉하게 풀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야기가 고즈넉하다하여 지루한 것은 아니다. 이야기는 과거의 짐을 내려놓지 못하고 불안에 떨면서 살아가는 소스케와 오요네, 두 사람의 모습과 일상의 행복이 교차하면서 앞에 깔아놓은 '문'과 관련된 복선과 암시, 상징은 서스펜스로 이어져 뒤로 향할 수록 긴박감을 더한다.
"그 당시 소스케의 눈은 항상 새로운 세계에만 집중돼 있었다. 그러므로 자연이 한 차례 사계절의 색을 보여버린 뒤에는 재차 전해의 기억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꽃이나 단풍을 맞이할 필요가 없어졌다. 강하고 강렬한 생명을 살았다고 하는 증명서를 어디까지나 움켜쥐고 싶었던 그에게는 살아 있는 현재와 지금부터 태어나려고 하는 미래가 눈앞의 문제였지, 사라져가는 과거는 꿈처럼 가치 없는 환영에 불과했다."
과거에 이렇게 생각했던 소스케는, 과거가 환영이 아님을, 현재를 끊임없이 파고드는 괴로움임을 깨닫게 된다. 과거가 현재를 압박해오고, 그 압박에 견디지 못한 소스케는 결국 직장에 휴가계를 내고 절로 향한다. 그는 종교에서 답을 구하려 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절을 떠나는 마지막 날, 선문 앞에 선다.
"나는 문을 열어달라고 왔다. 그렇지만 문지기는 문 안쪽에 있어서 아무리 두드려도 끝내 얼굴조차 내밀지 않았다. 단지 "두드려도 소용없다. 혼자 힘으로 열고 들어오너라" 라는 목소리만 들려왔을 뿐이다. (-) 그 자신은 오랫동안 문밖에 우두커니 서 있어야 할 운명으로 태어난 것 같았다. 거기에는 옳고 그름도 없었다. 그렇지만 어차피 통과하지 못할 문이라면, 일부러 여기까지 고생 끝에 닿는다는 건 모순이었다. 그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도저히 왔던 길로는 되돌아갈 용기가 없었다. 그는 앞을 바라다보았다. 앞에는 육중한 문짝이 언제까지나 전망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는 문을 통과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문을 통과하지 않고 끝날 사람도 아니었다. 결국 그 문 아래에 꼼짝달싹 못하고 서서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야 하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p264~265)
거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이 장면에서 사람들은 큰 실망을 할지도 모른다. 현실을 피해 가마쿠라에 있는 절로까지 도망쳤는데, 결국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그대로 집으로 귀가하는 건 어딘가 절망스럽다. 과거로부터 벗어나려 했지만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과거는 지금에 와서 보면 사건다운 사건이 아닐지도 모르며 그렇게 보면 처음부터 해결될만한 사건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문>은 마치 한편의 작가 예술 영화를 보듯, 사건 다운 사건 조차 일어나지 않기에, 해결될 사건도 없이 그저 흘러갔다.
작품 해설에서는 선문 앞에 선 소스케가 종교를 통해 구원 받지 못한 이유는 "그의 마음이 화두가 의미하는 자기 존재에의 근원적인 물음을 향하지 않고 현재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수단"이라고 하였다. 그저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한 수단으로서는 분명 내면이 '문'은 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느낀 건 과거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종교에 귀의해 내면의 '문'을 열지 못한 소스케에 대한 실망감이 아니다. 나는 여기서 과거로부터도, 현실로부터도 꼼짝달싹 할 수 없는 한 인간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범인의 표상이었고, 우리의 모습이었다.
"그는 오늘까지의 경과로 미루어 모든 상처를 치유해주는 데는 세월이 약이라는 격언을 자기 자신의 경험으로 터득해서 가슴 깊이 새기고 있었다. 그 믿음이 그저께 밤에 완전히 무너져버린 것이다." (p.266)
나는 소스케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했다. 시간이 해결 해주리라 생각했던 과거의 상처는 전혀 해결되어 있지 않았다. 작은 풍파에도 상처는 마치 어제의 것처럼 아파왔고 소스케는 불안에 떨었다. 그리고 그는 선문 앞에서 알게 된다. 자신은 문을 열 수 없다고.
하지만 끝 문장을 자세히 보면 '여지'가 있음을 할 수 있다. 문을 통과할 사람은 아니지만, 문을 통과하지 않고 끝날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그는 내면의 문을 열기 위해 비록 그 삶이 문 앞에서 기다리며 불안에 떨어야하는 삶일지라도 앞으로 살아갈 것임을 암시한다. 만약 저 끝 문장이 없었더라면, 내가 소스케였더라면, 나는 과거의 상처에 못 이겨 끝내 삶을 이어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스케는 달랐다. 그는 내면의 문도 열지 못했고 과거의 일도 해결하지 못했지만 어쨌거나 앞으로 계속 살아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여기서 무척이나 희망적이고 역동적인 움직임을 느꼈다. 그리고 실의와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내면의 문을 열고 과거를 딛고 일어서는 데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는 메세지를 발견했다.
끝에 봄이 와서 기쁘다는 아내 오요네의 말에 소스케는 또 겨울이 올 거야, 라고 말한다. 나는 여기서 사건이 제기되지도, 해결되지도 않은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과 함께 또 한 번 삶에 대해서 느꼈다. 반복되는 계절 속에서 지울 수 없는 과거를 이고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두 부부에게서, 나는 또 다시 한 번 범인의 표상과 평범함을 느꼈다. 마치 영화와 같았다. 눈 앞에 그려지는 이 금슬 좋은 부부의 한적한 일상 가운데 일어나는 세속의 일들이 그들을 현실에 붙잡아 두고 있었다.
"소스케와 오요네는 금슬이 좋은 부부임에 틀림없었다. 같이 산 육 년이나 되는 오늘까지 단 하루도 서먹서먹하게 살아본 적이 없었다. 말다툼으로 얼굴을 붉힌 기억은 더더욱 없었다. (-) 그들에게 절대 필요한 것은 서로의 존재뿐이었고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충분했다." (p171)
분명 소스케와 오요네는 작가 나쓰메 소세키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부부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게는 이는 무척이나 이상으로 보였다. 다툼도 없이, 서로가 서로 뿐인 두 사람. 리얼리티가 떨어지는 이 부부의 삶에 리얼리티를 부여한 건 소스케 동생 고로쿠의 일과 친구 야스이와 관련된 과거 등이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이런 부부도 있구나, 라고.
하지만 이 <문>이라는 소설이 가지는 큰 매력중의 하나는 문체다. 담담하면서도 눈 앞에 그려지는 듯한 섬세한 묘사와 표현력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거리는 좌우에 비치는 상점 불빛으로 환하게 밝았다. 상점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자도 옷도 똑똑하게 구별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넓은 추위를 비추기에는 너무나 미약한 빛이었다. 밤은 문마다 달린 가스등과 전등을 저만큼 밀어넣고 여전히 어둡고 크게 보였다. 소스케는 그 세계와 조화를 이룰 만큼 검은 외투에 몸을 감싸고 걸었다. 그때 그는 자기가 숨쉬는 공기조차 회색으로 변해 폐 속 혈관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 부분은 과거의 상처가 현실을 다시 위협하여 마음이 어지러운 소스케가 거리를 방황하는 심정을 묘사하고 있다. 나는 친구에게 이 문장을 보여주었는데, 친구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기형도의 시를 읽을 때처럼, 문장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설레, 몇 번이고 이 문장을 읽고 어플에 적고, 독서노트에도 적었다. 게다가 이러한 문장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심오한 뜻이 없어도, 삶과 관련된 혜안을 가져다 주지 않아도, 내게는 무척이나 의미가 깊게 다가왔다.
이 소설의 매력을 또 하나 더 언급하자면, 당대 일본의 현실이 여기저기 섬세하게 뭍어난다는 점이다. 가옥의 구조, 관습, 놀이 등 이러한 당대 현실을 드러내는 지표들은 소설에 크나큰 리얼리티를 줌과 동시에, 일본 고유의 전통이 묻어나 즐거웠고 흥미를 느끼게 만들었다. 특히나 소설에 등장하는 주 장소인 일본 가옥은 그 구조가 색달라 실제로 한 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보통 책은 한 번 읽고 마는 편인데, 나쓰메 소세키의 <문>은 또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생각이 드는 것은 다시 읽으면 또 다른 감상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과 이번에 발견하지 못했던 또 다른 매력을 이 소설에서 느낄 수 있을거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작품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느낌이 자꾸만 든다. 그건 내가 놓친 부분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처 짚고 넘어가버린 부분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내면의 '문'과 마주하고 싶어질 때, 내면의 '문'을 열지 못해 좌절할 때, 나는 이 책을 또 펼쳐 볼 것이다.